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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여 놓은 일 중에 당장 손길이 필요한 일은 없고 한국에서는 중간고사라 불리는 Midterm exam도 마무리된 상태였기에 파티가 또다시 뒤로 밀리는 일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집에서 열리는 홈파티였으면 파티 호스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구석에서 지지고 볶는 게 미국에서 주로 열리는 홈파티였다.
집을 빌리려다가 자꾸만 뒤로 밀린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성의를 표시해 집이 아닌 호텔을 빌리도록 트리오플에 따로 일렀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이 개최하는 파티는 시카고의 5성급 호텔 일부를 빌려서 개최되었다. 다만 호텔을 빌린 것에는 사죄의 의미도 있지만 경고, 경계의 의미도 있었다.
크게 중하치도 않은 만남에 호텔을 대관할 정도로 심상치 않은 재력을 가졌으니 말조심, 행동거지를 조심하란 뜻이 담겼다. 일종의 돈지랄이었다.
물론 그걸 그대로 다 파악하는 이가 있을지는 또 다른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파티장에 입장하기에 앞서 경호원들에게 제지되어 복장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본인 스스로가 거물급에 올랐다고 생각했기에 정호준은 트리오플의 요청을 수락했고 파티장에 들어서기 전에 경호원들에게 초대장과 함께 복장 검문을 받아야 했다.
복장 검사를 받고 입장하는 이들과 잠깐의 대화를 나눴다.
'뭐 이렇게 레파토리가 똑같냐.'
파티장에 들어온 이 중 누구 하나 소개할 때 부친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 무슨 기업한다부터 시작해서 정치인의 아들, 고위 행정관료의 자녀 등 다양했다.
정치인의 자녀 중 가장 파워가 쎄겠다고 추윽한 이는 보수계열 정당 출신으로 이번에 4선에 성공한 이의 아들 김범구였다.
6선, 7선, 8선, 9선 의원도 존재했기에 4선이면 아직 시간이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4선이면 중진으로 평가 받는다. 초선은 발로 뛰는 국회의원계의 이등병으로 분류되며 정말 탄식을 뱉을 정도의 커리어를 쌓지 않은 초선의원들은 그들 사이에서는 무시를 당하곤 했다.
그냥 거수기 정도랄까? 이유는 간단했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선출직이었기에 다음 선거가 끝난 뒤에서 초선의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선에 성공한 의원부터는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었고 3선은 아예 중진으로 분류되었다. 4선 의원이면 확실히 한국에서 큰 힘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지역구에 따라 중진을 넘어 핵심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고.
'9선에 성공한 김영구 전 대통령이나 박준구, 박종팔이 특이한 거지.'
9선에 성공한 이 중 박종팔이 그래서 행보를 벌일 때마다 주목 받지 않던가?
4선 의원의 자녀라는 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대한민국에서 큰 특혜로 작용한다.
제 배경을 믿는 것인지 정호준을 어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당당해도 너무 당당했다.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계시니 조금 이따가 더 이야기를 나누시죠."
어려서부터 누리고 자랐는지 김범구는 눈치가 없었다.
정호준이 먼저 이야기를 파해야 할 정도로.
정치 쪽에서 4선 의원의 자녀인 김범구가 가장 파워가 셌다면 재력가 쪽은 단연코 정윤정이었다. 아마 7선, 8선 의원의 직계 친족쯤은 갖다 붙여야 정윤정과 그나마 수준이 맞지 않을까?
"친분 없이 연락하거나 갑작스럽게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파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보네요."
'와, 정말 미인이었네.'
1회차 때 미인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실물로 보거나 사진으로 본 것도 아니고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 크게 관심도 없어 그려러니 하고 넘어갔는데, 실물로 보니 상상 이상으로 미인이었다.
연예인을 갖다 붙여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정호준이 가진 것이, 정호준의 행보가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어서인지 가장 겸손했고 예의가 발랐다.
"자꾸만 제 사정 때문에 파티가 뒤로 밀렸네요. 기다리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하기는요. 사업이 먼저죠. 충분히 이해해요."
정호준도 남자인지라 시커먼 남자인 김범구와의 생산성 없는 대화는 딱히 달가울 게 없었지만 미인인 정윤정과의 대화는 똑같이 생산성이 없어도 훨씬 나았다.
정윤정을 보내고 다른 이들도 하나하나 맞이하며 소개를 들었다.
물론 개중에 정호준의 머릿속에 남은 이는 몇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하나 맞아 인사를 마친 뒤 파티 시작 시간에 맞춰 정호준은 마이크를 붙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파티 일정이 자꾸만 뒤로 밀렸네요. 회사의 사활이 걸린 일들을 처리하는 게 급해서 미뤄진 거지 결코 여러분들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이 자리를 빌려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으로 당사자인 정호준은 딱히 기다렸던 이들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시 한번 사과함으로써 기다렸던 이들에게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했다.
김범구가 자꾸만 눈치 없게 다가와서 좀 번거로웠던 것만 빼면 파티는 큰 문제 없이 진행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불청객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많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대부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면 그건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 그냥 이대로 가라고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냥 당신들 고용주한테 가서 우리가 왔다고 말하는 게 빠르지 않겠어요?
자본주의의 종주국답게 돈이 많다면 미국에서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한국보다 법의 수의가 약해 대마초까지 펴 대지 않던가. 유명 인사의 파티 개최 정보쯤이야 당사자가 흘리지 않아도 알아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 하지만 초대장이 없는 분은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원칙입니다.
- 왜 이렇게 말이 길죠? 예외는 존재하는 거고 우리가 그 예외인 거 몰라요?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요?
성격 있고 나서는 거 좋아하는 해리스 헬튼과 티마라 에클리스톤이 자신들의 길을 막는 경호원들을 압박했다.
돈 많은 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노는 건 비슷한 경향을 띠지만 한국 상류층 자제들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제 맘대로 놀지는 못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비쳐 국민의 구설수에 올라가는 것을 부모들이 달갑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 상류층 자녀들은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모델과 같은 언론에 노출되는 직업을 갖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본인의 외모가 갖춰줘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재미 삼아 하는 거기도 했지만 어쨌건 모델이나 배우 활동을 하고 부모가 그것을 허락한다는 것만 해도 한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해리스 헬튼, 티마라 에클리스톤. 라디아 히스트, 아리아 록펠러까지. 외모를 갖춘 상속녀들은 대중적인 파티 장소에도 자주 보이고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기도 해 민간 경호업계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사람치고 그녀들을 모를 수는 없었다.
네 명의 상속녀들은 언제 어디서든 VVIP로 취급되는 여자들이었다.
- 팀장님, 상황 발생했습니다.
경호를 서는 경호팀은 초대장을 지참하지 않은 손님들을 돌려보내 왔다. 동양 쪽 손님이 대다수였기에 경호원들은 단칼에 거절을 해왔다. 하지만 네 명의 상속녀들은 정확히는 라디아 히스트와 아리아 록펠러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패밀리네임 '히스트'와 '록펠러'를 사용하는 진짜배기여서 제 맘대로 판단이 불가능했다.
부하의 보고에 팀장은 정호준에게 연락을 취했고 정호준은 그녀들의 입장을 허가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네 명의 상속녀들이 파티장에 입장하자 정호준과 친분을 쌓는 것을 포기하고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모여 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 저 여자 해리스 헬튼 아니야?"
어려서부터 관심과 구설수들을 몰고 다녔고 할리우드 배우로도 활동한 해리스 헬튼은 네 명의 상속녀 중 가장 유명했다. 상속녀 타이틀만 달고 있을 뿐 티마라 에클리스톤보다도 못한 처지였지만 말이다.
미국 상류층에 별다른 지식이 없는 대다수의 인원들은 해리스 헬튼을 보며 놀라거나 그녀들의 외모를 보며 관심을 드러냈지만 뭘 좀 아는 이에 속하는 정윤정은 좀 달랐다.
'히스트 가문의 상속녀랑 록펠러 가문의 증손녀네.'
유학 오기 전에 대충 상류층 인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 대해 공부한 정윤정은 라디아 히스트와 아리아 록펠러에게 시선을 보냈다. 티마라 에클리스톤이나 해리스 헬튼 또한 나름 상속녀라고 불리지만 IMF 외환위기 사태에서 생존한 이후 매년 수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KS그룹의 상속녀인 그녀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여자들이었다.
히스트 가문은 San Francisco Chronicle, Houston Chronicle, Cosmopolitan, Esquire를 포함 신문, 잡지, 텔레비전 채널 및 텔레비전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언론 재벌이다. A&E Networks 케이블 네트워크 그룹의 지분 50%를 소유했고 스포츠 케이블 네트워크 그룹 ESPN 지분 20%를 월트 디즈니 컴퍼니 와 제휴하여 소유했다. 여러 비즈니스 정보 회사도 소유한 20세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막강한 기업이 바로 히스트 코퍼레이션이었다.
라디아 히스트는 그런 거대한 가문의 상속녀였다.
록펠러야 그 이름만으로도 더 말할 것도 없는 명문가였고 말이다.
- 자선파티에서 보고 처음이죠?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요?
해리스 헬튼은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즐기며 불청객으로 와 놓고 정호준을 추궁했다. 티마라 에클리스톤 또한 그 대열에 참가했고 말이다.
- 초대받지 않았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반면 라디아 히스트와 아리아 록펠러는 정호준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며 서둘러 사과를 입에 담았다.
- 저는 원래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죠?
-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 헬튼 호텔의 상속녀예요.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쯤이야 금방 알아낼 수 있죠.
파티가 열리는 곳이라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날아간다는 이가 바로 그녀였다.
- 우리가 파티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 용건이 뭡니까?
정호준의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해리스 헬튼과 티마라 에클리스톤의 행태에 정호준의 표정이 더 굳었다.
- 당신과의 교류? 당신도 우리랑 알아두면 좋지 않겠어요? 나 해리스 헬튼이라고요.
자신 만만한 태도로 얼굴을 치켜세우는 해리스 헬튼과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티마라 에클리스톤의 모습에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뇨. 당신들과의 친분이 내게 득이 될 거란 그 오만한 생각부터 버렸으면 좋겠네요. 당신이 내가 줄 수 있는 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들한테 딱히 이성으로서 관심도 없고요.
이성으로써의 매력도 못 느낀다는 정호준의 발언에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해리스 헬튼이나 티마라 에클리스톤의 표정이 굳는 걸 넘어 붉어지기 시작했다.
- 여자가 조신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여기저기 일을 벌리고 다니며 소란스럽게 사는 여자는 딱 질색이거든요. 더 할 말도 없고 사과 한마디 없이 무례하게 군 두 사람은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네요.
그 발언이 진심이었는지 정호준은 사람까지 불렀다.
- 내 발로 나가요!
해리스 헬튼과 티마라 에클리스톤은 손대지 말란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씩씩거리며 자기 발로 파티장을 떠났다.
다만 같이 왔던 다른 두 명의 상속녀들은 친구 따라 강남에 가지 않고 파티장에 남았다.
그 모습에 '얘들 별로 안 친한가?'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