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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5화 (2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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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 가방과 짐가방을 내려놓은 정호준은 가방에서 돈을 넣어둔 봉투를 꺼내 260불을 건넸다.

정호준이 돈을 건내자 브론시아는 손을 내저었다.

- 내가 낸다니까요. 그래서 호준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내 맘대로 방 잡았잖아요. 그것도 스위트 룸으로.

자기 맘대로 했으니 자기가 다 내겠다. 얼핏 들으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안에는 정호준의 자존심 고려는 없었다.

그가 분명 호텔에 들어가서 얼 타긴 했다.

처음 보는 규모, 처음 느끼는 화려함.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서 오는 압박감과 일련의 공포가 그를 짖눌렀으니까.

그렇지만.

- 그래도 브론시아가 다 내는 건 좀 아닌 거 같네요.

공짜로 지내면 좋은 건데 왜 괜히 사서 돈을 내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호준은 브론시아에게 그런 호의를 받을 이유가 없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한쪽만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경우가 드문데.

친분을 나눈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공짜로 수십만 원의 호의를 받는다?

그것도 미녀의.

'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좋다고 안 낼 줄 알았나?'

나름 자기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호준에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자 앞에서 쪽팔리고 싶지 않은 수컷의 자존심에도 생채기가 가는 일이었고.

'내가 돈을 못 낼 형편도 아니고.'

아무리 성공할 영화라는 걸 알고 투자했다지만 수십억. 정말 쥐고 있는 것을 탈탈 털어 전 재산을 밀어 넣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두려움은 존재하는 거 아니겠는가?

투자 때문에 당장 주머니에 든 게 없어 본래의 씀씀이보다도 더 절약하려 노력했을 뿐이다. 오늘 아침 9시쯤 정호준의 걱정과 염려 소비욕을 묶은 족쇄를 푸는 통화를 받았었다.

"축하한다 호준아. 네 말대로 박감독의 영화가 성공했구나."

"다 아저씨께서 힘 써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투자하려는 널 옆에서 만류하려고만 했지."

"그게 다 절 걱정해주셔서 그런 거잖아요. 그 마음이 있었기에 제가 박제균 감독의 영화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정호준은 자신의 투자 성공을 박남정의 공으로 돌렸다.

"극장에서 개봉한 지 11일 밖에 안 됐는데 벌써 400만을 넘겼어. 한국에서는 벌써부터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될 거라고 난리야."

정호준이 투자한 영화 '태극기 흩날리며'의 대박 성공을 박남정이 직접 정호준에게 알려주었다. '태극기 흩날리며'는 11일 만에 누적 관객 400만을 돌파하며 '실미도 부대'의 누적 관객 최단 기록을 갈아 치웠다.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부정 탈까 봐 조심스럽지만, 나도 천만 넘길 것 같긴 해."

"저도 태극기가 천만을 넘길 걸 기대하며 투자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작비로 130억을 넘게 사용한 영화에 20억이나 투자하진 않았겠죠."

예의를 차리는 정호준의 답변에 박남정은 잠깐 말을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감독도 네게 안부 전해 달라더라. 다음에 식사 한 끼 같이 하자고. 십수 년을 이 바닥에서 밥 벌어먹으면서 살았는데, 네가 나보다 낫구나."

성공할 영화를 구별해내는 선구안, 그리고 20억을 망설이지 않고 투자하는 과감함과 담대함에 감탄하며 살짝 자조 섞인 반응을 보였다. 아들의 친구로 어릴 때부터 봐와 과장하면 내 자식처럼 느껴졌던 정호준이 처음으로 낯설어졌고 한 명의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시간의 무상함과 씁쓸함에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는 박남정을 보며 정호준은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박남정의 감정 수습을 기다릴 뿐.

다행히 박남정의 자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여행은 즐겁게 하고 있니?"

"기태한테 연락 안 하셨어요?"

"국제 전화비 많이 나오는데 뭘 쓸데없이 전화하겠니. 너야 아직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을 거 같아 알려준 거지. 여행 편히 하라고."

박남정의 깨알 같은 배려에 정호준은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

정산을 마치고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왔다. 차를 대고 방을 잡으러 호텔 안으로 들어갔을 때보다 시간이 흐른 터라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해가 살아있을 때와 비교해 정말 도시 풍경이 극명하게 달라졌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화려해졌다는 말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 예쁘네요. 너무 화려해요.

중간중간 헐벗은 차림새의 쇼걸(바니걸)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남자의 본능과 정호준의 눈은 그녀들을 1초라도 더 보자고 갈구했지만 함께 걷고 있는 브론시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에 꾹 참았다.

튀어나오는 욕구를 진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눌렀다.

정호준과 브론시아는 라스베가스의 명물로 유명한 벨라지오 분수를 보러 20분을 도보로 이동했다.

- 아, 이제 막 쇼가 시작됐나 봐요. 도입부네요 음악이.

- 그래요? 운이 좋았네요.

교향곡과 같은 그쪽 장르에 관심이 없던 정호준은 그저 타이밍이 맞았음에 감사했다.

음악의 박자와 리듬에 맞춰 분수의 높낮이 방향, 물의 세기 등 모양을 바꾸는 광경은 정말 멋졌다. 6시 25분이 조금 안 됐을 때 도착해서 거의 1시간을 구경했는데 노래가 중복된 적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분수의 모양도 매번 달랐다.

괜히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가 세계 3대 분수쇼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님을 증명했다고나 할까? 물론 정호준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 브론시아, 이제 그만 이동하죠.

- 또 어디 갈 때가 있나요?

- 쇼를 구경하며 중간중간 귓동냥으로 들었는데, 미라지 호텔 근처에 있는 쇼도 되게 멋지데요. 8시에 시작한다니까 얼른 이동하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미라지 호텔은 그들이 잡은 베네시안(베니션) 호텔 근처에 있었음으로 찾아가는 길이 그렇게 복잡하거나 멀진 않았다.

그저 근처에 다 와서 조금 헤맬 뻔했을 뿐. 그것도 정호준은 기지로 금방 해결되었다. 쇼 시작 시각인 8시가 얼마 남은 상황이었기에 사람이 가만 모여 서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다행히 정답이었다.

화산을 본뜬 거대한 홀과 그 밑 호수 위에 자잘하게 보이는 작은 기둥들.

이곳이 쇼장임이 분명했다.

15분 일찍 온 덕분에 조금은 좋은 자리에 서서 시작을 기다릴 수 있었다.

시간이 8시에 가까워갈수록 사람은 점점 많아져 갔다.

거리가 점점 꽉 차가는 상황을 지켜보다 정호준은 브론시아를 손을 끌어당겨 그의 앞에 세웠다.

자신을 끌어당겨 앞에 세운 정호준의 행동에 당연히 브론시아는 정호준을 빤히 쳐다봤고 그 시선에 정호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 사람이 붐벼서요. 그리고 앞에서 재미있게 보라고요.

브론시아는 정호준의 대답을 듣곤 피식 웃었다.

사람이 모인 만큼 웅성거리는 소리는 괜히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음악과 함께 쇼가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타악기 소리가 신나는 박자감을 선사한다.

'연출이 화려하네.'

쇼가 시작되어 물이 사방으로 넘치고 라이트가 켜지자 물이 아닌 마그마가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볼케이노쇼란 이름답게 디테일도 꽤나 신경 쓴 듯 보였다.

'어?'

브론시아 바로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호준은 자신의 양손을 붙잡고 허리에 두르는 브론시아의 손길에 잠깐 당황했다. 적극적이어도 너무 적극적이었으니까.

브론시아는 당황하는 정호준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정호준이 당황하든 말든 쇼는 계속 진행됐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분화구에서 불길이 넘실거렸고 밑의 자잘한 기둥들에서도 폭발이 일었다. 박자와 리듬에 맞춰 조절되며 폭발하고 변해가는 그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클라이막스(맥스)에는 특히나 화려했고.

'바로 그랜드캐니언으로 가지 않고 여기 들른 게 좋은 선택이었네.'

이런 화려한 쇼들을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즐기는 경험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이 날 만큼 값진 거였다.

*****

볼케이노쇼까지 재미있게 관람을 마친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왔다. 작게 만들어 놓은 실내 운하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좀 더 둘러보다 사람이 꽤 들어서 있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 술도 한잔 할까요?

- 술은 이따가 '바'에 가서 해요. 분위기 좋은 바도 많더라고요.

밥은 밥대로 먹고 술은 또 따로 마시자는 브론시아의 말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시안 호텔 내부 상가지역은 호텔과 타임스퀘어를 섞어 놓은 듯한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마치 그들이 르네상스시대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건물 내부에 있음에도 야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천장에 하늘을 그려 놓은 곳 또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런식으로 인테리어를 구성하기도 하는구나.'

분명 건물 내부인데 바깥에 있는 느낌을 선사했다.

식사를 마친 뒤 실내 광장을 좀 더 구경하며 채운 배를 조금 꺼지게 만들었고 카지노에 들렀다.

카지노에 입장하기 위해선 보통 신분증을 확인한다. 여행 나와서 여권을 두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고 정호준과 브론시아는 그 예외에 속하지 않았기에 돌아다니는 내내 가방이나 품속에 여권을 넣어두고 다녔다.

그런데 ID카드(여권)을 달라고 할 걸 기다리고 있던 정호준은 제지나 확인 없이 편히 입장했다.

'뭐지? 검사 안 하나?'

사방이 뻥 뚫린 개방된 운영체제의 카지노여서일까?

여권 확인 없이 입장했다.

'와.'

붉은 바탕에 무늬가 섞인 고급스러운 카펫 위로 이런저런 가지각색의 슬롯머신이 잔뜩 놓여 있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엔 왕관 무늬의 대리석이 보인다.

사각의 기둥의 겉에는 은은한 황금빛이 비친다.

다른 카지노에 들러본 건 아니지만 베네시안(베네치안) 호텔의 카지노만 봐도 사람들이 왜 라스베가스를 향락(도박)의 도시, 죄악의 도시(Sin City)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 호준은 카지노에 와본 경험이 없는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죠?

- 네. 처음 와봐요.

- 즐기는 건 좋은데 절대 빠지면 안 돼요. 카지노에서 놀 때는, 반드시 얼마를 사용할 건지 처음부터 정해 놔야 해요. 호준이 처음 정한 돈은 없는 돈이라 생각해야 하고요. 돈 잃은 걸 아까워해선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아까워하는 순간 패가망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거예요.

카지노에 처음 온다는 확답을 듣자마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브론시아의 충고가 쓸모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 뭐라고요?

- 카지노 베팅은 만 21세부터 허용됩니다. 구경하시는 건 괜찮지만 베팅은 불가능하십니다.

일단 아는 거부터 해보자는 생각으로 브론시아와 함께 블랙잭을 플레이 하는 곳으로 이동해 자리에 앉았는데, 지금껏 확인하지 않았던 ID CARD를 테이블에서 딜러가 확인했다.

이렇게 막힐 줄 몰랐던 터라 두 사람은 모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브론시아는 더 그랬다.

- 안 된다니까 일단 나가죠.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은데, 보기만 하면 아쉬을 것 같으니까요.

- 21세부터 베팅할 수 있다니, 어이가 없네요. 밴쿠버에선 입장 가능했는데.

- 밴쿠버랑 브라질은 입장이 가능해요?

- 밴쿠버는 19세부터 가능하고, 브라질은 18세부터 가능해요.

- 브라질은 자국민이 자국 내에 카지노에 입장할 수 있게 허용해주나 봐요?

- 아뇨. 불법이긴 해요.

- 네?

- 불법인데 합법처럼 사용하는 거죠. 대마처럼요. 브라질에서 대마초는 불법이지만 파티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대마를 피죠. 아,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그래도 나는 대마는 안 했어요. 카지노도 작년에 처음 이용한 거고요.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다. 법으로 분명히 불법이라 명시되어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한다니. 법을 준수하는 준법시민이 대다수인 한국에서 자란 정호준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했다.

'청소년(일진)들이 담배를 사서 피는 거랑 같은 건가?'

더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파질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

카지노에서 나와 바로 직행한 정호준과 브론시아는 바에 들렸다. 그런데 그 바에서도 나이 제한에 걸려 또 한번 헛걸음을 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계획이 어그러져서 방에 올라온 정호준과 브론시아였지만 그럼에도 할 건 했다. 며칠 함께 여행하며 호감을 누적된 남녀가 아무 일도 없기에는 너무 열정적인 나이였다.

- 브론시아 다 왔어요. 일어나요.

정호준은 방문자 센터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곤 자고 있는 브론시아를 흔들어 깨웠다. 여행하는 내내 옆에서 이야기를 나눠주었던 브론시아는 간밤의 역사가 격렬하긴 했는지 오는 내내 잠을 잤다.

11시를 넘긴 시계를 확인한 뒤 브론시아가 말했다.

- 혼자 심심하게. 깨우지 그랬어요.

- 깨우는 게 미안할 정도로 푹 자길래 그냥 놔뒀죠. 그렇게 푹 자는 데는 내 탓도 있는 거 같아서.

죄책감을 덜어주는 호준의 섹드립에 브론시아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 출발하죠. 추울 수도 있으니까 겉옷 두꺼운 걸로 꼭 챙겨요.

버스 노선부터 포인트까지 여럿이 존재했는데 정호준은 레드 루트를 선택했다.

버스는 중간중간 정류장이 존재해 내려서 경관을 구경하며 도보로 걷는 게 가능했고, 버스 배차 간격도 그리 오랜 기다림이 필요 없었다. 덕분에 걷다, 타다를 반복할 수 있었다.

대체 이 경관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미쳤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어느 때보다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압도적인 경관에 정호준은 한국말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브론시아도 정호준이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자국의 언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트레일뷰 오버룩과 포웰포인트, 모뉴먼트 크릭 비스타, 허밋 레스트에 내려 걸어 다니며 주변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를 구할 때 캠핑 온 느낌을 살리기 위해 캠핑카를 빌렸다.

주방과 경관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 편히 쉴 수 있는 소파, 작아서 불편함은 있겠지만 샤워부스까지 있어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방문객 센터 근처에서 식재료를 구매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브론시아에게 요리를 대접하기도 하며 마지막 날 밤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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