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14화 (214/335)

214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14)

막대한 권력에는 그에 준하는 의무와 책무 또한 딸려 온다.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긴 하나 백악관의 주인으로서 주어진 책무를 고뇌하며 열심히 수행했는지, 흑발에 젊고 건강해 보이던 릭 오리하가 재임을 마치고 백악관에서 나왔을 때 그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8년 백악관에 머물렀을 뿐인데, 20년의 세월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대통령 직무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가 급격한 노화를 일으킨 것.

‘아직 백악관에 들어간 지 1년도 안 됐는데, 확 늙었네.’

정호준과는 나름 친분이 있다 보니 오리하는 공식 석상에 나설 때처럼 화장 같은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주름진 게 확연하게 엿보였다.

건강을 관리해 주는 주치의를 시작으로 피부과 의사나 마사지사와 같은 건강에 필요한 온갖 케어를 받을 텐데도 저러니, 정호준은 저도 모르게 ‘일에 매몰돼선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쉬엄쉬엄하자.’

큰돈을 벌었는데, 돈을 쓰면서 세상을 즐겨도 모자랄 판에 일에 파묻혀 수명을 줄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몸에 좋은 건 매일같이 먹고 있으니 좋은 것들을 보며 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나저나 정 대표님이 한국에 다녀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즐거우셨습니까?”

확 늙은 오리하의 얼굴 때문에 백악관에 방문했던 목적을 까맣게 잊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삼천포에 빠진 정호준을 오리하의 질문이 일깨웠다.

“놀러 갔다 온 게 아니라 투자차 간 겁니다. 즐거울 게 뭐 있겠습니까?”

“나처럼 매일같이 일에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호준의 결혼식 때 봤던 그 친구, 기태 박이 맞나요? 어쨌건 그 친구와 만나서 놀기도 했을 거고, 여행도 다니면서 즐겼을 거 아닙니까.”

친구에게 투정하듯 던진 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진 오리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유쾌하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오리하의 질문을 들은 정호준은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호칭을 정 대표에서 호준으로 바꾸면서 친한 사이끼리 안부를 묻는 듯한 기색을 띠게 했지만, 미국 대통령이 아직 그 어떤 반짝임조차 보여 주지 않은, 자국인도 아니고 외국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압박감을 받았다.

오리하가 박기태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CIA를 포함해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박기태와 박남정을 주시하고 있단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혹시, 리온 에드워드 페트 CIA 신임 국장의 방문도 대통령님께서 의도하신 겁니까?”

“페트 국장이 정 대표님을 찾아갔었습니까? 힐링턴의 편에 붙어서 나를 배척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은 있어도, 일은 잘하는 모양이네요.”

자신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 돌려 말했으나 CIA 신임 국장인 페트가 걱정하는 바는 본인 또한 염려되는 사안이라고 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페트 국장에게도 이야기했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스와프를 팔 수 있었던 게 제 뒤에 있는 미국의 덕분이란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미국인으로 있는 게 본인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태라는 친구는 혹시 미국에 관심 없답니까? 자유의 나라 미국은 그 누구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이죠.”

“특별하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굳이 대통령께서 이렇게 나서서 권할 일입니까?”

“정 대표와 친하다는 것, 정 대표가 기태 박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만으로도 기태 박은 특별해진 겁니다. 정 대표는 똑똑한 사람이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요?”

계속되는 오리하의 압박에 정호준은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 정호준의 표정이 변함과 동시에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선을 조금 넘었군.’

정호준의 표정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눈빛에 냉기가 서리자 오리하는 자신이 조금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호준이 조금 저자세인 면이 있지만, 돈과 언론을 손에 쥐고 흔드는 정호준은 백악관의 주인조차 가벼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이들의 패밀리 네임에 제 이름 대신 로슬러를 붙인 게, 그런 제 의지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 생각하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

“내가 조금 선을 넘은 것은 인정합니다. 사과하죠. 하지만 정 대표, 내 제안은 정 대표와 기태라는 친구를 위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정호준의 얼굴에 서린 냉기가 조금 줄어들자 이때가 기회라는 듯 오리하는 자신의 할 말을 이어 갔다.

“나와 미국의 정보기관이 기태라는 친구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다는 건, 중국의 신화사(NCNA)나 국가안전부(MSS), 러시아의 연방보안국(FSB)과 해외정보국(SVR),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CIRO) 또한 기태 박이란 친구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의미합니다. 정 대표가 기태와 그의 부친인 남정 박에게 경호원을 배치해 줬지만 작정하고 노리면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일 겁니다.”

오리하의 말은 논리적으로 어느 한 곳 틀린 부분이 없었다. 지금은 정호준의 부인이 된 아리아 로슬러를 제외하면 정호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박기태와 박남정 부자뿐이다. 상징성은 충분했다.

“미국의 혈맹인 일본이야 우리가 강한 경고를 남기면 무리하게 기태를 어떻게 하는 일은 벌이지 않겠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다릅니다. 기태를 지킬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으로 귀화하는 겁니다.”

패권국인 미국의 국적을 갖고 있는 것. 미국 국적만으로도 뛰어난 방패가 된다. 대한민국이나 일본이 미국을 국토 내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그래서지 않던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의 뜻을 곡해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귀화하는 건 제가 아닌 기태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대신 CIA와 주한미군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군요.”

“CIA와 주한미군에 한국에 파견 중인 트리오플 경호팀과 협력해서 기태의 안전을 보살피라고 이야기 남겨 두겠습니다.”

“대통령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정호준은 개인적으로 주한미군 사령관에게도 따로 선물(뇌물)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리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빚을 지우려고 왔는데, 빚을 탕감하는 선에서 그치겠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 뭡니까?”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묻는 오리하의 질문에 정호준은 자신이 백악관을 찾은 이유를 이야기했다.

“오사마 반리덴의 행방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처우에 대해 조언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지금까지 오리하 때문에 정호준이 감정의 격변을 보였다면, 이번에는 오리하가 감정을 드러냈다.

* * *

오리하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전쟁 종전을 공약에도 내걸었지만 국가 차원의 전쟁은 대통령이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종전에도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다. 반리덴의 사망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전쟁을 멈추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되어 줄 거다.

“도주에 성공한 반리덴이 어디로 숨었는지 정 대표가 어떻게 아는 거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PMC 트리오플이 이라크 전쟁에서 활동 중이잖습니까? 그들에게 전해들었습니다. 100%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다더군요.”

9·11 테러로 나라 전체가 뒤집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반리덴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패권국 미국의 분노를 피하고자 반리덴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쳤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중 하나인 탈레반이 정권을 잡고 있는 나라로 미국과는 당연히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런 이유로 탈레반은 반리덴을 인계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니들이 우리한테 넘어올 수나 있겠어?’란 계산을 가지고 배짱을 부린 거다.

아프가니스탄은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국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이란이나 파키스탄을 통해야만 했다. 이란은 대표적인 반미 세력이라 미국에게 길을 빌려주지 않을 테고, 파키스탄은 미국과 관계를 맺고 있긴 하나 탈레반이 정권을 쥐고 흔드는 아프가니스탄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니 친분을 떠나서 남의 나라 군대가 자국을 지나가는 것을 달갑게 여길 국가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전신인 조선 또한 일본이 길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잖은가? 평상시였다면 이런 탈레반의 계산은 들어맞았으리라.

하지만 감정이 상할 때로 상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복수를 천명하고 분풀이할 곳을 찾고 있는 미국은 파키스탄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대테러전쟁에 협력하지 않으면 폭격 맞아 신석기시대로 돌아갈 각오를 해라.”

그 유명한 석기시대 발언을 들은 파키스탄 정보국장과 파키스탄 대통령은 길을 빌려주는 것을 용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란 또한 미국에 협조를 해 주었다. 아무리 미국을 적대시하는 반미국가로 유명하다지만,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씩씩대며 눈에 뵈는 게 없는 패권국 미국의 분노를 감당할 깡다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까불고 대드는 것도 상황을 고려해 가면서 해야 하는 거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복수를 천명한 당시의 미국에게는 깐죽거리며 대들기를 잘하는 북한조차 몸을 사렸다.

아프가니스탄으로 쳐들어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이며 반리덴을 잡기 위해 날뛰었지만, CIA의 삽질로 반리덴이 도주에 성공하며 전쟁이 길어졌다.

“제 조국 한국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미국도 이에 걸린 것 같더군요.”

오사마 반리덴은 동굴에 머무르며 연설하는 비디오 영상을 한 번씩 배포하며 CIA와 미군의 이목을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 집중되게 만들었다. 파키스탄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존재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게 길을 빌려준 파키스탄으로 도주한 후 잠적했다.

덕분에 미국은 10년 가까이 삽질을 이어 갔고, 반리덴 처형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을 실행하기 전 파키스탄에 숨은 것 같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CIA는 소아마비백신을 파키스탄에 지원하며 채혈해 반리덴의 자식들의 DNA를 확보했다.

소아마비백신을 지원하는 캠패인을 통해 반리덴을 행적을 찾고 사살하는 데 성공한 미국의 행보는 이후 파키스탄이 미국에서 지원하는 소아마비백신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지만.

‘그래 봐야 미국에는 별 타격이 없지.’

백신을 거부해야 봐야 미국은 오히려 돈을 덜 써서 좋을 뿐이었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동쪽으로 56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아보타바드 호화 주택가에서 반리덴의 자식들을 본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CIA와 군부에 일러두고 은밀한 탐색을 지시하겠습니다. 정 대표님의 주신 정보가 맞다면 정말 큰 빚을 진 셈이네요.”

“제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라크의 전후처리에 민주주의를 강요하거나 친미 인사를 정부 관리로 두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무한한 감사의 감정이 묻어나던 오리하의 표정은 정호준의 조언을 듣자마자 다시 경색되었다.

“친미 인사들이 정국을 이끌어 나가게 하지 않으면, 전쟁의 당위성이 사라집니다.”

정말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전쟁이 되어 버리는데, 그 부담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미군이 그 땅에서 학살을 저질렀는데, 정치인들이 친미를 부르짖는다면 그게 과연 국민들로부터 어떤 공감을 얻겠습니까? 민주주의는 국민들에게 그런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하단 거, 대통령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호준의 따가운 일침에 오리하는 입을 다물었다.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라크는 이슬람이란 종교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나라다. 이슬람을 믿는 이가 정치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공감은 얻어 내리라.

“만약 이 두 가지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라크에서는 다시 내전이 터질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사우디 때문이라도 다시 이라크에 지원을 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 1회차 때 미국 정부의 이상한 전후 처리 때문에 이라크에서는 2012년부터 2017까지 약 5년 동안 내전이 벌어졌고, 미국은 다시 이런저런 지원을 하며 전쟁을 벌인 책임을 지게 된다.

“으으음.”

빅3 두 곳을 파산시키라는 것에 이어 또 한 번 골치가 아프고 리스크가 막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정호준 때문에 오리하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