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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02화 (102/335)

< 102 >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파악하는 거다. 사업상 만난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부터 자기 밑에 두고 부릴 직원의 능력과 성향을 파악하는 것까지. 사람을 보는 눈은 정말 여러모로 중요한 능력이었다.

위의 능력이 부족하면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고 아이템이 좋아 초반에 반짝 성공할 수는 있어도 성공을 끝까지 이어 갈 힘이 부족해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경험을 통해 키워 낼 수 있는 능력이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의외네. 이렇게 바로 만나겠다고 결심한다고? 호준이라면 만남을 최대한 뒤로 미룰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보는 눈과 관계 유지를 위한 능력들을 배워 온 아리아 로슬러는 그녀의 가족들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으면 정호준이 부담스러워할 거라 생각했다. 가족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을 때 정호준이 보여 준 표정을 생각하면 그녀의 생각이 틀린 것 같지도 않다.

'설마 내가 말한 것 중에 문제 될 게 있는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다.

이제는 그녀의 남자가 된 정호준이라는 이는 어떨 때는 어리숙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능숙한 뭐라고 딱 정의를 내리기 힘든 인간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생각이 많은 이로 결정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호준이 자신의 성향마저 억누르고 독하게 결심을 내려야 할 만큼?'

금융과 연관된 일, 돈 버는 재주만큼은 그 누구보다 탁월한 '천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렇기에 정호준이 요구한 대로 최대한 이른 시일에 약속을 잡았다.

약속 날짜는 닷새 후인 2월 18일이었다.

******

"2월 18에 약속 잡았어요. 그날 시간 비워 놔요."

침대 위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던 날 밤. 정호준은 함께 밥을 먹다 2월 18일에 약속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전달받게 되었다.

쿨럭!

자신이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아 달라 그랬지만 뭐가 이리 빠른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지 마요. 나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거든요."

동서양 그리고 남녀를 떠나 애인이 가족과 만나는 자리는 그 누구라도 부담스러운 법이다.

어쨌거나 그날부터는 정호준은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냥 딸의, 손녀의 남자로서 처가를 방문했어도 가슴을 졸였을 판국에. 그 처가가 무려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가문 로슬러 가문이다.

'아 죽을 것 같아.'

부담감이 얼마나 심한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 모를 하루하루를 보냈다. 커피를 마시다 구역질을 한 적도 있었다.

'차라리 이틀 전쯤 알려 주지.'

속으로 원망도 해 봤지만 원망은 길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본인이 택한 지옥인 것을.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D-day 날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D-Day를 하루 남긴 2월 17일.

정호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오래간만입니다. 그리고 가방 안까지 수색하는 절차를 진행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경호팀이 까다로워서요."

FBI(연방수사국) 국장 로메로 밀러가 검은 007 가방 하나를 손에 든 채 저번에 봤던 부하 직원과 함께 정호준을 찾았다.

"이해합니다. FSB의 관심까지 받고 계신 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충분히 무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밀러 국장, 그리고 밀러와 함께 온 한 명의 수행원은 당연하다는 듯 신체검사에 응했고 그런 절차를 개의치 않아 했다.

스윽!

밀러 국장은 이미 한번 검사를 마친 007가방을 열더니 정호준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입니다."

"선물요?"

정호준의 되물음에도 밀러 국장은 설명하기보단 눈으로 확인하라는 손짓을 했다. 내용물을 확인한 정호준은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음."

미국 시민권자임을 증명해 내는 증서와 여권, 그리고 시민증이 자리했다.

"미국 시민권자가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밀러 국장의 말에 정호준은 답례 인사를 뱉기보단 조용히 침묵했다.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 후 운을 뗐다.

"미국 시민권을 얻게 돼서 영광이지만,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말이라면?"

선물이라는 게 꼭 달갑기만 한 건 아니다. 지금 받은 깜짝 선물이 딱 그런 거였다.

"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긴.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선 영주권 취득 후 5년은 지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5년 동안 최소 30개월은 미국 내에 거주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영주권을 취득한 뒤로 채 1년도 거주하지 않았는데요."

고맙기보다는 괜히 나중에라도 구설수가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민권을 따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읊는 호준의 발언에 밀러는 미소를 지었다.

"이민국 국장은 물론이고 더 위에서도 이미 허락한 사안입니다. 정대표님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기는 했지만요."

"차분히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어차피 해결될 일인데."

자격조건을 충족하고 시민권을 신청해도 미국에서, 미국 이민국에서 그를 거절할 리 없다. 백만장자(Millionaire)도 아니고 억만장자(Billionaire)라 불릴 급의 자산을 지닌 이가 알아서 미국의 품에 날아드는 데 그걸 왜 거절하겠나? 얼씨구나 하며 끌어안지.

로메로 밀러 정보원으로 출신으로 FBI라는 거대 조직의 국장까지 오른 남자다. 정호준이 찝찝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본인의 위치와 능력에 맞지 않게 잔걱정이 많아. 아직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군.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원래 자기 객관화가 제일 힘든 거니까.'

미국에서 정말 극악 범죄로 분류하는 아동 강간, 아동 살해, 연쇄살인이 아니고서야 정호준이 보유한 금력이면 문제가 생겨도 무마가 가능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성실한 사람을 범죄를 저지르라고 등을 떠밀어 줄 필요는 없잖은가?

"정대표님, 편하게 생각하시죠. 미합중국은 정대표님의 능력을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국가들이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하기 전에 이렇게 시민권이라는 도장을 찍고 싶을 정도로요."

밀러 국장의 말에 정호준은 자신이 불편한 티를 너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신경 써 주신다고 이렇게 시민권까지 가져오셨는데,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저들은 미국을 위해, 그리고 정호준을 위해 나름 생각해 준다고 이런 선물을 가져온 걸 텐데 말이다.

"아뇨, 중간 진행 과정을 공유해 드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요."

그렇게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선물을 받게 된 정호준은 뒤숭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뭐 덕분에 떨림이 조금 가셨으니 그걸로 만족할까?'

*****

미국 금융가의 심장이라 봐도 무방할 월가가 자리한 그곳. 뉴욕 맨하튼(Manhattan)에 정호준은 방문했다.

정호준은 브리안 경호 팀장 포함 3명의 경호원을 대동해 로슬러 가문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빌딩. 로슬러 빌딩에 당도했다.

미리 이야기가 끝난 상태인 건지 아리아 로슬러와 함께여서인지 정호준의 뒤에 경호원이 셋이나 붙었음에도 그들의 발걸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로슬러 가문의 보안팀 직원들은 정호준들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별다른 제지 없이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해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고 그 감각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쪽이에요."

아리아는 웃으면서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정호준은 그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제 발로 도살장을 찾아가는 짐승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 발 한 발이 너무 무거웠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기에 무거운 발걸음으로도 금세 문 앞에 당도했다.

"준비됐어요?"

정호준이 평소 같지 않고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아리아는 웃으면서 정호준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를 마칠 시간을 주었다.

끄덕.

정호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을 두드리며 노크를 한 번 하고는 문을 열었다.

*****

어릴 때야 모든 아이가 귀엽고 예쁘니 논외로 빼 두고. 서양 사람들은 젊을 때 멋지고 예쁜데 그 세월이 오래 가지 않고 빨리 늙는다고. 빠르게 늙기는 하지만 노년으로 접어드는 세월쯤 됐을 때 추하지 않고 멋지게 늙어 간다고.

어떤 환경을 겪었는지에 따라 나이를 먹는 것도 다르게 먹기에 그 말은 결코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없고 동의하지도 않지만.

최소한 눈앞에 서 있는 두 남자는 정말 멋지게 늙은 꽃노인(?)들이었다.

외국인 특유의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비롯되는 외모에 인자함이 더해진 모습이랄까.

하지만 정호준은 절대 그 인자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꿀꺽!

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좀 더 나이 든 남자. 아리아의 자부 찰스 로슬러는 수십 년간 수면 밑에서 세상을 주물러 온 이였다.

떨리는 심장을 통제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준 정입니다. 한국계로 미국에 이민을 와 작게나마 사업체를 운영하며 굴리고 있습니다. 좋은 감정 갖고 아리아와 교제 중입니다."

정호준이 자신을 소개했지만 앞의 두 노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좀 더 나이 든 아리아의 조부로 추정되는 노인은 뭐 하는 물건인지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안경을 착용한 아리아의 부친은 딸 가진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아빠랑 결혼하겠다던 자신의 보물을 빼앗으러 온 도둑놈을 보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거 귀한 손님을 데려다 놓고 너무 세워 뒀구먼. 일단 여기 앉지."

아리아의 조부 찰스 로슬러는 앉으라며 의자에 손짓했다. 정호준이 자신이 손짓한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찰스 로슬러는 다시금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찰스 로슬러일세. 아리아의 할애비 되는 사람이지."

" 찰스 로슬러 주니어네. 아리아의 애비지."

시선에 담긴 감정의 크기는 다르지만 둘 다 정호준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고 다시 정적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들어 보니 히스트 가문의 여식도 자네에게 관심을 표했다던데, 왜 아리아를 선택했나?"

"사람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나요? 마음 가는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빈말로라도 '아리아가 더 예뻐서'와 같은 미사여구를 뱉을 법도 했지만 정호준은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

정호준이 어떤 사람인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파악해 두겠다는 듯 찰스 로슬러와 철스 로슬러 주니어는 질문을 이어 갔다.

"참 특이한 녀석일세. 우리를 어렵게 여기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하는구먼."

최소한의 시험은 통과했는지 방 안 분위기가 조금은 온화해졌다.

"그래, 아리아에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지. 이유를 말해 보게나."

분위기는 조금 따듯해졌지만 정호준의 승부수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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