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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로슬러 재단 이사장 자리를 놓고 수십 년째 쟁투를 이어 가고 있다고."
"아리아가 별걸 다 이야기했군. 그렇게 입이 가벼운 아이가 아닐 텐데 말이지."
찰스 로슬러는 가문의 비밀을 밖에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지 않았다며 추궁이 섞인 듯한 말을 중얼거렸다.
찰스 로슬러의 발언에 정호준은 황급히 아리아 대꾸했다.
"아리아와 깊은 관계로 발전하기 전에 들었던 사실들이 정말인지 확인하려고 제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정호준이 손녀를 감싸며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싫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추궁하는 듯한 기색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 아리아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럽게도 이 노인네가 밀리고 있소."
"포기할 생각은 없으신 거죠?"
"포기할 거였으면 30년 가까이 애쓰지 않았겠지.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해 볼 생각이네."
재단 이사장, 가문의 당주의 자리를 끝까지 유지하고픈 찰스 로슬러의 집념은 정말 강했다.
1회차 때의 이야기지만 서브 프라임 사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시점에도 이사장 자리를 향한 그의 집념은 이어졌었다. 정호준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찰스 로슬러는 2007년. 그의 나이가 93세일 때 자사전을 발간했다. 93세 노구임에도 일본까지 가서 발표회를 가졌다.
표면적으로는 자사전 발표회였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 금융가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러 간 것임을 수면 밑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아는 이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일본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가라앉는 배를 도와줄 정도로 일본의 인심이 넉넉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2008년 리만이 망하고 시티가 흔들렸다. 시티까지 망하게 둘 수 없어 연방정부가 돈을 풀어 시티는 살아나긴 했지만 시티가 살아났어도 찰스 로슬러의 쟁투는 그렇게 끝이 났었었다.
"로슬러가에서 이어지고 있는 조부님께서 메릴리치, AOG, 리만 브라더스, 시티(CITI)에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다고 지분을 가지고 계시고 영향력을 행사하신다고."
아무 말 없이 계속 해 보라는 듯한 시선에 정호준은 이 자리에 온 핵심을 이야기했다.
"만약 그렇다면, 조부님께서 끝까지 경쟁을 계속 이어 가고 싶으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언급한 회사들은 전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거든요."
"자세히 말해 보게. 세상 어느 바보 천치가 위험하다는 말만 듣고 움직이겠나? 제대로 된 근거를 이야기하게."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사무실 전부를.
* * *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원인이라는 게 존재한다. 원인 없이 벌어지는 사건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째서 그러한 사고가 터지게 된 건지 원인을 분석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셈이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주로 부정적으로 쓰였고, 정호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종종 사람이 다수 죽어 나가고 혹은 수조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사고가 터진 다음에야 이목이 집중되어 제도를 바꿨다.
하지만 이런 복기가 의미가 없는 행위는 또 아니었다. 어째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아야 다음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니까.
유명 드라마에서 말하지 않던가.
'외양간 안 고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소 못 키운다고.'
외양간을 고치기 위해 전문가들이 원인을 분석한 결과, 원인은 두 개로 함축되었다.
첫 번째 원인을 설명하려면 19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9년 미국 의회에서 금융개혁안이 통과된다. 통과된 금융개혁안은 주 내용은 '글래스 스티걸'이란 법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개혁안이었다.
70년대 중반쯤부터 미국 금융계는 이 '글래스 스티걸'이란 법을 폐지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법안 폐지를 위한 움직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날이 심화되었다.
미국의 라이벌이었던 소련 붕괴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해인 1992년부터 월가의 움직임은 더 본격화되었다. 결국 금융이 공산주의를 무너트린 거라며 금융을 좀 더 전문화(무기화)해 일본금융계가 가지고 있는 지분도 빼앗아 와야 한다며 힐링턴을 꼬셨다.
'이유 자체는 참 그럴싸하지.'
변명이 맛깔나는 건 만국공통인가 보다. 그리고 월가의 움직임은 힐링턴을 꼬시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개헌에 필요한 인원을 맞추기 위해 월가는 공화당, 민주당. 미국의 양당에 8,700만 달러를 기부했고, 1998년 금융개혁법을 지지하는 의원 후보에게 5,800만 달러를 사용했다. 상하원 선거에만 공식적으로 3억 달러 이상이 뿌려졌고, 비공식적으로 약 1억 5천만 달러 이상이 더 뿌려졌을 거라 추측한다.
금융개혁법 통과를 위해 한화 5천억이 넘는 돈을 뿌린 것. 그 당시 돈의 가치를 생각하면 20년대로 치면 법안 폐지를 위해 5조를 뿌린 거라 봐도 무방했다.
월가가 글래스 스티걸 법 폐지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 준 대목이었고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1999년. 윌리엄 제스퍼 힐링턴, 우리에게 빌 힐링턴이라 더 익숙한 대통령의 퇴임이 2년 남긴 해에 그들이 십수 년 동안 공을 들여 온 일이 성사가 되었다.
월가가 그렇게까지 폐지하길 원하는 글래스 스티걸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장르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금산분리법과도 조금 유사하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는 증권회사나 투자은행이 예금을 수취하는 것을 막았고, 연방준비제도 소속 상업은행들이 고객을 위해 비정부 주식의 취급, 자신들 스스로 비투자등급 주식에 투자, 비정부 주식의 인수나 유통, 그리고 위 업무와 관련된 회사들과의 제휴(혹은 직원공유)를 막았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돈을 맡기고 빌려주는 상업은행이 고객의 돈으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막는 법이다.
'은행이 자기 맘대로 투자하는 게 가능했던 시절 고객의 돈을 주식에 꼬라박지만 않았어도 대공황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터지진 않았을 거란 복기(復棋)에서 시작된 법안이지.'
전문가들이 복기를 통해 알아낸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중국의 급부상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미국은 완벽하게 패권국으로 부상했고 2006년까지 미국의 패권은 견고해지면 견고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미국이 역사상 가장 관대한 제국이라 불리곤 한다지만 세계 최고 강대국이 자국에 이익이 생기지도 않는데 타국의 이야기를 들어줄 리 없다.
그렇다면, 자국의 목소리가 미국 정부에 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수단이 바로 '로비'와 '미국 국채 매입'이었다.
본인들의 국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면 최소한 듣는 시늉이나마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사고와 논리였지만 어쩌겠는가. 세상 돌아가는 게 그런 것을.
게다가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 잡고 있어 무역을 위해서 반드시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국채 매입의 이유가 되었다.
국채 매입은 곧 외환보유고를 증진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 국채가 어느 정도 주를 이뤘다.
그런 이유로 개혁개방 후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중국은 매년 미국 국채를 끊임없이 사들였다. 중국의 지속적인 미국 국채 매입은 훗날 그린스펀의 수수께끼(Greenspan's Conundrum)라 불리는 현상을 발생시켰다.
보통 중앙은행에서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장금리는 기준금리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경제의 흐름이다. 하지만 중국의 지속적인 국채 매입으로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려 대도 시장금리(특히 장기채권)가 오르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
서브 프라임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크게 보면 이렇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를 시장에 대입하면 부동산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샀는데 대출금리는 오르지 않는데 경제 성장에 따라 부동산의 가치는 올라간다. 인플레이션을 막고자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려도 시장금리는 오르지 않고 자산가치(부동산)은 계속 오른다.
생각해 봐라. 이때가 기회 아니겠는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에 부동산 담보대출(모기지)을 받아 부동산을 사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대출받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금리가 올라야 하는데, 외부에서 돈이 자꾸만 들어와 금리는 계속 제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니 상업은행, 투자은행 구분할 것 없이 모든 은행이 부동산 대출을 시작했다.
서브 프라임 사태의 'Sub-Prime'은 신용이 낮다는 의미를 뜻한다. 수입이 없고 신용이 낮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빌려줘도 조금만 빌려줘야 하는 게 경제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다.
하지만.
'담보로 잡는 집값(자산가치)이 꾸준히 올라 주는데 신용이 낮으면 뭐 어때? 한 명이라도 더 대출해 줘서 돈을 버는 게 우리(은행)한테 이득이지.'
누구한테 빌려줘도 괜찮다는 생각은 모기지 업체들의 도덕적 해이를 발생시켰다. 죽은 사람이나 개이름으로 대출을 해 준다는 말은 과장 하나 없이 정말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한 거였다.
은행이 예금된 돈이 하나도 없게 될 정도로 부동산 대출이 급증했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여기서 또 배우게 됐지.'
돈이 없다. 그런데 돈은 계속 빌려주고 싶다. 왜? 자산가치가 계속 오르니까. 그래서 은행들은 옆에서 부러워하며 손가락만 빨고 있던 보험회사들을 끌어들였다. 신용이 'AAA', 'AA'에게만 돈을 빌려주겠다는 전주들의 돈을 타 먹기 위해.
AAA, AA, A BBB, BB, B를 모두 섞어 AAA등급을 받는 모기지 상품을 만들었고 여기에 보험사의 보증을 추가로 붙였다. 보험사까지 나서서 보증을 서 주자 지갑을 열지 않았던 전주 중 몇몇은 지갑을 열게 된다.
'보험사가 보증까지 섰는데, 설마 돈 못 받겠어.'
그렇게 그들만의 잔치가 계속 이어졌다. 찰스 로슬러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릴리치, AOG(보험사), 리만 브라더스, 시티(CITI)는 모두 이 모기지 채권에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진 후 찰스 로슬러가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찰스 로슬러는 수면 밑에서 세계 경제를 주물러 온 남자다. 정호준이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자식과 함께 정호준의 설명을 조용히 경청한 찰스 로슬러는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방법은 폭탄 돌리기밖에 없습니다. 메릴리치와 시티은행에서 담당하는 모기지 채권을 리만 브라더스 쪽으로 넘기시고, 리만 브라더스를 매각해야 합니다. AOG도 모기지 채권을 담당하는 부서를 나눠서 다른 곳에 넘겨야 하고요. 단 이 정리는 정말 조용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겠지. 이런 움직임 자체가 리스크를 상기시키는 행위가 될 테니까. 자네가 보기에 기한은 얼마나 남았나."
모두가 모기지에 거품이 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지금이 고점인 줄은 모른다. 거품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곳이 고점이었던 것을 모르는 게 사람이었다.
2006년은 모기지의 거품이 피크를 찍는 해였다.
"기한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모기지에 대한 위기의식이 적은 지금 넘겨야 합니다. 조금 손해를 본다 싶어도 최대한 빨리 넘기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티와 메릴리치, AOG를 살릴 수, 아니 조부님이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어려워하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생사까지 논하는 정호준을 보며 찰스 로슬러는 정호준이 걸물임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