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05)
인류가 전기차나 수소차를 개발하는 이유에 꼭 친환경적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동차는 휘발유나 경유와 같은 기름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현 인류의 필수품으로 지금도 산업 곳곳에서 사용되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기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동차가 굴러가도록 대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또한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착각해선 안 되는 게 미래자동차가 지구와 환경을 염려해서 친환경 기술을 개발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미래자동차는 공익이 아닌 본인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 집단 중 하나였다.
친환경 자동차를 개발하는 이유는 결국 시장에 차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환경을 생각하는 인류의 사고방식과 기름이 동나기 전에 기름을 대신할 에너지원으로 굴러갈 수 있게 해서 계속 차를 팔아먹으려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란 거다.
회사의 자본을 투입해서 충전소를 짓거나 후진국, 개발도상국들에 지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거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을 기업의 탈을 쓴 미래자동차가 달갑게 여길 리 없잖은가? 실제로 보고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박몽구 회장과 박의선 부회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호준이 준비한 보고서에는 디폴트 때문에 달러의 가치가 내려가 원자재의 값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그래서 본인이 추산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공사비가 들 수 있다는 것도 염려도 적혀 있었다.
“전기차가 현상 유지라면, 수소차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환경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거죠. 저는 종국에는 수소차로 가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인류가 수소차를 받아들이기 너무 이릅니다. 회장님이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던 전기차는 갈림길보다는 중간 기착지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적인 관측이긴 하지만 기술이 좀 더 축적되면 비용 자체를 줄여 줄 획기적인 방법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기차 충전소는 훗날 수소차 충전소로 개조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 * *
친환경적인 정책을 만들고 그걸 세계에 지키라고 요구하는 UN의 행보는 사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폭거였다.
‘왜 우리한테만 그러는데?’
정작 환경을 오염시키며 지구를 이 꼴로 만든 건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이잖은가? 본인들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물질을 펑펑 배출해 지금 그 위치까지 성장해 놓고 이제 와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에게 환경을 이유로 제약을 가한다.
‘지들만 잘 살면 다야?’
‘사다리를 끊겠다는 거지?’
당장 인프라를 깔고 공장을 돌리느라 바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은 선진국들의 행태에 반발했다. 당장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인류의 생존이라는 큰 대의가 보일 리 없다. 그리고 그걸 욕할 것도 없었다.
정호준이 준비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의 입장까지 모두 살핀 리포트를 읽으며 설명을 들은 박몽구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호준이란 손님을 앞에 두고 거의 30분을 아무 말 없이 혼자 숙고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냉정한 판단 고맙습니다. 하지만 정 대표님께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해 드리겠습니다.”
“전기차 산업을 함께할 동반자로 우리 미래를 선택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박몽구는 정호준과 만난 뒤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호준을 바라봤다. 왜 미래를 선택했냐는 질문과 함께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정호준은 거짓 없이 진실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미래에 전기차 개발 부서를 만들라고 제안한 이유는, 제가 비전이 있다고 생각한 미국의 전기차 생산 기업이 제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전기차 시장이 가져다줄 메리트가 큰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
“자동차 기업이 우리 미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기업을 운영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대표님처럼 큰 성공을 이룩한 이가 산업체 기업을 경영 못 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려면 할 수 있지 않냐는 물음에 정호준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죠. 돈도 있고 월가에 인맥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문경영인을 채용해 기업을 맡긴다 해도, 회사가 자리를 잡고 제대로 된 수익을 낼 때까지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전문경영인이라고 앉혀 뒀는데, 자리만 지키며 월급루팡을 하는지도 간간이 살펴봐야 했고 전문경영인의 경영 방향, 스카우트 방향이 올바른지도 따로 검사를 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공부하며 배워 나가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이제 좀 바쁜 시간이 끝나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았는데, 다시 업무 지옥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 전문가에게,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큰돈을 벌 수 있는데? 게다가 창업자의 입장과 달리 투자자는 어렵다 싶으면 손을 털고 나올 수도 있었다.
“산업 쪽은 금융과 달리 딱 잘라 마무리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죠. 그리고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미래자동차의 노동자들만큼이나 강성입니다. 줄다리기를 하는 건 제가 아닌 전문경영인의 몫이겠지만, 파업이 정리될 때까지 그리고 정리하느라 양보한 조건 같은 것들을 확인하고 감당해야 하는 건 오너인 제 몫이 되겠죠.”
정호준이 노조의 파업을 언급하자 눈앞의 두 부자(父子)는 그것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우리 미래가 대표님의 투자를 받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식으로 돈을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유상증자죠.”
“주주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유상증자는 주식회사에서 주식을 더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체 주식 수가 늘어나 주주들의 지분율이 낮아지니 기존에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은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유상증자를 단행한다는 이유로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니 경우에 따라선 이중으로 손해를 보는 거다.
“무슨 주주 핑계를 대십니까? 원하시면 언제든 하실 수 있잖습니까? 유상증자를 진행하시더라도 그 주식을 받는 주체가 우리 JHJ Capital이라면, 주가가 크게 내려갈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박몽구가 보유하고 있는 미래자동차의 지분과 국민연금이 보유한 지분, 박몽구 우호세력이 가진 지분을 합치면 과반을 넘긴다. 박몽구 회장이 유상증자를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 대표님께서 확보하신 미래자동차와 지아자동차 주식이 20%를 넘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 유상증자를 진행하든 간에 정호준에게 지분을 추가로 쥐여주게 되면 잘못했다간 경영권 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아니, 이미 정호준이 20%를 보유 중이란 것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박몽구의 지분 언급에 정호준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응했다.
“제가 많은 지분을 쥐고 있는 게 걸리시는 거라면, 양쪽 모두 유상증자를 진행하시죠. 미래자동차와 지아자동차가 전기차 개발을 목표로 컨소시엄을 진행하면 되는 거잖습니까?”
미래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지아자동차 또한 박몽구 일가의 소유(?)지만 지아자동차와 미래자동차는 각각이 독립적으로 경영되는 회사다. 몰래 숨겨 둔 곶감을 빼먹듯 지아자동차의 돈을 미래자동차가 가져다 쓰는 건 불법이었기에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이런 번거로운 절차는 필요했다.
“우리 미래가 정 대표님의 투자를 거절했을 때 정 대표님께서 어떤 선택을 내리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국 재벌이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이유가 그들이 기업의 경영권 꽉 쥐고 있기 때문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되도록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박의선이 정호준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키요타 자동차를 선택하게 되겠죠? 미래자동차의 회장님과 부회장님을 두고 이런 말을 해서 좀 죄송스럽지만, 배당금 등을 모두 따져 봤을 때 키요타에 투자하는 게 미래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이득이란 판단을 내렸습니다.”
정호준의 냉정한 분석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미래자동차가 키요타 모터스와 비교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었기에 박몽구와 박의선은 차마 아니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미래와 키요타 둘만 놓고 봐도 키요타가 나은 게 현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제가 미래를 협력자로 선택한 건, 제 뇌리에 일본을 아니꼽게 여기는 한국인의 감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을 참으며 제안한 건데 거절하시면, 키요타 모터스로 향할 수밖에 없죠.”
하물며 키요타 모터스는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밀어주기까지 하는 기업이다. 더 큰 이익을 볼 기회를 포기하고 미래자동차에 투자하려 하는데 경영권을 빼앗길까 무서워 투자받는 것을 거절하면 그때는 키요타 모터스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사실 거절하면 나야 속도 편해지고, 돈도 더 벌고 좋지.’
한국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 때문에 미래자동차에 투자하는 건데 투자를 거절하면, 속 편하게 이 사달을 만들어 낸 주체가 자신이 아닌 박몽구 일가의 욕심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었다.
돈이 많고 미래를 알고 있어 앞으로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정호준에게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이런 감정적인 부담감만 크게 영향을 끼칠 뿐이다.
“정호준 대표님께서 주신 투자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
“의선아, 당장만 보지 말고 멀리 봐라. 정 대표의 돈을 투자받은 키요타가 정말 전기차 상용화에 성공하면, 그땐 한국 시장도 위험해진다.”
정호준이 키요타 모터스에 큰돈을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키요타 모터스에 관심이 쏠리는 게 현재 2009년의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의 지원, 본인들의 자금, 정호준의 투자금을 쏟아부어 전기차를 개발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우린 외통수에 걸렸어. 지금 정 대표의 투자 제안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경영권에 대한 탐욕 때문에 회사의 미래를 말아먹은 욕심만 많은 무능한 인간으로 불리게 될 거다.”
박몽구는 일본이 전기자동차 상용화에 성공한 뒤의 미래가 잘 보였다. 일본이 전기차 시장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수록 성공한 이유를 분석하게 될 거다. 그럼 정호준의 투자가 성공의 이유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거고, 일본이 잘나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한국 국민들은 당연히 정호준에게 비난을 가할 거다.
문제는 정호준이 그 비난을 미래자동차로 돌릴 거라는 것.
자신은 미래의 경영진과 만나 비전을 제시하고 투자금까지 지원해 주려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호오, 역시 명성 값은 하는구나.’
부친이자 미래의 창업자인 박주영을 도와 미래 그룹을 한때나마 재계 1위 자리를 석권하게 만든, 창업자인 박주영의 사후 독립한 미래 그룹 계열사 중 미래자동차를 가장 크게 성공시킨 기업으로 꼽히게 만든 경영자다운 안목이었다.
“정 대표의 투자를 받겠습니다. 정 대표가 이야기한 대로 유상증자로 진행하시죠. 증자한 지분 모두를 JHJ에 넘기진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