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08화 (108/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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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골의 주가는 상승세를 이어가며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07년에 이르러서는 700불 선을 돌파한다. 주가가 얼마까지 상승한다는 세세한 정보는 알지 못했으나 정호준도 주가가 더 오르리라는 것쯤은 예측하고 있었다.

'2007년까지 주식을 쥐고 있는 거보다 지금 팔고 굴리는 게 더 큰 수익을 가져온다.'

700불까지 돌파할 주식을 주당 412.8불에 처분한다는 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충분한 거래였지만 그럼에도 정호준은 지금 주식을 파는 선택을 내렸다.

지금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골에 주식을 매각해 21억 8,639만 달러의 거금을 입금 받은 정호준은 빚 청산을 위해 움직였다.

가장 먼저 계획한 건 갚아야 할 것과 이자를 내며 계속 유지할 대출, 그리고 아예 갚을 생각이 없는 대출로 나누는 작업이었다.

갚지 않은 채 계속 이자를 내는 걸로 분류한 대출은 엔플 주식을 담보로 처음 대출을 받았던 골드만식스의 돈으로 약 2억 2,296만 달러에 달했다.

'엔플 주식은 되도록 쥐고 있어야 할 주식이다.'

서브 프라임 사태 때 한번, 리만 파산 때 한 번. 무려 두 차례나 폭락을 경험하게 되는 구골 주식과 달리 엔플 주식은 리만 브라더스 파산 전까지 꾸준하게 주가가 올랐던 주식이다.

'주가를 생각하는 건 두 번째지. 엔플 주식은 주가가 폭락하더라도 웬만해선 쥐고 있어야 해.'

엔플이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2007년까지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유니버셜 히치에서 만들 메신저 어플을 사과(애플)폰의 기본 어플로 만들어 시장을 선점하려는 계획은 가진 정호준에게 엔플 주식은 주가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그도 그럴 게 정호준이 손해를 우려해 엔플 주식을 모두 팔아 버리면 엔플이 정호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전무해진다.

'주주로서 회사의 CEO에게 요구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다.'

그런 이유로 주식을 더 매입하면 매입했지 엔플 주식은 매각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엔플 주식을 담보로 받은 골드만식스의 대출 또한 청산할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로 갚을 생각이 없는 대출에 분류된 건 리만 브라더스에 빌린 돈이었다. 담보 대출로 돈을 빌렸으니 담보를 팔았으면 돈 또한 갚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세상은 이치와 상식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차피 종국에 파산을 신청할 미래가 분명한 곳의 돈을 굳이 갚을 이유는 없었다.

'도덕, 상식, 도리 같은 것을 따지기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정호준은 리만 대출 건이 담보 없이도 그냥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아리아에게 연락했다.

'이럴 때 덕을 좀 보는 거지.'

어차피 버릴 곳이다. 그런 곳에 작은 비리를 추가한다고 큰 흠이 되지는 않았다. 쓰레기더미 위에 꽉 찬 쓰레기봉투 하나를 더 올리는 수준, 딱 그 정도에 불과하다고 정호준은 생각했다.

세 번째로는 메릴리치, 월스&파고, 씨티은행과 같은 지금 청산하는 게 좋을 대출들이었다. 세 은행에서 대출한 금액은 모두 합쳐 321,621,535(3억 2,162만)달러. 정호준은 곧장 대출을 상환했다.

메릴리치와 씨티은행에서 받은 대출의 경우 정호준이 부탁하면 리만 브라더스처럼 자산없이 담보 대출이 가능한 형태로 바뀔 수 있을 테지만 정호준은 상환하는 쪽을 선택했다.

'괜한 트집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리고 너무 밑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고.'

먹물이 잔뜩 묻은 종이에 먹칠을 한 번 더 한다고 티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지에 먹물이 묻는 건 바로 티가 난다. 서브 프라임을 리만으로 옮기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메릴리치, 씨티은행에 먹물을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 부정이 아무리 작은 거더라도 말이다.

폴류스에서 입금된 광산 매각금 100억 달러 중 15%가 러시아 정부에게 납부되어 실질적으로 정호준 소유 법인 계좌에 입금된 돈은 85억 달러였다. 그리고 구골 주식 매각금에서 양도소득세를 제해 17억 4,911만 달러, 일본에서 번 10억 달러, 한국에서 끌어모은 투자금 16억 9,642만 달러에 달했다.

주식이나 기타 법인 소유의 자산들을 현금화하지 않은 채 모인 돈은 약 137억 8,210만 달러, 현재 환율 1,150원으로 대입하면 약 15조 8,494억이란 돈이 정호준의 손에 쥐어졌다.

'슬슬 시작해야지.'

총알을 마련했으면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정보조직의 협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정호준은 미국 정보기관에 종사했던 이들을 스카웃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공작하는데 그들만 한 전문가는 없으니까.'

정호준의 자금 수혈로 전보다 더 규모를 확장한 트리오플 정보, 보안 관련자들과 전 정보기관 종사자들, 조나단과 자넷을 포함한 JHJ Capital의 인력 모두가 달라붙어 거대한 태스크 포스 팀을 구성했다.

TFT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명료했다.

'홍콩에 최대한 많은 유령법인을 만드는 것.'

겨울이 올 때쯤 시작한 유령법인 설립 작업은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찾아온 3월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정호준의 지시로 설립된 유령법인 숫자는 이미 백 단위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이번 투자에 130억 달러를 움직일 겁니다. 자금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주십시오."

TF팀은 백 단위를 훌쩍 뛰어넘은 유령법인에 확보한 총알을 나누는 작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유령법인 설립을 계속 이어갔다.

돈을 나누라고 지시를 내린 뒤 정호준은 또 다른 투자를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날 보러 오는 건가요?"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은 모두 돌아서면 보고 싶은 법. 깊은 관계로 발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여느 때의 연인처럼 뜨거운 부분이 있던 아리아의 착각에.

"올해 졸업 시즌이라 바쁘잖아요? 보고 싶은데 방해할 순 없으니 내가 가는 거죠."

실제로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아리아가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정호준은 새하얀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낀다지 않나. 돈을 위해 남을 속여먹기도 하는 판국에 관계의 평화를 위해 이 정도 거짓말은 입에 침을 바르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호준이 이런 달달한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의외네요."

아리아는 의외라고 말하면서도 기분 좋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

사람들은 수강 신청을 할 때 골고루 분포해서 짜지 않는다. 그렇게 강의 계획을 짜면 매일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숙사나 근처 하숙집, 원룸에 거주하는 게 아닌 이상 등하교는 여러 요소를 소모하지.'

학교를 오갈 때마다 학생들은 그만한 시간과 체력 그리고 돈을 소모하는 거다. 그렇기에 평일 내내 학교에 등교하는 널널한 스케줄보다는 조금 빡빡하더라도 평일 중 하루, 무리하면 이틀까지 공강을 만든다.

이러한 기조는 미국의 학생들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또한 모든 졸업반 학생들이 그렇듯 4학년은 수업의 개수도 몇 되지 않았다.

'보통의 4학년 학생이라면 널널해진 이 시간을 구직을 위해 쓰지만.'

아리아가 취업 준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시간을 쏟을 만한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덕분에 정호준이 원했던 미팅 날짜는 조금 늦게 잡히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정호준은 데이트를 하거나 아리아의 친구들을 만나 남자친구라고 소개를 받기도 했다.

이제 와 투자 때문에 온 거지 너 보러 온 게 아니라 말하기에는 거짓말이 너무 많이 진행됐기에 정호준은 그녀의 강의 계획표를 확인하고 약속을 잡았다.

정호준이 잡은 약속은 강의가 몰린 목요일, 상대는 다행히 정호준의 미팅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목요일 13시쯤 뉴욕대학교로 이동했다.

정확한 약속 장소는 뉴욕대학교 인근에 위치한 호텔에서 영업 중인 카페였다.

평소처럼 15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정호준은 긴장한 기색으로 대화를 나누는 4명의 남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 그들이 본인과 약속을 잡은 이들임을 확인한 정호준은 테이블로 다가가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JHJ Capital의 CEO 호준 정입니다. 약속 시간은 2시였는데 일찍 나오셨네요?"

"마..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조지 도시입니다."

학부생인 조지 도시의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회사에 재직하거나 아예 회사를 창업한 경력이 있는 다른 창업자들이 하나둘 자신을 소개했다.

"브랫 스톤입니다."

"Remeo CEO 에릭 윌리엄스입니다."

"Remeo 이사 데이빗 글라스입니다."

자신을 어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기에 정호준은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웃으면서 한명 한명 악수를 청했다.

물론 정호준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저들이 정호준이 어렵지 않게 여길 리 없었다.

"제가 여러분께 만남을 요청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충 짐작하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확실히 말하죠. 여러분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헤르메스(Hermes). 그리스 신화의 신의 이름을 붙인 이 사업 아이템은 추후 페이스 노트와 함께 세계 SNS 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정호준의 투자 제안에 직접 아이디어를 제공한 조지 도시는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했다. JHJ Capital은 실리콘밸리에서 엔젤 투자자로 명성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3인은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데이빗 글라스와 에릭 윌리엄스는 팟케스트 기업인 'Remeo'의 창업자로 헤르메스라는 아이템이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해 초기 투자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브랫 스톤 또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구글 고위직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어 자본적으로 아쉬울 게 없었다. 자본이 필요하다면 자기 자산을 추가로 투자해 지분을 높일 수 있었을 테니까.

'JHJ Capital이 붙는다는 건 최소한 비전은 확실하다는 의미인데, 좀 더 빨리 진행했어야 했다.'

어려워하는 걸 넘어 껄끄러워하는 게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좀만 더 늦었으면 지분을 얼마 못 얻거나 아예 참여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겠네.'

여기서 설득해야 할 사람은 아이디어를 제안한 조지 도시란 걸 눈치챈 정호준은 조지 도시를 보며 말했다.

"Remeo가 개최한 'daylong brainstorming session'을 보고 받은 적 있는데 비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 투자자로서 당연한 원칙이죠."

'Remeo'란 팟케스트 기업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망하는데 반에 헤르메스는 승승장구를 이어간다. 저들과 척을 지더라도 조지 도시의 마음만 붙잡으면 된다.

"지분 30%를 대가로 3천만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거금을 투척하는 정호준의 행보에 헤르메스에 투자하고 싶다고 말하자 기뻐했던 조지 도시조차 웃음기를 지웠다.

'지금이 돈질할 타이밍이다.'

정호준의 돈질은 조지 도시를 흔들고 다른 창업자들이 괜한 발악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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