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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 회복에 관한 제안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노민현은 정호준에게 한국 기업에 투자해줄 것을 권했다. 정호준이 추후 수호이 로그 금광에서 벌어들일 수익의 10%만 한국 기업에 투자해도 상당수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으니까.
노민현이 풀어 놓은 제안 중에는 정부의 관리하에 놓여 있는 하이스트 반도체나 중우해양조선과 같은 큼지막한 기업들을 인수해달라는 제안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한국 기업에 투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은 투자처를 다 정해 놓은 터라 투자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식사 시간, 그리고 티타임까지. 몇 번이나 정호준에게 호소했지만 정호준은 노민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미쳤다고 지금 투자할까?'
이미 이곳저곳에 투자해 돈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서도 충분한 돈이 수중에 있다 해도 정호준은 지금 한국 기업에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미국이 벌인, 정확히는 월가가 벌인 그들만의 잔치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좀 더 큰 판을 놔두고 한국 기업에 투자할 리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서브 프라임 사태가 벌어진 이후로 한국 조선업계, 아니 세계 조선업계가 얼마나 오랜 시간 침체의 늪에 빠지는지, 하이스트 반도체가 앞으로 얼마나 적자를 이어가는지 다 미래에서 보고 온 정호준이 중우해양조선과 하이스트에 투자할 리 없었다.
'하이스트를 내 소유로 만들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분명 하이스트라는 기업이 훗날에는 미친 듯이 사세를 키울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금 투자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정호준이라는 남자에게 애국심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별 소득 없이 만남은 끝났다.
*****
정호준이 자신의 만남 요청을 거절했다는 말을 비서로부터 전해 들은 김명호 서울시장은 분노를 표출했다.
"청와대의 초대는 받았으면서 내 초대는 거절해?"
천만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책임지는 자신을 무시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2조를 가진 게 전부인 녀석이 서울시장인 나를 무시하는 건가?"
수호이 로그 금광을 발견한 채광회사의 진짜 주인이 정호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김명호는 정호준은 자신보다 아래로 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2005년 서울의 예산은 13조 258억 7,400만 원. 본인의 자산은 아니지만 정호준의 개인자산으로 알려진 2조원보다 더 많은 돈을 자신의 뜻대로 집행해 왔기 때문이다.
김명호는 개인 자산이 2조나 되는 정호준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과대평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호준이 다른 대기업 회장들처럼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국내의 이름 있는 대기업들은 모두 사내보유금으로 수조를 쌓아두고 있었다.
주식회사로 운영되는 만큼 사내보유금은 주주들의 것이지 오너 가문의 것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회사를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한국 재벌가들은 그들의 뜻대로 사내보유금이 사용하곤 했다.
그런 대기업의 회장들은 최소한 자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주식으로 2조를 가진 게 전부인 정호준이 자신을 무시한다. 이게 달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하지만.
"불렀는데 안 오면 내가 가야지."
김명호 서울시장은 정호준을 방문해 본인에게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직접 알려주고자 했다. 그리고 훈계가 끝난 뒤에는 자산을 맡기고 말이다.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자존심보다 더 컸다.
정호준이 노민현 대통령과 만남을 가진 다음 날 김명호 서울시장이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 일단 들여보내도록 하세요.
직접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면 지금 돌려보내도 또 올 거란 생각에 정호준은 약속 없이 찾아온 김명호 서울시장을 만났다.
*****
1988년에 이르러서는 미래건설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회장직까지 오른 셀러리맨들의 우상이 되었던 김명호는 회장직을 관두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가 회장직을 관둔 이유는 뚜렷하게 밝혀진 건 없지만 최주영 회장의 뜻대로만 굴러가는 미래건설의 현실을 체감하고 절망에 빠진 김명호는 정치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
재벌가들이 다 해 먹고 있는 현실의 벽을 깨부술 수 없음을 느꼈을 테니까.
'게다가 최주영 회장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어 김명호의 인지도를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당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지.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일치한 셈이지.'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르면 돈은 따라오는 건 당연했고 그가 정치에 입문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1989년 방영된 야망의 눈동자의 모티브가 그에게서 따온 거라 세간의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죽기 직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란스티와 비슷하네.'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젤란스티 대통령과 김명호 서울시장은 닮은꼴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젤란스티 대통령이 드라마에 보인 능력 있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됐다면 김명호 대통령은 자신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를 통해 본인이 얼마나 유능한지를 어필해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셈이니까.
상황의 차가 있을지언정 둘 다 미디어의 덕을 톡톡히 봤다.
또 한 명의 대통령을 눈앞에 둔 정호준은 태연한 모습으로 물었다.
"약속도 없이 방문하셨네요? 이게 얼마나 큰 무례인지 기업가에게 있어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실 정도로 형편없는 분은 아니시지 않나요?"
'아직 정보가 그렇게 널리 퍼진 건 아닌가 보네. 하긴…… 아직은 이제 겨우 대선주자 중 하나로 떠오르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면 국정원에게 수호이 로그 금광에 대한 언질을 받지 못한 것 같다 판단하며 정호준은 날을 세웠다.
날 선 반응에 적의까지 드러내는 정호준을 보며 자신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한 김명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례는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왜죠?"
"한국에서 나온 걸출한 투자자니까요. 한국에 더 큰 국익을 가져다줄 인물인데, 서울시장으로서 당연히 만나봐야죠. 서울시 예산 중 일부를 정대표가 좀 맡아줬으면 합니다. 정대표가 조금만 도와주면 서울시민들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정호준이 자신의 재산을 불려주길 원해 찾아왔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자신을 어려워할 때나 가능한 거였다. 어째서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말 한국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건가?'
대기업 회장들이 김명호를 야당의 차기 대권주자 중 한 명으로 인정해 어려워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한국에 기반을 가진, 한국에서 쭉 살아갈 이들이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정대표, 1천만 서울시민을 생각해주세요."
김명호는 정호준의 앞에서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강조했지만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통령님으로부터 한국에 투자해달라는 제안과 국민연금의 일부를 맡아 운용해달라는 제안까지 거절하고 온 저입니다. 5천만 국민의 돈도 운용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겨우 1천만 서울시민의 돈을 불려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한국 기업에 투자해달라는 제안까지는 예측했지만 국민연금의 일부를 운용할 권한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김명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김명호를 보며 정호준은 이야기를 이거갔다.
"그리고 이미 국민의 돈을 불려주기 위해 펀드까지 만들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홍보도 했고요. 저는 그거면 충분히 한국 사람들을 위해 힘써줬다고 생각합니다. 하실 말씀이 그게 전부시라면, 이만 나가주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쉴 시간이라서요."
정호준과의 만남은 그렇게 본인의 진짜 목적은 밝히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훗날에도 나를 이렇게 가벼이 대하는지 두고 보겠다.'
그들의 만남은 김명호에게 있어 봉황 의자에 대한 욕심을 더 부추긴 날이었고 정호준에게는 GDP 규모 세계 15위 안에 들 나라의 대통령이 될 남자에게 악감정을 사게 된 날이었다.
서울시장 비서실에도 청와대에도 한국 재벌들의 눈과 귀가 있었기에 정호준이 김명호, 노민현과 만난 사실은 회장들의 귀에 그대로 들어갔다.
*****
유가 선물로 벌어들인 6,598,503,740달러의 15%에 달하는 돈, 989,775,561달러를 세금으로 내야 했다.
미래를 위해 지출을 이어가다 보니 셀리번 캐피탈의 계좌에는 838,728,179달러만이 남게 되었다.
'아, SSL Capital에 입금된 영화수익 91,314,338달러를 계산에서 빼먹었네.'
SSL Capital 계좌에 입금된 돈 91,314,338달러까지 합하면 약 9억 3천만 달러 정도였다.
'나도 정말 미쳤지.'
자신이 73억 달러 중 63억 7,977만 달러를 사용했다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못 믿으면 어쩌겠는가? 계좌의 잔고는 거짓말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언론을 불러 이미지를 개선하고 펀드를 조직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펀드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모인 액수가 정호준이 예상(기대)한 것보다 훨씬 못 미쳤다.
5조쯤은 기대하고 설립한 펀드였지만 현재까지 모인 금액은 1조 6천억이 조금 넘는 수준에 그쳤다.
맥시멈 3천만 원임을 고려하면 대략 5만 3천 명이 돈을 투자한 것. 못 해도 10만 명 이상은 펀드에 돈을 투자할 거라 기대했던 정호준으로서는 가슴 아픈 오산이었다.
누구도 쉽사리 따라오지 못할 만큼 거대한 수익률을 포트폴리오로 가진 정호준이었지만 은행보다 훨씬 높은 이자율을 약속했지만 펀드가 어느 곳에 투자했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원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정호준의 조건은 대중들에게 상상 이상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매일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정호준의 펀드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주식 열풍이 불던 팬데믹 사태 때도 잘 알지도 못하는 주식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2005년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보네.'
3천만 원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큰돈도 아니다. 정호준은 본인의 수익률이면 대중이 의심 없이 돈을 맡겨줄 거라 생각했던 1개월 전의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이제 와 맥시멈 기준을 높여 봐야 오히려 의심만 살 뿐이었기에 욕심을 버렸다.
정호준이 언론을 통해 고지한 기한 모집이 마감되었을 때까지 모인 액수는 1조 8,739억. 예상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이었다.
- 조나단. 자넷과 함께 미국으로 먼저 들어가시죠. 귀국하면 저번 유가 선물 때처럼 준비해주십시오.
아직 일본에 볼일이 남은 정호준은 자신을 제외한 법무팀과 조나단 등을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경호팀은 정호준과 함께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