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같은 공화당 출신이지만 태프트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시어도어만큼 강경하지 않았고, 자신이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노선을 바꿨다.
"태프트 대통령 시절부터는 다시금 운신의 자유가 생겼지만. 사람이 그렇잖아요? 때린 사람은 잊어버려도 맞은 사람은 자신이 당한 걸 평생 기억하는 법이죠."
미국 석유 업계를 독점하던 가문의 재산이 어느 정도였을지 모르겠다. 미국 재계에서도 손에 꼽힐 거대한 부를 이룩했을 거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2년 사이에 자산이 2배 이상 불어난 건 정말 엄청나게 자산을 증식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로슬러 가문이 시어도어에게 고마워할 리는 없지만.'
미국 재계에서 손에 꼽힐 거대한 자산이 하지만 돈을 벌었으니 그들이 기뻐할 거란 건 유치원에 이제 막 들어갈 꼬마들도 하지 않을 1차원적인 생각이다. 세상천지에 자신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다가 갈가리 찢은 인간을 좋아할 이가 어디있겠나?
찢긴 것은 손해를 감수해 가며 고이고이 키운 로슬러 가문만의 왕국이었다.
'가진 자들의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 해체된 덕분에 재산이 배 이상 증식됐다는 건 고려대상에 속하지도 못하겠지. 덕분이란 표현도 맞지 않겠네.'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어차피 로슬러 가문이 누릴 것들이라 생각하리라.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사실 그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게다가 잃은 건 돈만이 아니지.'
두 번째로 자존심도 상했으리라. 미국 석유 시장을 주무르던 남자가 정부에 의해 자신의 영지를 34갈래로 찢겼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손을 썼을 거란 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일 테니, 말년에 크디큰 실패를 경험한 셈이다.
실패를 경험하며 무너진 자존심의 가치가 얼마나 비싸고 원한이 거대했을지 정호준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처럼 당당하게 가문의 위세를 전면에 드러내기보단 뒤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웠죠."
로슬러 가문은 가문의 사업을 빼앗기는 극심한 고통을 맛봤다. 가업을 빼앗기는 고통을 맛본 그들이 전과 같은 행보를 이어 갈 리 없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야 세상에 쌔고 쌨지만. 그런 사람이 상류층까지 올라간 예는 없지.'
성공한 부모를 둔 망나니 자식들이 사고치고 다니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성공한 창업자, 1세대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사를 빼앗기고 회사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지켜본 로슬러 가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국 석유 업계를 주무르던 크리테리온 오일 때처럼 드러내는 대신 뒤에서 수면 밑에서 움직였다. 자선사업 등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수면 밑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재단을 설립하고 자산 추적이 어렵도록 자금을 쪼개고 또 쪼갰다. 기술과 금융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들의 은닉 방법은 나날이 발전해 교묘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로슬러가의 명의로 된 재단 수는 200개가 넘었고 로슬러 가문이 지분을 소유하거나 경영권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기업의 수는 수천 개에 달한단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규모가 커졌는데 세상이 몰랐던 거죠?"
"재단과 신탁회사들 모두를 미국에 한정하지 않고 글로벌 구도로 운영했으니까요. 자잘하게 나뉜 수백이 넘는 재단을 통해 세계적으로 움직이며 자금을 운영하고 유통해 자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로슬러에게는 힘 있는 친구가 많거든요."
미국 군수산업의 8~90%를 JB 로건 가문과 함께 소유하고 있었고 달러를 찍어 내는 연준의 지분을 쥐고 있는 JB 로건 체스트 은행까지 갖고 있었다. 게다가 다시는 이전처럼 회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국 60대 부호 가문 중 절반 이상과 겹사돈을 맺었단다.
'상상 이상인데.'
들어서는 안 될 수면 밑의 역사를 들은 것 같다.
덜! 덜! 덜!
상식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 수면 밑의 진실 때문에 정호준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다.
1회차의 그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리아 로슬러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파장이 얼마나 거대한지 어렴풋이나마 추측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고 지금은 아리아 로슬러와 깊은 관계를 맺어 수면 밑에서 벌이는 암투에 참가하는 당사자가 되었다.
그렇기에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담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히스트랑 만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꽉!
정호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마냥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는 듯 아리아 로슬러가 정호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도 이야기하는 김에 다 하겠다는 듯 아리아 로슬러는 이야기 꾸러미를 계속 풀어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양 서양 가릴 것 없이 장남이란 존재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형제들과 다른 특별함을 가졌다.
가진 게 적은 이들은 특별함을 대가를 얻게 되는 의무를 더 부담스럽게 여기곤 하지만 가진 게 많은 이들에게는 의무보단 권리가 더 많았다.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능력 있는 이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다수 존재하게 됐지만 미국 재벌가문에서도 장남을 우대하는 경향은 강했다.
서양은 동양만큼 장남 독식 경향이 강하지는 않아서 종종 형제끼리 CEO, 재단장 등의 자리에 번갈아 가며 앉아 회사를 휘두르는 경우도 종종 보였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최고 기업인 오성과 전자, 건설, 화학 등의 분야에서 경쟁을 이어 온 LS그룹의 모습과 비슷하다 보면 됐다.
'정확히는 형제들끼리 분가해서 합친 기업인 SL기업이 한국판으로 알맞은 사례지.'
형제들끼리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끼리 번갈아 가며 회장 자리에 앉는 대한민국에서 재산 가지고 잡음이 없는 유례 없는 케이스였다.
형제끼리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돈 앞에서 초연한 인간은 세상에 몇 없는 게 현실이었다.
로슬러 가문 또한 그런 인간의 욕심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장남을 우선시하는 한국의 재계처럼 장남에게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주로 장남에게 이사회와 함께 재단을 운영할 권한이 넘어갔다. 아라아의 조부인 찰스 로슬러는 형제 중 막내였고 찰튼 로슬러는 그들 형제 중 장남이었다. 본래라면 재단 경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을 거다.
하지만.
"큰할아버지인 찰튼 로슬러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죠. 찰튼 로슬러께서 사망하셨을 때 삼촌은 너무 어렸어요. 재단 운영권을 이어받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형제들은 이미 죽거나 재단 경영권을 이어받기 어려운 상태였고 장남의 장남인 찰튼 로슬러 주니어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아리아의 조부인 찰스 로슬러는 그 당시 여러모로 두각을 드러내며 유능함을 뽐내고 있던 중이었다.
로슬러 재단의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막내인 찰스 로슬러에게 재단이사장 자리를 넘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찰스 로슬러는 재단 이사회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재단을 안정적으로 잘 유지를 해 나갔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부상하게 되었다. 나이가 찬 찰튼 로슬러 주니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리아의 삼촌인 찰튼 로슬러 주니어 또한 로슬러 가문의 남자답게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찰스 로슬러를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했던 이사회는 1972년 6월에 개최된 운영권 회의에서 장손인 찰튼 로슬러 주니어의 손을 들어 주었다.
4대 당주로서 찰튼 로슬러 주니어의 손을 들어 준 것.
"할아버지께서는 물러나는 걸 원치 않으셨어요."
재단 이사회가 찰튼 로슬러 주니어의 손을 들어줬지만 재단은 이미 찰스 로슬러가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로슬러 가문의 가주(당주)답게 세계를 주무르는 실세이기도 했고 이제 막 52살이 된 한창 창창한 나이의 찰스 로슬러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힘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욕심이라 손가락질해도 할 말 없긴 한데, 어쨌든 제게는 가족이에요."
이사회의 결정에 불복한 뒤로는 쟁투가 시작되었다. 초기 상황은 찰스 로슬러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찰튼 로슬러 주니어의 영향력이 커졌다.
"후계자 싸움 때문에 정이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구석까지 밀렸거든요. 재작년에 JB로건체스트 은행 지분을 소유한 재단이 삼촌의 편으로 넘어갔어요. 골드만식스는 예전부터 삼촌의 편에 섰고요."
박빙인 싸움도 아니고 패배 일보직전이라니. 정호준은 당장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싶었다.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정신줄을 붙잡았다.
"일단, 말하기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솔직하게 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가라앉는 배에 올라탄 느낌이 강했지만 속일 수도 있는데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정호준은 고마웠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일단, 조부의 영향력 아래에 남아 있는 회사들 좀 이야기해 줄래요?"
"자잘한 것을 뺀 큰 것들을 뽑으면 메릴리치, AOG, 리만 브라더스, 시티(CITI)가 남았네요."
아리아 로슬러의 말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풀썩 침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저항하다가 서브 프라임 사태로 완전히 게임이 끝나는 방향으로 이어졌겠네.'
조금 전까지도 벌벌 떨었지만 정호준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정호준의 표정 변화를 코앞에서 지켜본 아리아의 표정 또한 더더욱 조심스러워졌지만 그를 눈치챌 여력이 정호준에게는 없었다.
'어떡하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인데?
찰스 로슬러 주니어의 차녀인 카닐라 로슬러가 훗날 재단 운영에 관여하는 것을 고려하면 경영권을 손에 쥔 찰튼 로슬러 주니어가 피의 보복을 감행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말이다.
'1회차 때 보복이 없었다고 지금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그도 그럴 게 정호준이 보유한 자산은 십수 조에 이른다. 로슬러 재단이 가지고 있을 그 부를 생각하면 그리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십수 조가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고 정호준의 부는 크기를 계속 확장할 거다.
'거슬린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당사자의 생각을 정호준이 어찌 읽을 수 있겠나.
"아리아, 조부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죠?"
"예? 예. 그러셨어요. 그치만 너무 부담 가질 필……."
정호준의 말에 아리아는 깜짝 놀라며 되묻다가 긍정했고 최대한 부담이 덜 가도록 말을 이어 가려 했지만 아리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최대한. 최대한 빨리 조부님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아요. 가능한 빨리 약속을 잡아 줘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정호준의 발언에 아리아 로슬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