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
2005년 4월 24일.
[영국에서 복제양 두리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처럼 황우식 박사 세계 최초로 복제 개를 만들다.]
황우식은 복제 개 스너피(Snuppy)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며 자신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언론, 과학계, 그리고 노민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변방이나 다름없던 대한민국의 과학계를 세계의 주목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준 황우식을 영웅시했고 말이다.
정호준이 예상했던 것처럼 황우식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이는 진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난이 가해졌다.
그런 이유로 누구도 황우식에게 의심을 품지 않았고 바이오 업계로 돈이 쏠리는 현상은 가속화되며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진아제약은 간혹 5~7백만 대의 거래량을 찍을 때가 있지만 웬만하면 하루 거래량이 1천만은 돌파해주었다. 거래량이 많을 때는 진아제약의 상장주식 수보다 더 많은 거래량이 기록되기도 했다.
상장주식 수가 2천만 주인데 거래량이 1천만을 돌파하는 모습을 매일 보여준다는 건 한국의 주식 시장이, 바이오 테마 열풍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정호준은 절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바이오 광풍에 가담해 주식을 매도했다. 정확히는 매도하는 주식의 수를 늘려갔다.
6천주는 금세 7천주로 변했고, 이윽고 1만주까지 늘어났다.
바이오 테마 광풍에 휩쓸려 주식 매수와 매도가 미친 듯 반복되고 있다지만 2020년까지 사명을 지어갈 정도로 어느 정도 튼튼함(?)을 지닌 중소기업이 진아제약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20년을 넘게 생존해 내지 않았던가.
20년도 들어서면서 하락세에 들어서긴 하지만 어쨌든 2014년에는 강소기업으로 지정되기까지 했을 정도다.
처음에는 정호준의 매도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주식 매도가 꾸준하게 이어지자 구실을 제대로 갖춘 기업인 만큼 정호준이 주식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윽고 그들에게 연락이 왔다.
*****
4월 30일 대한민국에서 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국민에게 제 이름 석자를 제대로 인식시킨 강현태를 영입하고자 했지만 강현태는 정당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 정치색을 벌써부터 선택할 필요는 없다.'
딱히 정치적으로 신념을 갖고 있는 게 아닌 만큼 그는 노란색도 파란색도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당을 선택하지 않은 건 자신의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번 선거는 정당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강현태는 이미 다단계 사기를 사전에 잡아냄으로써 본인의 능력과 제 이름을 국민들에게 알린 상태다. 그에 더해 서울대라는 간판과 판사 출신 법조인으로서 쌓아온 커리어는 강현태의 훌륭함(?)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이&박과 협조 관계에 있는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은밀하게나마 강현태를 지지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상태니. 강현태가 자신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사전선거운동을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부천시 원미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쁘실 텐데 제가 괜히 전화를 건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4월 30일. 한국은 5월 1일이 8시 30분쯤 되던 시각.
정호준은 강현태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건넸다.
- 사무실로 가는 중이라 통화 괜찮습니다. 그리고 호준군의 전화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강현태 의원은 정호준의 축하 인사에 답례 인사를 건넸다. 몇 분 이야기를 이어 가다 드디어 본론이 시작되었다.
- 그나저나 호준군을 말마따나 김가엔터테인먼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더군요. 아, 이제는 고스트라 불러야 할까요?
- 편하신 대로 부르시죠. 뭐라고 지칭하든 관계없지 않습니까?
- 그럴 수는 없죠. 통일된 명칭을 부르는 것부터가 정보 공유의 시작인걸요. 고스트라고 부르겠습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호준이 말한 것처럼 김해일의 김가엔터테인먼트는 '고스트'를 인수했다. 인수를 했으면 사세를 정비하는 게 맞거늘 김해일은 어제 오후에 다른 엔터사도 인수할 계획임을 밝혔다.
엔터 회사 인수를 통해 연예인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생각을 언론을 통해 드러냈다.
-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주가를 띄운 뒤 이익을 챙길 계획일 겁니다.
- 지금 당장 잡아들이면 세력이나 음지의 자금들은 큰 손해 없이 다시 숨어들 거란 말이군요. 그럼 잠시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번 같이 움직인 적이 있어서인지 강현태는 정호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 인수합병을 마치자마자 들이닥칠 수 있게 조용히 물밑에서 작업을 해두겠습니다.
- 음지의 자금이 끼어든 만큼 분명 여기저기 손이 닿아있을 겁니다.
정호준은 보안을 강조하는 것으로 통화를 마쳤다.
*****
정호준은 미팅을 거부하기 위한 핑계로 한국에 들어갈 형편이 안 된다고 미팅 요청을 거절했지만 진아제약은 자신들이 미국으로 넘어오겠다며 시간을 내주기를 계속 요청했다.
- 5월 5일 시간 괜찮습니까? 그때 잠깐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미국까지 찾아오겠다며 끈질기게 만남을 요청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자넷은 아직 정호준이 부탁한 일을 수행하느라 바빴기에 정호준은 경호원만 대동한 채 직접 미팅 약속 장소에 나갔다.
50대를 막 넘긴 것 같은 외견의 남성은 그와 닮은 20대 남성과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을 대동한 채 미팅에 나왔다.
'닮은 걸 보니 자식인가 보네?'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이 자리에 데리고 나왔나 보다.
"나 진아제약 회장 장원기요. 우리 회사에 투자한 사람이, 소문 자자한 메가밀리언 당첨자일 줄은 몰랐네."
정호준이 한국에서 워낙 유명인인 탓에 장원기는 정호준을 보자 정호준의 신상정보를 거론하며 반말을 내뱉었다.
"여긴 한국이 아닌 미국입니다. 저는 투자자고요. 한국 말로 대화할 거라면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어야 존중을 나타내는 뉘앙스의 차는 표현할 수 있어도 한국처럼 존댓말 자체는 없다. 정호준은 장원기를 보며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장원기는 약사 약국을 차리고 이윽고 기업화까지 성공한 남자다. 돌려 말한 것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다만 사업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쉬운 입장이어서인지 고집을 이어가진 않았다. 재빠른 사과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과 받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4월 중순쯤부터 주식을 꾸준히 정리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가 있어서 혹시 JHJ가 아닌가 싶어 확인차 왔습니다. 진아제약 주식 전부 정리할 생각입니까?"
"예, 말씀하신 대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한국 주식 시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조금 더 갖고 있고 싶은데, 급하게 돈 쓸 때가 생겨서요."
당신의 짐작이 맞다는 정호준의 대답에 장원기는 말없이 정호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급하게 쓸 때라? 급하게 돈 쓸 곳이 어딘지 물어보고 싶지만, 예의도 아니고 대답도 안 해줄 것 같으니. 자네가 들고 있는 주식 우리가 다시 매입해도 되겠소?"
"제값만 치러주신다면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프리미엄은 챙겨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대로 쭉 정리를 이어나갔을 때 얻게 될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수만 있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정호준은 흔쾌히 수락했다.
"30만주는 이미 정리가 끝났습니다. 주당 얼마나 쳐주시겠습니까?"
정호준이 프리미엄을 언급한 뒤 곧바로 가격을 묻자 장원기는 잠깐 뜸 들이다가 말했다.
"현재가에서 프리미엄 800원을 붙여서 주당 9,630에 구매하지."
"조금만 더 써주시죠. 딱 10,000원 맞춰주시면 깔끔하고 좋지 않을까요? 주식이 만원보다 더 오를 거란 건, 저도 회장님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습니까?"
"35억원을 투자했을 뿐이면서 대체 얼마나 챙겨가겠다는 겁니까?"
정호준의 가격 제시에 지금까지 쭉 지켜만 보고 있던 20대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투자자가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적당히라는 게 있는 겁니다."
"싫으면 매입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나야 시장에 매도해도 됩니다만?"
아들과 정호준의 언쟁을 지켜보며 정호준이 주당 1만원에 팔겠다는 뜻을 물릴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장원기는 아들을 막아 세웠다.
"상현아,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장상현을 혼낸 뒤 장원기는 정호준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 말했다. 다만 주식을 매수하는 계좌는 진아제약의 계좌가 아니었다.
'차명이라... 뭐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
그렇게 정호준은 170만주를 주당 10,000원에 매도했다.
"좋은 값 치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아제약의 승승장구를 기원하겠습니다."
장씨 일가가 프리미엄을 붙여준 덕분에 십수억은 더 챙기게 되었기에 정호준의 입에서는 덕담이 흘러나왔다.
"급하게 돈 쓸 곳이 있다 했던 그 일 잘되길 바라지."
진아제약에게 주식을 매도한 정호준은 자신이 보유한 SY앤터 주식 66,819주도 정리에 들어갔다.
평단가 18,230에 매도해 세금을 제하고 1,169,385,955원을 벌었다.
정호준은 세금 낼 것 내고 남은 19,899,945,955원을 곧바로 달러로 환전했다.
*****
- 정, 이쪽은 준비 다 끝났어요.
SY주식과 진아제약 주식을 전부 매도한 정호준은 자넷의 보고를 받은 뒤 박남정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 아저씨, 저는 급하게 돈을 써야 할 일이 있어서 가지고 있는 주식을 정리했습니다. 아저씨도 지금 주식을 매도하시는 게 어떨까요?
- 무슨 일 있는 거니?
- 미국에서 급하게 쓸 때가 있어서요. 주가가 더 오르기는 할 텐데, 기왕이면 지금 매도하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불안하시잖아요? 전화 못 받을 정도로 바쁠 것 같아요.
5월에 들어서면서 정호준은 박남정에게 주식 매도를 권했다. 확인차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는 앞으로 몇 개월 본인의 일에 신경 쓰기에도 바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래, 알았다.
남의 말 듣고 주식을 파는 게 멍청하단 말은 박남정도 주워 들은 바 있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남이 자신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었기에 박남정은 정호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주까지 정리할게.
정호준은 자신이 주식을 잘 못할 사람임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박남정의 태도에 작게나마 감탄했다.
- 끝까지 신경 써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 죄송할 게 뭐 있냐? 돈 벌게 해줬는데.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그 급한 일이라는 것도 잘 되길 바란다. 혹시 돈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빈말일지라도 돈까지 빌려주겠다는 박남정의 말에 정호준은 잠깐이지만 따듯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