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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관계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이 존재한다. 이 벽의 크기는 '피의 이어짐,'과 '친분이 어느 정도 되는가.'와 '성격'에 따라 형태와 두께를 달리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간혹 이 무형의 장벽이 크든 작든 잠깐이나마 사라지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스포츠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바로 이 예외의 경우 중 하나에 속했다.
어려울 것 없이 한국만 봐도 예시로 들기 좋은 선례가 있지 않던가?
2002년 월드컵 때 대표팀이 예선전에서 승리하고 본선 토너먼트에서 승리할 때마다 거리로 나가 응원했던 모든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졌었다. 그때 얼마나 서로 간에 얼마나 경계심이 허물어졌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감싸 안았고.
2002 월드컵 때 출산률이 올라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물론 이는 펙트가 아니었지만. 가장 강력한 벽 중 하나인 남녀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피임 도구인 콘돔 판매량이 폭증했던 통계가 이를 뒷받침했다.
그리고 이는 정호준과 박기태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이겼다, 이겼어!"
꽈아악!
응원하는 팀이 이겼다는 것에 기뻐한 마리아와 브론시아가 옆에 있던 정호준과 박기태를 꽉 안았다.
왼쪽 팔꿈치를 통해 느껴지는 부드러움 촉감을 즐기며 정호준은 생각했다.
'아 지금이 기횐데.'라고.
죽기 전까지 결혼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정호준이지만 그 말이 여자를 사귀어보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여자가 없기엔 정호준도 매력적인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친우인 박기태만큼은 아니지만 정호준도 나름 준수한 외모와 체격을 지닌 남자였다.
그리고 조건을 따지면 외견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IMF가 터지고 난 뒤로 정년 보장의 철밥통이란 이유로 조명받기 시작한 공무원 시험이지만 정호준이 시험을 볼 당시는 10년대, 20년대와 비교해 난이도나 경쟁률이 조금 덜 빡셌다.
대학교 4학년을 마치기 전에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동년에 공채에 합격한 동기들보다 한 발자국 이상 빠르게 승진을 이어갔다. 정호준의 커리어는 누가 평가해도 성공적이라 말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게다가 양친과 사별해 여자들이 결혼 생활의 장애물이라 언급하곤 하는 시월드가 없고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했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일등 신랑감, 결혼정보회사에서 탑티어로 분류하는 신랑감이 바로 회귀 전의 정호준이었다.
그런 인기매물을 주변에서 가만 놔둘 리 있겠는가?
선배나 후배로부터 대쉬를 받은 건 기본이고 과장이나 구청장, 고참계장 등 3급, 4급에 해당하는 직급의 직계 상급자들로부터 선 자리를 주선 받기도 했다.
소개받은 자리에 나온 여성들은 정호준이 가지고 있는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이룩한 자산가의 직업이 조금 시원찮은 딸을 시작으로 법조계 명문가까진 아니더라도 지방법원 부장판사나 부부장검사의 딸도, 은행이나 의료업계의 중진의 딸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호준은 '연애는 낭만 결혼은 현실.'이란 말이 빈말이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20대 때의 그냥 만나기만 해도 좋던 풋풋했던 연애가 아닌 이거저거 재며 욕심내는 그런 상황.
그 게 달갑지 않아 소개를 받아도 항상 결혼까지 가지 못했다.
'아니 다 변명이지.'
정말 사랑했다면 그런 면까지 감수하고 결혼했을 거다.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서 여성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남자는 그게 되는 동물이다.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건 그의 과거의 연애 경험으로 비춰 받을 때 지금 이 상황은 그린라이트임이 확실했다.
'신호를 주는데도 들이댈 수가 없네.'
눈에 훤히 보임에도 정호준은 그다음으로 넘어가질 못했다.
20년까지 산 경험 덕분에 생각이 조금 개방적이긴 하나 외향적이지 못한 성향에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정호준은 절친 앞에서 여자와 입을 맞추며 진도를 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에야 정호준보다도 연애 경험치가 적은 박기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축맥하며 대한민국 FC를 응원하고 대한민국 FC가 승리하면 그 기쁨을 만끽하며 2차를 가는 한국의 축구팬들처럼 호스텔 근처에 차를 세운 뒤 PUB으로 2차를 갔다.
거기서도 또 한 번 신호를 보냈지만 정호준은 다시 한번 그 신호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쟤들이 기태 녀석이랑 날 줘도 못 먹는 놈들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분명 그러리라.
*****
2004년 2월 21일 토요일.
처음으로 가고 싶은 곳이 갈렸다.
정호준은 기왕이면 애리조나주로 넘어가 그랜드 캐니언의 경관을 보길 원했다. 그랜드 캐니언이 있는 애리조나주로 가는 도중에 네바다주의 라스베가스에 들러 잠깐 구경도 하고 말이다. 거기까지가 정호준과 박기태가 머리를 맞대고(?) 계획한 큰 플랜이었다.
- 나는 실리콘밸리에 가고 싶어.
그런데 마리아는 샌프란시스코 더 정확히는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 대학교에 방문하길 희망했다. 월스트리트가 미국 금융가의 중심이자 심장이라 불린다면 실리콘밸리는 미국 IT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비록 브라질이 IT 산업과 관련해서 많이 뒤처진 상태라도 어쨌건 컴퓨터공학과에 재학 중인 마리아로선 그 어느 곳보다도 들르고 싶은 곳이었다.
둘 다 가면 되는 게 아니냐 물을 수 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LA에서 출발한다 가정하고 딴짓을 안 한다고 가정해도 버스를 타든 차를 이용하든 둘 다 왕복 16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귀국 비행기가 23일로 잡혀있었다.
선택지가 갈렸으면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는 일인데 여기서 한 가지 반전이 일어났기에 문제가 커진 거다.
- 마리아, 나는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해장 햄버거를 하나씩 손에 쥐며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 브론시아가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그랜드 캐니언 관광을 가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 견학은 한 명의 경제학도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선택지였지만 과가 컴퓨터공학과인 마리아만큼 간절하진 않았다. 게다가 화려하기로 유명한 라스베가스와 죽기 전에 꼭 한 번 봐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 그랜드 캐니언이 여행 장소로 더 매력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펙트였다.
- 우리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기로 했었잖아.
- 그때는 다른 대안이 없었잖아. 지금은 있고.
- 그래서. 그럼 나 혼자 가라고?
- 혼자 가긴 왜 혼자 가. 그냥 같이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면 되잖아.
즉흥적인 브라질리언 특유의 화법답게 브론시아의 대답은 필터링이 섞이지 않았다.
- 그랜드 캐니언은 다음에 네바다주나 애리조나주로 놀러 가서 가면 되는 거잖아! 캘리포니아주를 여행하기로 계획하고 온 거잖아. 틀려?!
마리아는 목소리를 높인 뒤 브론시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 물론 그렇게 계획하긴 했지만 계획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잖아?
'...'
브론시아를 보는 마리아의 시선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배신한 브루투스를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의 경악과 배신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마리아의 시선이 심상치 않은 걸 지켜보던 박기태는 마리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괜히 사이가 망가지리라고 생각하면서.
-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가 마리아랑 같이 실리콘밸리로 갈게요. 브론시아는 호준이랑 같이 가서 보고 오는 거로. 월요일에 아침에 LAX공항에서 다시 만나면 되는 거잖아요.
브론시아 대신 자신이 함께 가주겠다는 박기태의 말에 정호준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마리아 같은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면 되나?'
저들의 관계가 깨질까 봐 오지랖에 나선 건지, 아니면 마리아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나선 건지. 둘 중 뭐가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상황도 그렇고 박기태의 의도가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 상황도 웃겨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혼났다.
*****
마리아도 브론시아도 박기태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박기태는 10시 30분쯤 여권과 지갑 그리고 이틀 치 여벌 옷을 따로 배낭에 넣고 마리아와 함께 떠났다.
정호준도 체크아웃을 마치곤 브론시아를 태운 채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운전하는 정호준이 심심하지 않도록 브론시아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정호준도 운전하는 게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 몇 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 봐도 되요?
- 뭐가 궁금한데요? 혹시 내 쓰리 싸이즈?
브론시아가 웃으면서 던지는 장난기 가득한 질문에.
정호준도 능구렁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그것보단 다른 거요.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좀 실례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조심스럽네요.
- 쓰리 사이즈도 가르쳐준다 했는데, 그것보다 더 조심스러울 게 있나요?
- 호텔에서 머물러도 충분할 재력을 지닌 거 같은데, 왜 호스텔 같은 데서 머무는 거에요? 내가 호스텔을 폄하할 생각은 없는데. 어쨌건 호스텔 같은 이런 혼성 숙박소는 여자한텐 조금 위험하지 않나 해서요.
돈을 아껴야 하는 처지면 모르겠지만 마리아나 브론시아는 한푼 한푼 아껴야 할 정도로 돈이 아쉬워 보이진 않았다.
-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요. 나나 마리아나 주짓수부터 여러 호신술을 제대로 익혀서 평범하거나 운동을 게을리한 이들은 둘 셋이 달려들어도 제압할 수 있거든요. 만약 호준이나 기태가 욕망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우릴 덮쳤다면 큰코다쳤을 거예요.
- 그런가요? 안 그래서 다행이네요.
운동을 제대로 배웠다면 아무것도 안 배운 남자쯤은 여성의 몸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다. 실제로 작년에 여행에선 노골적으로 욕정 가득한 시선으로 훑어보다 종국엔 성추행을 시도하는 이가 있었다.
물론 그 남자의 손목을 꺾어버려 확실한 보복을 했지만 말이다.
- 그리고 호텔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예요. 이 미모에 이런 섹시한 몸을 가진 나를 남자들이 그냥 둘 것 같아요?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브론시아는 자신의 외모를 자찬하며 재치 있게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만약 기태 녀석이 중간에 중재를 안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정말 거기서 크게 한 판 싸울 거였나요?
- 어쨌든 기태가 나서줬으니 된 거 아닌가요?
- 일이 두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완벽하게 흘러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리아나 브론시아 뜻대로 돼서 다행이네요.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말하는 정호준의 말에 브론시아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잠깐 정호준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한다.
- 티가 많이 났나요?
여우같이 눈치를 보며 묻는 브론시아의 물음에 정호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아뇨. 둘 다 연기 좋던데요. 아마 기태 녀석은 정말 마리아랑 브론시아의 사이가 걱정돼서 그렇게 중재한 걸 거예요. 언제 진실을 이야기하려 했나요?
- 글쎄요, 언제 이야기했을까요?
이후에도 여러 사담을 나누며 이동했고 5시간을 운전한 뒤에야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도 거리는 눈부시고 화려한 네온사인들로 가득했다. 물론 사람도 바글바글했고.
- 숙소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네.
정호준의 중얼거림을 들은 브론시아는 내비게이션에 '베네시안 리조트 호텔 엔드 카지노'를 입력했다.
- 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자죠. 라스베가스에 왔는데 기분 좀 내요 우리. 오늘은 좀 느낌 있고 좋은 곳에서 자고 싶어요.
내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호텔은 잠깐이지만 속으로 탄식할 정도로 멋진 외관을 띄고 있었다.
자신이 미국에 있는 건지 유럽에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유럽의 성채가 바로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 오늘은 내가 낼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가요. 저분에게 키 주면 알아서 주차해줄 거예요. 우린 어서 방 잡죠.
트렁크에서 짐을 뺀 뒤 차키를 넘겼다.
황금으로 도금된 것 같은 기둥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황금빛 가득한 로비는 정호준이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게 했다.
- 네. 방은 하나면 되요. 스위트룸으로 주세요.
- 530불(609,500원)입니다.
'뭐, 잘못 들은 거겠지?'
가격도 방의 수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라서 깜짝 놀라 카운터를 쳐다봤다. 그런 호준과 달리 브론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건넸고 다시 한번 530불이 결제됐다 이야기했다.
브론시아의 손길에 이끌려 그렇게 방으로 이동했고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경관에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 집보다 큰 거 같은데?'
목동에 있던 그의 집을 훨씬 능가하는 크기,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인테리어로 정돈된 방을 보며 정호준은 가슴속에서 뭔가 타오르는 것을 인지했다.
'이래서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는 건가?'
성공해야 한다. 성공하겠다. 이런 소리를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