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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자넷들의 배웅을 마친 정호준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해 펀드로 모집한 1조 8,739억 중 739억 원을 SSL Capital 일본 법인 계좌에 입금했다.
뒷자리 우수리를 뺀 1조 8천억, 달러로 환산하면 16억 9,642만 달러 그리고 SSL Capital 계좌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영화 투자금 91,314,338달러를 합쳐 1,787,742,909달러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법인인 셀리번 캐피탈로 옮겼다.
그리고 폴류스사에서 12월에 지급하기로 약속한 100억 달러도 셀리번 캐피탈 계좌로 입금된 걸 확인했다.
'다행히 기한을 넘기진 않았네.'
약속 시간보다 최소 수 시간 늦게 나타나는 러시아 대통령의 행보를 생각하면 기한에 딱 맞힌 폴류스사의 행보는 예상외였다,
'그러고 보니 웃기네.'
의외라는 감정 다음에는 의외라는 감정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조소가 일었다.
계약서에 명시한 금액을 명시한 날짜에 입금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다.
그 당연한 것조차 걱정하고 놀라야 하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조소였다.
*****
12월 3일 토요일. 정호준은 박남정과 함께 강원도로 향했다.
군생활이 힘들기로 악명 높은 3사단. 백골부대라고도 불리는 그 사단에 소속되어 군생활 중인 박기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얘는 전방이랑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1회차 때는 25사단에 배치받아 최전방인 GOP에 올라갔다 오더니, 이번 생에는 강원도 3사단에 배치되었다.
'3사단도 GOP 경계 근무가 포함된 사단으로 기억하는데, 얘는 전방이랑 인연이 깊네.'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어. 이번에도 안 보면, 전역하고 나서야 보게 될 테니까."
2008년이 지나기 전까지 정호준이 다시 한국에 들어올 일은 아마 없을 거다. 그럼 박기태가 전역한 뒤에야 겨우 보게 되리라. 타이밍이 안 맞으면 박기태가 전역한 뒤에도 복학 준비하느라 바빠 못 볼 수도 있었다.
1회차 때 정호준이 죽기 전까지도 계속 이어졌던 인연이라 2~3년 안 봐도 끊어질 인연은 아니었지만 만날 수 있을 때 만날 필요가 있었다.
'군 생활이 힘들기로 유명한 3사단이니, 전생보다 더 고생하겠지?'
군 생활에 찾아와 주는 친구가 정말 좋은 친구 아니겠는가?
게다가.
'12월 7일까지 딱히 할 일도 없고.'
가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박기태를 만나는 게 훨씬 유익했다.
다만 박기태를 부대에서 꺼내기 위해 박남정을 따라가지 않고 춘천 쪽에 미리 빌려 놓은 고급 리조트로 이동했다.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정호준 본인과 친분이 있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수지역이 조금 신경쓰이긴 한데'
뭐 위수지역이야 다들 알게 모르게 넘어가는 거다. 박기태의 옷도 미리 챙겨 박남정의 차 안에 놓아두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으리라.
부대원과 같이 나오는 외박도 아닌 가족 동반 외박의 경우 군부대에서 장소 확인을 꼼꼼히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
박남정과 박기태가 마지막 선을 지키며 친구처럼 지내고 정호준이랑도 자주 봐 어려움이 조금 덜하지만 친구끼리만 있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기태의 부대로 가 박기태를 픽업해 리조트에 내려준 뒤 떠났다. 정호준이 함께 있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정호준은 빡빡머리에 가슴에 작대기 두 개를 단 박기태를 보며 웃었다.
"잘 지냈지? 괴롭히는 사람 없지?"
"군대인데 괴롭히는 사람이 왜 없겠어? 그래도 다행히 또라이가 많지는 않아. 내 직속으로는 한 명뿐이고. 그리고 그 또라이가 왕고라서 이제 조금 있으면 집에 가."
"그건 정말 다행인 소식이네."
햄버거, 피자, 치킨, 보쌈, 잡채, 전, 갈비찜까지. 미리 준비해두었던 음식들을 먹으며 박기태의 하소연은 쭉 이어졌다.
본래 어느 군 생활이든 남의 군 생활은 짧고 쉬워 보이고 자기 군 생활이 힘들다. 하지만 박기태의 군 생활은 그냥 듣고만 있어도 힘들어 보였다.
'재수 더럽게 없네. 얘는 무슨 걸려도 포병 같은 거에 걸렸냐.'
포병도 보면 정말 큰 포들은 포신이 무거워 차에 탑승시켜 이동시키는데. 박기태는 포를 짊어지는 병과에 걸렸다.
강원도에 위치한 3사단에 배치된 걸로도 모자라 포병대대에 배치받았다는 소식에 정호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본인이 일으킨 나비효과 때문에 더 힘든 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절친의 인생에 죄책감이 조금 솟아났지만 꾹 눌렀다.
그리고 '지 팔자지.'라는 생각으로 합리화를 했다.
1학년 끝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라고 본인이 시킨 건 아니지 않던가?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맛난 밥 먹느라 바빠서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여기 너무 시설이 좋은 거 아냐?"
"비싼 값하는 거지 뭐."
"얼만데?"
"알면 불편해질걸?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거 아니다."
"얼마냐니까?!"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듯 힘을 주며 되묻는 박기태에 물음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박에 600. 경호를 위해 붙어 있는 곳은 다 빌려서 아마 2천은 썼을걸."
"2천? 2천만 원?!"
정호준과 만나기 전에도 외출 외박을 경험해 본 바 있는 그 당시 박기태는 10만 원을 쓰는 것 가지고도 벌벌 떨었었다.
부친에게 돈을 보내달라 하면 되지만 뭔가 나이 먹고 돈 달라고 손을 벌리기 그랬으니까.
단위 자체가 다른 탓에 박기태는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는데, 사는 세상 자체가 다르다는 걸 이것 하나로 체감한 까닭이다.
"네가 어려워할까 봐 돈 얘기 하기 싫었는데. 일단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할게. 이거 선물이야."
가방에서 회색 봉투를 꺼내 박기태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뭔데?"
"열어보면 알잖아."
회색 봉투를 열고 확인한 A4용지에는 '지분양도 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유니버셜 힛치Universal Hitch)? 이걸 왜 날 줘?"
이런저런 어려운 말이 담겨 있어 곧장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2%의 지분이 자신의 앞으로 양도되었음을 확인했다.
"네 돈까지 사용해서 꽤 크게 벌었거든. 무사히 군 생활 마치고 오라는 뜻에서 주는 선물이야."
"부담되게 왜 그래?"
"창업할 때 이미 나눈 거라 되돌리지도 못해. 세금도 다 냈고. 같이 동업하고 있는 스티븐 위즈니악이라는 사람이 욕심 없이 직원들한테 지분을 나눠주더라고. 나도 네 생각이 나서 나눴어."
돌이킬 수 없다는 정호준의 말에도 박기태는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복사본 만들어 오길 잘했네.'
지분 가치나 법인 출자금이 적힌 양도계약서의 원본을 봤으면 박기태의 표정은 한층 더 심각해졌으리라.
박기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무렵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정호준의 전화기가 울렸다.
우우우웅!!
화면에 김은주라는 이름이 뜨면서 말이다.
"김은주? 여자 이름인데 여자친구야?"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여자 이름이잖아. 그럼 여자친구 아냐?"
"아냐!"
우우웅!!
박기태에게 대꾸하느라 전화가 끊겼지만 이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끊어지게 놔두고 싶었지만 빨리 받아보라는 박기태의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주황글씨'라는 영화를 찍으며 수위가 있는 노출씬을 찍었지만 노력한 것만큼 성과를 보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잔뜩 받아버렸던 김은주는 이은혜 작가의 '프라하식 연애.'로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정호준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드라마 촬영 정확히는 드라마 방영이 끝났음에도 전화 한 통 없자 감정을 드러내며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하필 전화가 걸린 시점이 바로 정호준이 박기태를 만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 한국 들어왔으면서, 왜 연락 안 해?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를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도 정호준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 드라마 촬영 중이라 바쁠줄 알았죠. 그리고 꼭 내가 먼저 할 이유는 또 뭐예요? 누나가 먼저 해도 되는 거지.
정호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누나라는 소리가 나오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기태가 중얼거렸다.
"누나?"
- 친구랑 있는 거야?
정호준이 혼자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인지한 김은주의 목소리가 조금은 날이 풀리며 부드러워졌다. 평소의 목소리랑 전화 받을 때의 목소리 톤이 달라지는 여자들 특유의 가식이었다.
- 친구 면회 왔거든요. 지금 리조트에서 한잔하고 있어요.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김은주는 정호준이 전화를 끊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리조트 어디?
*****
기술의 발전할수록 인간의 삶의 질은 높아진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질은 일상생활이나 이동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농사, 군사, 금융 등 일생을 넘어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질을 높여주었다.
그런데 사실 기술 발전이란 게 꼭 장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기술 발전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강과 바다가 오염되었듯 새로운 기술에는 단점 또한 존재했다. 그저 앞으로도 기술 발전은 계속될 거고 현재에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아 기술을 도입했을 뿐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도입된 것들에 단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금융업계, 증권업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통신기술을 발달한 21세기는 집에서 사고팔 수 있는 홈트레이딩까지 도입되며 20세기보다 훨씬 편리하게 주식을 사고파는 게 가능했지만, 편리함에 맞먹는 리스크 또한 생겨났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리스크가 금융권에서 구체화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팻 핑거 사태였다.
팻 핑거. 손가락에 살이 쪄 키보드를 잘못 눌렀다는 유희화한 용어로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거나 덜 눌렀는데도 다 눌렀다고 생각해 주식을 거래해 큰 손실을 일으키는 사태였다.
매수가와 매매 주식수의 입력을 착각하는 입력상의 실수가 벌어질 때도 있었고 말이다.
리스크를 인지해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 놓기는 하지만.
'세상이 FM대로만 돌아갈 리가 없지.'
가장 규범대로만 해야 할 최전방 군부대에서도 종종 가라라 불리는 대충이 판치는데.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처음에야 자신에게 맡겨진 돈의 크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손해보면 어쩌지?' '잘못 건드리면 어쩌지?'와 같은 생각을 품으며 거듭 확인을 이어가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언젠가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무뎌진다. 맡겨진 돈의 규모가 커지더라도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로 무뎌지고 무뎌지다 보면 상황이 물리고 몰렸을 때 사고로 돌아오곤 한다.
팻핑거 사태는 1회차 때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발생했었다.
정호준이 자넷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는 건 일본에서 발생할 펫핑거 사태에 끼여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2005년 12월 8일에 발생할 제트컴 사태.
정호준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일본 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