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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이 칼같이 두 사람을 잘라내는 것을 보며 경호를 맡은 팀장이 황급히 다가와 초대장을 지참하지 않은 이들을 들여보내지 말라던 원칙을 어긴 것에 대해 사죄를 청했다.
- 죄송합니다 오너.
동양과 달리 고개를 숙이는 문화는 따로 없어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다가와 사죄를 청하는 팀장의 행동에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괜찮습니다. 팀장님이나 경호팀이 딱 잘라 쫓아낼 수 없음을 이해하니까요. 다만 상황을 정리할 필요는 있을 것 같으니, 마이크를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정호준은 파티를 개최할 때 잡았던 마이크를 다시금 가져다주길 요청했다.
정호준의 요청에 팀장은 무선 호출기에 대고 마이크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팀장의 지시가 떨어진 지 채 1분도 되기 전에 정호준 앞에 마이크가 당도했다.
"파티를 즐기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잠깐만 집중해주십시오."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터라 시끌벅적했던 파티장에 정적이 들어섰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잠깐 일러두고 싶은 게 있어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정호준은, 조금 전 벌어졌던 해리스 헬튼과 티마라 에클리스톤을 쫓아낸 것이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소송의 나라 미국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께서 다 아실 거라 믿습니다. 만약 조금 전에 벌어졌던 일이 시카고 한인사회나 한국에 퍼지면, 뒷일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헬튼 호텔이나 바니 에클리스톤 회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나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바니 에클리스톤 회장의 회사가 헬튼 호텔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아서 포뮬러 원이란 사업체를 모르는 사람은 꽤 많다. 레이싱이나 자동차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정말 생소한 이름일 거다.
하지만 바니 에클리스톤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
'이래저래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 행동을 많이 하고 다니는 인물이니까.'
유명 인사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딸 티마라 에클리스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는 게 바로 바니 에클리스톤이라는 남자였다. 자수성가한 영국 부호로 가진 인맥이 폭넓고 그의 소유인 포뮬러 원(F1)과 개인 자산 또한 조 단위에 이른 터라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않을 뿐.
바니 에클리스톤이 앙심을 품고 보복을 시작하면 버틸 힘을 지닌 이는 이 자리에 몇 없으리라.
'정치인은 이래저래 복잡한 것을 다 대봐야 하니까 패스하면, 정윤정 말고는 없겠네.'
한국에서 대기업이라 불리는 KS의 자제 정윤정을 제하면 그가 앙심을 품었을 때 버틸 만한 힘을 지닌 이는 없는 것 같았다. 헬튼 호텔까지 함께 움직이면 정권의 도움이 없다는 가정하에 KS 그룹도 휘청거릴 정도는 될 거다.
'해리스 헬튼은 지분도 얼마 상속받지 못한 방계급이지만. 그녀로 인해 생긴 구설수가 헬튼 호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둘이 함께 움직였으면, 수호이 로그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호준도 운신이 자유롭지는 못했을 거다.
어쨌건 저들에게 경고를 전하기엔 정호준이 직접 위협을 가하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
해리스 헬튼, 티마라 에클리스톤과 달리 쫓겨나지 않은 라디아 히스트와 아리아 록펠러 중 라디아 히스트가 다시 한번 사과를 입에 올렸다.
-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거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 사과받겠습니다. 한번 사과하셨으면 됐어요.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주셨잖아요?
쫓아낸 두 여자가 정호준을 잠깐 곤란하게 만들 정도에서 그칠 수준이라면 눈앞의 두 여성의 배경은 곤란 정도가 아니라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정호준은 그녀의 사과를 받았다.
- 이쪽은 윤정 정이예요. KS라는 한국 대기업의 상속녀죠.
사과를 시작으로 정호준은 옆에 머무르고 있던 정윤정을 소개했고 그 뒤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화의 주제는 학교에까지 이어졌다.
- 시카고 대학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시카고 대학에 입학한 이유가 있나요? 인맥을 만들기엔 아이비리그가 더 나았을 텐데요?
하버드, 프린스턴, 컬럼비아, 예일, 펜실베이니아, 다트머스, 브라운, 코넬. 미국 동부에 자리를 잡은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8개의 대학 중 한 곳에 재학했다면 남은 7개 학교의 재학생들과도 이런저런 친분을 쌓을 수 있었을 거다.
한국에서 연고전으로 고려대와 연대 학생들이 친분을 쌓는 것처럼 말이다. 축제 외에는 별다른 문화가 없는 한국과 달리 파티 문화가 발달했기에 친분을 나누기는 더 수월했을 거다.
- 글쎄요. 재학생들과의 친분이 제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아리아 록펠러의 질문에 답을 했을 뿐인데 아리아 록펠러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호준의 정곡을 찔렀다.
-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이 시카고 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는 거네요.
'추론해나가는 과정이 제법이네.'
어려서부터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한 수재답게 아리아 록펠러는 정호준이 그저 한마디 대꾸를 했을 뿐인데 정호준의 사정을 꿰뚫었다.
라디아 히스트는 모델로 활동한다면서 의외로 성격 자체는 내성적인 성향이 강했다. 반면 아리아 록펠러는 라디아 히스트처럼 차분한 분위기를 띠긴 했지만 뭔가 지적인 면모와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호준에 대한 이야기가 이야기의 주를 이뤘기에 끼어들지 못한 정윤정은 한 발짝 물러나서 대화를 들으며 흘러가는 상황을 판단했다.
'아무래도 쟤들이 정호준에게 관심을 가진 모양인데?'
여자로서의 감 또한 저들이 정호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경종을 울렸다.
필요하지도 않고 갖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들지 않던 물건도 주변에서 자꾸만 찾아대면 욕심이 생긴다. 참 비합리적이지만 그게 바로 인간의 심리였다. 부친이 만나보라고 친분을 쌓아두라고 귀에 불이 나도록 이야기해서 어쩔 수 없이 파티에 참석해 친분을 쌓으려 했던 정윤정이다.
'욕심나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아니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닌 상속녀들이 정호준에게 관심을 표하며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윤정의 마음에도 소유욕이 생겼다.
*****
파티가 끝날 때까지 세 명에게 붙잡혀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종국에는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열린 파티는 10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했는데 개중에 표정이 좋지 못한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하아~, 어떡하지? 나는 실수 안 했는데, 괜히 내가 덤탱이 쓰는 거 아닐까?'
오늘 파티에 참석한 한인 중 언론사 사주의 자녀는 없었지만 언론사의 임원이나 국장, 부국장 직급을 지닌 부친을 둔 자녀들은 존재했다.
"형님 정말 어떡하죠?"
"일단 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전해야만 자신들의 부친이 책임을 지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언론에서 일하는 부친을 둔 이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뭘 어떡해?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정호준이 이야기한 대로 전해야지. 단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야 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고 잘못한 게 전무한데도 피해를 볼 수 있게 된 현재 상황에 자리에 모인 이 중 한 명이 울분을 토했다.
"아니 미국에서 쭉 살겠다는 놈이 무슨 한국 뉴스를 모니터링했데요?"
"나라고 알겠냐?"
부친이 오늘경제 신문사의 국장으로 있는 김준호는 울분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조금 전 파티를 파하면서 언론사와 연관된 자제들만 불러 모아 정호준이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쟤 동의도 없이 제 정보를 마음대로 가져다 쓰셨더군요. 여러분의 부친께서 다니는 신문사가 인터넷에 업로드한 기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크랩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소송의 나라인 건 알고 계시죠? 소송에서 지면 아마 천문학적인 금액을 보상해야 할 겁니다."
정호준의 입으로 고소하겠다는 말을 직접 내뱉지는 않았지만.
소송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개인정보 보호 및 사생활 침해, 명예 훼손으로 엮어서 고소하겠다는 정호준의 의도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증거 수집을 완료한 정호준이 유명 로펌을 활용해 소송을 진행한다면 남는 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할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기적적으로 소송에 승리한다 해도 그 과정은 진흙탕이리라.
"어...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을 뿐입니다."
정호준의 기사를 싸지른 건 한 회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김준호는 기자들이 주로 내뱉는 핑계를 입에 담으면서도 부친의 회사를 언급하는 대신 아예 언론의 영역으로 묶었다.
주식에 재산이 묶여 있긴 하지만 부동산이나 채권에 비해 주식은 현금화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자산이었다. 1조가 넘는 돈을 언제든 활용하며 로펌을 활용할 수 있는 정호준에게 한국에서는 알아준다지만 부친의 신문사 하나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덜덜 떨면서도 김준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호를 했다.
"내가 무슨 공인입니까?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해요? 일개 개인의 정보를 그렇게 쑤셔서 세상에 노출했으면, 그걸로 돈을 벌었으면 이제 대가를 치를 때입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두려움에 이성을 잃을 것 같으면서도 살고자 이 짧은 순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린 김준호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회.. 회장님께서 바라시는 게 뭡니까?"
'호오?'
다른 이들을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반해 겁에 질린 상태임이 눈에 보임에도 덜덜 떨면서 머리를 굴리고 자기 할 말 다하는 속으로 김준호의 현명함에 작게나마 감탄을 하면서도 확인차 물었다.
"바라는 거라뇨?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살겠다고 말한 제가, 언론에 바라는 게 있을 것 같나요?"
"저야 회장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말 한국의 언론사들을 고소하실 생각이셨다면."
말하면서 조금씩 확신을 가졌는지 힘을 주며 말을 끊은 김준호는 처음으로 정호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저희를 불러 모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으셨을 거란 것쯤은 압니다."
하하하하!
두려움에 떨면서도 정답을 맞힌 김준호를 보며 정호준이 웃었다.
"학력 좀 읊어볼래요?"
"서울대 경영학부 졸업 후 시카고에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선배님이셨네요."
"아닙니다 회장님."
조금은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을 느낀 김준호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보다 어린 정호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우리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오늘부로 한국 국민들이 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언론사들이 방향을 잡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조건을 받아주면 소송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요?"
김준호의 반문에 정호준은 약간은 호의적인 감정을 드러냈던 표정을 다시 굳히면서 말했다.
"뭐, 정말 신념에 차서 그러시겠다면야, 나를 팔아 돈을 번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