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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거래로 수십억에 달하는 돈이 움직일 경우 그에 따른 세금이 존재한다. 코스피, 코스닥, 코넥스 등 주식이 '어떤 장에 속했냐.'에 따라 지불해야 할 비율이 다르다.
대충 2억 정도를 세금으로 지불했고 세금을 지불하고 남은 11,501,280,000원 중 5억만 남기고 110억을 달러로 환전했다.
100억에 이르는 돈을 환전하는 JHJ 한국 법인의 움직임을 확인한 이들이 있었다.
"부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970만 달러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습니다."
2005년 1월은 IMF 관리 체제를 청산한 날로부터 3년을 조금 넘긴 시기다. 100억의 가치에 해당하는 외화 9,777,777달러가 여러 번에 나눠서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고 한 번에 빠져나갔기에 금융감독원에게 포착되었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딱히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잖냐? 그냥 둬야지."
다만 그들의 관심은 그냥 관심에서 그쳤다. JHJ 한국 법인이 법을 어긴 게 전무했기 때문. 미국 국적을 달고 있는 법인은 불법 하나 없이 모든 일을 합법적인 선에서 처리했다. 대한민국이 세상이랑 통하는 문을 닫고 살아가는 북한과 같은 나라는 아니었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별 탈 없이 JHJ 미국 법인 계좌로 입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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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12월도 그렇고 올해 1월에도 그렇고 이자를 내는 날인 22일인 꼬박꼬박 찾아왔다.
'주가가 거의 변하질 않았네.'
정호준은 주식을 매도하기 위해 주가를 살폈다. 잠깐 정체기에 들어섰는지 11월 중순의 주가는 10월과 비교해 주가에 큰 변동이 없었다. 아쉬웠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인 거늘.
11월에는 이자 지급을 위해 평균 매도가 176.34불에 14,211주를 매도했다. 그나마 12월 이자 지급할 때는 다행히 주가가 조금 오른 상태였다.
상승 폭은 약 20불 정도.
20불이나 올라준 덕분에 평균 매도가 195.51불에 12,816주를 매도했다.
'저번 달보다 500주는 절약했네. 다행이다.'
1천 주만 들으면 금액이 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주가가 3배 정도 더 올라간다 가정하면 무려 5억이 넘는 돈이 된다. 돈을 세는 단위로 억이란 단위가 쓰여진 이상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다.
2008년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그땐 작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지금 당장에는 큰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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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을 주고받는 행위는 사회생활의 기본 중 하나다. 상대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명함 하나가 대부분을 설명해준다,
'명함을 챙겨두길 잘했네.'
습관처럼 주고받은 명함 덕분에 복잡한 절차 없이 다이렉트로 그가 돈을 빌린 투자은행의 직급 있는 이와 통화를 나눴다.
- 이자 지급을 1주일만 연기했으면 합니다.
이자를 지급하는 다음 주에 현금이 들어오는데 주식을 매도하고 싶지 않았다. 정체기에 들어서서 상승세와 하락세를 연이어 보여주고 있어서 더 그랬다.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됐을 손해를 볼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다.
'별다른 조건 없이 흔쾌히 받아줘서 다행이었지.'
딱히 구구절절한 설득의 시간을 갖지도 않았는데 투자 은행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자 지급일의 연장을 수락해주었다.
담보로 잡은 자산의 가치들이 담보를 잡을 때와 비교해 30% 이상 상승한 탓도 있지만 그들이 흔쾌히 수락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Incredible!'
미신과 징크스, 그리고 실패 이력 때문에 투자자들이 투자를 망설였던 영화. 제작비 9천 2백만 달러 중 3분의 1을 넘기는 금액인 3,100만 달러를 투자한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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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에 투자한 건 SSL이지 JHJ Capital이 아니었지만 SSL이나 JHJ나 전부 정호준의 것이라는 것쯤은 월가와 미국 금융가의 인사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인크레더블의 성공은 조금은 잠잠해진, 식어가던 JHJ에 대한 관심을 다시 쏠리게 만들었다.
정호준의 귀에는 월가나 금융가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적이 없기에 정호준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본디 소문이란 것의 습성이 그렇다. 소문의 당사자가 가장 마지막에 듣는다.
눈치나 인맥이 있으면 조금 일찍 듣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목이 완전히 집중된 후에야 정호준은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을 인지했다.
9,777,777달러가 입금되자마자 정호준은 2,505,867.49달러를 납부했고, 이자를 납부하고 남은 7,272,509.51달러를 들고 영화투자를 위해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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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이 두 번째로 투자를 결심한 영화의 이름은 '마다가스카'였다.
마다가스카는 2010년대부터 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사로 손에 꼽히는 픽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회사 '드림웍스 픽처스'가 제작하는 영화였다.
다만 사실 정호준은 JHJ는 드림웍스 픽쳐스로부터 마다가스카 시놉시스를 받지는 못했다. 마다가스카란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는 업계의 소문을 듣고 연락한 거였다.
마다가스카가 시리즈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황급히 선금을 마련해 움직였지만.
- 죄송합니다. 이미 투자금 유치를 모두 마쳤습니다.
들려오는 건 투자금 유치를 마쳤다는 거절이었다.
'처음부터 시놉시스가 배달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직 그럴 깜냥이 아니란 건가?'
가십거리가 되어 관심이 쏠린다는 게 그 회사의 위세 자체를 높여주는 건 또 아니란 걸 느꼈다.
기껏 시간을 내서 연락처를 알아보고 통화를 나눴는데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정호준은 다른 투자처를 물색했고, 결국 또 하나 건져내긴 했다.
'Mr. & Mrs. Smith'
'21th Century Fox Studios'에서 제작하는 영화로 전작을 성공시킨 더기 라이먼 감독의 영화였다.
영화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영화마니아인 박기태와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었기에 이 작품을 선택했다.
드림웍스 픽처스 때와 달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고 미팅 약속을 잡는데 그리 오랜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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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과 약속 장소로 나갔을 때는 더기 라이먼 감독과 21세기 폭스 스튜디오의 관계자가 나와 있었다.
멋지게 늙어가는 듯한 외견의 중년 남성과 풍만한 몸집의 흑인 여성이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Mr. & Mrs. Smith'의 감독을 맡은 더기 라이먼입니다.
-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시놉시스를 읽어봤는데 참 매력적이라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 JHJ Capital의 고문변호사 릴리 자넷입니다.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캐스팅된 배우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브리드 피트'와 '안젤라 졸리'. 연예인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이름들이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 제가 좋은 영화에 투자할 수 있게 시놉시스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놉을 받는 것조차 깜냥이 안 되면 못 받는 게 이쪽 업계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 정호준은 관계자에게도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 요즘 금융가에서 핫한 JHJ가 투자하겠다는데 당연히 만나 봐야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21세기 폭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밀리 스미스입니다.
먼저 숙여주는 정호준의 겸양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흑인 여성 또한 정호준을 치켜세워주었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한창 나눈 뒤에야 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제작비를 얼마로 잡고 있는지, 그리고 투자는 얼마나 받았는지 정확한 사안을 공유받을 수 있을까요?
- 제작비는 1억 달러 정도로 계산 중이고 회사에서 3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유치한 투자금은 현재 2천만 달러 정도 되고요.
- 5천만 달러를 더 메꿔야 한다는 거군요.
정호준의 중얼거림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남은 5천만 달러. 저희 JHJ에서 전부 투자하겠습니다.
5천만 달러. 한화로 575억에 달하는 돈을 전부 투자하겠다 말하는 정호준의 발언에 에밀리와 더기 라이먼 감독이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다.
- 5천만 달러를 전부 투자하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맞게 들은 게 맞습니까?
에밀리 대신 라이먼 감독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정호준에게 되물었다. 그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선금으로 720만 달러를 입금하고 3월 초에 남은 돈을 투자했으면 합니다.
조건을 다는 정호준의 요구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인크레더블 정산금으로 투자하려는 거군요?
- 예, 맞습니다.
- 그렇게 하죠.
정호준이 요구한 조건이 계약서 문구에 추가되었고 그렇게 5천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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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부는 여고생'은 천만 영화를 알아본 '태극기 흩날리며'의 투자자가 투자했다는 소식과 그 투자자가 메가밀리언 복권 당첨자란 사실을 밝혀낸 언론의 부채질 덕분에 관심이 집중되어 본래보다 배는 많은 관람객 동원했다.
'하아, 돈 번 건 좋은데, 쟤들이 잘나가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자넷과 박남정에게 알아봐 달라 요청해서 박제균 감독이 그 당시 30억을 들여 만든 '기생피리'가 600만을 관객을 돌파해 회사를 창업했듯 컬쳐캠미디어도 이번 영화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세를 무려 2배나 키웠다.
모든 일이란 게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존재하면 세상에는 부정적인 나비효과 또한 존재하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정호준 덕분에 덕분에 잘된 영화가 생겼듯 정호준 때문에 한국에서 본래보다 성적을 내지 못한 영화 또한 존재했다.
영화의 제목은 인크레더블, 정호준이 투자한 영화였다.
정호준이 그리 대단한 인간은 아니었기에 북미 박스오피스나 세계 매출 자체에 큰 지장을 주진 않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일본의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한국 사람들을 깎아내릴 때 냄비에 비유하며 금방 들끓고 금방 사그라든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다만 한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치밀하고 집요하게 마음먹은 바를 이행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펙트였다.
'독하네 정말.'
영화가 재미가 없게 찍힌 것도 아닌데 한국 국적을 버린 정호준이 투자한 영화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인크레더블은 한국 영화시장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
인크레더블이 한국 대신 미국 국적을 선택한 정호준이 투자한 영화란 사실이 언론에 의해 알려진 뒤로 '볼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다른 거 보자.'란 인식이 강했던 탓이다.
정말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나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영화를 관람하게 된 이들을 제외하곤 인크레더블을 관람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데?'
어떤 이유에서건 영화를 관람한 이들은 볼만하단 평가를 내렸지만 말이다.
- 누적 관객 수 352,318명.
회귀 전 총 1,155,067명이 관람했던 영화가 35만 관람객을 겨우 돌파하곤 스크린을 내려왔다. 대략 4,816,494,000원 정도를 덜 벌어 들인 것. 만약 인크레더블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닌 평범한 영화였다면 그마저도 동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산금에 적힌 한국 매출이 한국에서 정말 죽을 썼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