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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의 돈질은 폭탄을 터트리는 것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그도 그럴 게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이제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에 3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봐도 무방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4인용 테이블 2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8인용 테이블. 정호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창업자들은 3천만 달러, 한화 345억 원이란 돈이 주는 무게에 잠깐이지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나마 약속 장소에 나온 넷 중 가장 성공한 편에 속하는 에릭 윌리엄스만이 3천만 달러라는 돈이 주는 마력에 홀렸음에도 금방 이성을 회복했다.
'숫자에 넘어가면 안 된다.'
막대한 돈이 풍기는 마력으로부터 벗어난 윌리엄스는 냉철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정호준을 보며 곧장 따졌다.
"너무 저돌적입니다. 정 대표님, 선을 넘고 계신다는 걸 자각하시죠!"
정호준이 지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는 걸 말이다.
* * *
Romeo CEO인 에릭 윌리엄스는 'Romeo'란 회사를 창업하기 이전에도 'Pylay Lab'이란 회사를 창업해 이미 한번 성공한 경험이 있는 이다.
'Pylay Lab'이란 회사가 무슨 아이템을 다루냐고? 한국에서 블로그(Blog)라 불리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게 바로 에릭 윌리엄스였다. 한국에서는 블로그(Blog)라 부르지만 미국에선 블로거(Blogger)라 불렀다.
'한국도 미국도 2020년에도 블로그 시스템을 잘 써먹는 걸 보면 저 사람도 분명 천재는 천재야.'
기초 자산이 얼마 안 되는 상태로 시작한 회사라 사업을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 끝내는 2003년에 구골의 인수 제의를 받아들여 회사를 매각했지만 그가 만든 블로그 시스템은 20년이 지난 뒤에도 보편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구골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어느 정도 일조했다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게다가 에릭 윌리엄스는 구골이 회사를 인수하는 걸로 모자라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이였다.
'물론 윌리엄스와 구골과의 동행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윌리엄스는 1년 정도 구골에서 일하다 구골이 상장한 지 1달 후인 10월 구골을 박차고 나왔다. 유의해야 할 게 에릭 윌리엄스가 구골에서 버틸 능력이 없어서 구골을 박차고 나온 건 아니라는 거다.
에릭 윌리엄스는 2003년 'MIT Technology Review TR100'에서 35세 미만 부문에서 세계 100대 혁신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2004년에는 PC Magazine에서 올해의 인물로 뽑혔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이였다.
'그런데 에릭 윌리엄스의 회사가 얼마에 매각됐는지 가격까진 알려지지 않았단 말이지.'
경매나 인수 같은 돈지랄을 할 때는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라도 파악해 놓는 게 좋다. 그래야 헛돈을 쓰지 않는다.
'뷔튜브를 지분을 주고 인수했던 것처럼 지분과 교환했을 수도 있지.'
뷔튜브처럼 지분과 교환을 했고 상장 후 매각하지 않고 계속 주식을 쥐고 있었으면 지금쯤 더 큰 돈을 벌게 됐으리라.
'사업자금이야 굳이 주식을 매각하지 않아도 나처럼 주식담보 대출을 받는 거로도 충분한 자본금을 만들 수 있다. 아니 다 떠나서 보고서대로면 그냥 자기 사업을 하려는 이네.'
초심자의 행운이 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첫 창업부터 성공한 남자다.
운영비를 기부받고 자신의 자산을 쏟아부으며 힘겹게 버텨야 하는 어려운 세월도 있었지만 결국 그 구골에 자신의 회사를 매각해 투자한 것의 몇십 배는 뽑아냈고 거기에 더해 구골을 박차고 나올 때 경영진이 윌리엄스의 퇴사를 만류했다는 보고가 적혀 있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한 이다.
성공한 경험이 있는 능력 있는 이에게 이제는 자본까지 생겼으니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다.
'나 같아도 사장님 소리 듣지, 회사에 계속 다니고 싶지는 않겠다.'
다니던 회사가 아무리 비전이 확실한 회사라 할지라도 사장님 소리 듣는 만 못하다는 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과 비슷한 절대불변의 이치였다.
'구골이 상장 성공을 지켜보면서 IT산업이 돈이 된다는 걸 확인해 야망이 생기기도 했을지도? 실제로 1회 차를 생각하면 미래를 보는 안목도 있는 것 같고.'
에릭 윌리엄스는 헤르메스란 아이템을 놓치지 않고 밀어준 것만 봐도 비전을 보는 안목 또한 날카롭다는 걸 확인 가능했다. 본인이 창업한 Romeo란 회사를 다른 기업에 충분한 값을 받고 팔았을 정도의 수완도 있었고.
사업을 하지 않아야 할 요인이 하나도 없으니 에릭 윌리엄스가 회사 생활 대신 자기 사업을 선택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 * *
선을 지키라고 경고하는 에릭 윌리엄스의 발언에 정호준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무슨 법이라도 어겼나요?"
법으로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암암리 스타트업 업계 전반에 관습법으로 군림하게 된 시장의 기준, 정확히는 투자자들의 기준을 흐트러트리는 행위였다. 2006년에 3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행위는 2010년대 이후에 3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것과 의미가 달랐다.
정호준 또한 자신의 행보가 그런 기준을 헝클어트리는 행위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능청스럽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정호준의 연기력이 발연기였을까? 아니면 정호준 정도로 지휘가 오른 이가 이런 기본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윌리엄스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이익!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발뺌하지 마시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다시 한번 부정할까 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알고 있음을 인정했다.
"암묵적인 룰을 꼭 지킬 필요는 없죠. 확실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값을 올릴 자유가 있는 게 자본주의의 논리 아닙니까? 제가 서 있는 땅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자유의 나라 미국입니다."
정호준은 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정호준과 에릭 윌리엄스가 말다툼을 하는 사이 돈에 취했던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이성을 회복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성을 회복하지 못한 것 같은 이가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조지 도시였다.
조지 도시는 정호준과 에릭이 말다툼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 대화가 멈췄을 때 대화에 끼어들었다.
"JHJ Capital의 투자 받겠습니다."
"도시!!"
브랫 스톤, 데이빗 글라스, 그리고 정호준과 언쟁을 이어 가던 에릭 윌리엄스까지. 서둘러 결정하지 말란 뜻을 담아 조지 도시의 이름을 불렀지만 조지 도시는 오히려 셋을 보며 말했다.
"왜?! 좋은 기회잖아!!"
3천만 달러라는 거금이 가진 마력은 아이디어의 주인인 조지 도시가 튕기거나 지분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강행하는 일도 없게 만들 만큼 큰돈이었다. 게다가 JHJ Capital은 기업에 돈을 투자해 놓고 경영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유명해 창업 꿈나무들 모두가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 주길 바라는 회사였다.
헤르메스가 아무리 미래에 큰 성공을 거두는 회사여도 성공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다. 당장은 여느 벤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성공을 확신할지 실패할지 제대로 견적을 재기도 어려운 상태인데 그런 회사에 모두가 가장 투자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회사에서 3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해 준단다.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잖은가?
가장 중요한 이로부터 OK 사인이 나오자 정호준은 황급히 이를 결정 난 사실로 만들기 위해 준비해 온 계약서를 꺼내 들며 말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저희 JHJ Capital은 조지 도시씨의 성공을 응원하겠습니다. 혹시 지원이 더 필요하시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야기하세요."
미리 몇 부 준비해 둔 계약서 중 하나를 꺼내 건네며 에릭 윌리엄스를 보며 말했다.
"Romeo의 투자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불합리하게 작성된 계약이라면 수정할 필요가 있겠죠. 지분 조정은 당연히 필요할 거고요."
본래 추가 투자가 이뤄지면 지분조정이 진행되기 마련, 정호준은 노골적으로 그 점을 피력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번 해낸 일을 두 번 세 번 못할 리는 없잖습니까?"
에릭 윌리엄스를 띄워 주면서도 은근슬쩍 돈 받고 나갈 생각 없냐고까지 돌려 말했다. 그런 정호준의 발언에 붉어졌던 윌리엄스의 피부가 좀 더 건드리면 터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빨개졌다.
하지만 자존심을 박박 긁어도 더러워서 나간다는 듯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돈보다 자존심을 우선시할 법도 한데, 아직은 돈이 더 소중한가 보지?'
그 정도 성공했으면 본인 자존심을 챙길 법도 한데 에릭 윌리엄스의 입에서 나가겠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30%는 조금만 욕심내도 경영권에 인접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힘을 쥐게 해 주는 지분율입니다. 30%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이디어의 주인인 조지 도시와 달리 에릭 윌리엄스와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두 창업자들과는 지분 조정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이어 가느라 시간이 걸렸다.
'Romeo'측의 발언은 상대적으로 약빨이 약했다. 그도 그럴 게 사내 프로젝트로 행사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라 사업 초창기부터 함께하긴 했으나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막 사업을 시작한 상황이라 'Romeo'사가 투자한 건 헤르메스의 창업자로 알려진 윌리엄스를 제한 브랫 스톤과 데이빗 글라스의 도움뿐이었기 때문.
주식을 상장하거나 회사를 매각하기 전에 이전 투자자로부터 투자를 대가로 건네준 주식을 되찾아 오는 사례가 종종 월가나 실리콘밸리에서 발생했기에 아무래도 거금을 쏟아붓고 더 부을 의향이 있다며 정호준에 비해 입김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은 브랫 스톤, 데이빗 글라스보단 주로 에릭 윌리엄스의 지분이 많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500만 달러가 추가로 소모되긴 했지만 정호준은 자신이 바랐던 대로 헤르메스의 지분 30%를 획득할 수 있었다.
* * *
정호준이 헤르메스 투자를 마치며 또 한 번의 대박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무렵 월가에는 한 가지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수십 년간 록펠러 재단의 재단장 자리를 놓고 경쟁을 이어갔던 찰스 로슬러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을 퍼트린 이는 당연히 찰스 로슬러였지만 소문은 찰스 로슬러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문이 퍼지는 데 크게 한 손 보태는 이가 있었기 때문
한 손 보태는 이의 이름은 바로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였다.
로슬러 재단의 손길이 닿는 모든 법인의 자금이 아닌 찰스 로슬러의 입김이 닿는 재단만 돈을 뺐지만 그것만으로도 메이도프 투자 증권이 흔들리기는 충분한 거금이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거금을 빼면 자금 순환에 문제가 생깁니다. 로슬러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거금을 내주고 싶지 않아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가 직접 찰스 로슬러를 찾아가 자금 회수를 취소 혹은 회수 자금의 규모를 줄여줄 것을 부탁했지만.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싶네."
찰스 로슬러는 직접 찾아온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의 부탁을 거절했다. 찰스 로슬러가 이사장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이어도 자금 지급을 거절한 이를 제재할 힘은 갖고 있었기에 메이도프는 투자금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남을 등쳐 먹으며 기생충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기꾼들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면서 자신이 당한 것에는 심히 억울해하는 경향이 강했고 로렌스 메이도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거금을 인출하게 되어 폰지사기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상태가 됐고 이에 버논 로렌스 메이도프는 찰스 로슬러에게 원한을 품고 그가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게 역으로 찰스 로슬러를 도와주고 있는 꼴인지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