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정호준의 물음에 강현태는 잠깐 기억을 헤맸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되물었다.
"장희팔이라. 잘 모르는 이름이군요.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사람입니까?"
중요한 사람인가 싶어 정계, 재계, 법조계, 경찰, 군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윗줄이나 밑밑줄 인사들까지 떠올려봤지만 그중에 장희팔이란 이름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이만큼 궁리했는데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거다.
"혹시 평검사나 지방법원 판사인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내가 이제 막 임관했거나 1~2년 차에 불과한 병아리들까지 신경 써야 할 만큼 한가하다 생각하는 건가요?"
평검사, 지방법원의 판사는 공무원 급수로 치면 4급 공무원에 해당해 결코 낮다고 말할 수 없는 직위를 가졌고, 사람들에게 존경이나 어려움의 대상에 해당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언제나 상대적인 법. 경찰서와 검찰청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시민들과 달리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공무원으로 치면 1급 공무원까지 올라간 강현태에겐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햇병아리들이나 다름없었다.
괜한 말로 자신을 헛걸음 하게 한 거란 생각에 강현태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청담동에 위치한 음식점이 난방을 제대로 안 틀 리 없는데 정호준은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내려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갑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정치를 잘했든 능력이 뛰어났든, 배경이 좋았던, 아님 이 중 둘 혹은 셋 모두를 충족했든 강현태도 상류층 인사라 불리기에 충분한 남자다.
'역시 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그래도 다 한 가락 재주가 있다는 거네.'
정호준이 속으로 저 사람이 뛰어난 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거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건 그가 느끼기에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 갔다.
무거워져 만 가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정호준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정‧재계나 법조계, 군부 쪽 인물은 아닙니다."
"그럼?"
"평범한 민간인입니다. 아니 평범하진 않네요. 대한민국과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경제적 손실을 안겨줄 사람이니까요."
정호준의 이야기에 분위기는 좀 누그러졌지만 정호준을 보는 강현태의 시선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고 있냐고 말하고 있었다.
"저는 장희팔이 폰지사기(금융사기)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 생각합니다."
"증거가 있는 이야기겠죠?"
"예 물론입니다. 장희팔의 다단계 사업 내용은 이렇습니다. 의료기기 렌탈사업. 근데 의료기기라고 조금 고급스럽게 포장하긴 했지만 실상은 그냥 안마의자입니다. 투자자의 돈을 받아 안마의자를 구매하고 이를 찜질방, 미용실과 같이 대기시간이 필요한 곳에 빌려줘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을 분배하겠다는 거죠."
"정상적인 사업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듣기로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이는데요?"
상사를 두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처럼 발표하는 정호준에게 강현태가 질문했다.
"정상적인 회사가 법인을 여러 개로 나눌 리 있을까요? (주)첼린, (주)씨엔드씨, ㈜레브. 제가 파악한 건 크게 3개지만. 제가 확인을 못해서 그렇지 더 있을 거 같습니다."
대구와 경상북도에선 '첼린'이란 이름의 법인을 운영했고 부울경권에선 '씨엔드씨'란 이름의 법인, 서울시 및 충청남도에선 '레브'란 법인을 세워 활동했다. 이 법인들은 모두 어디에 속한 게 아닌 독립법인이었다.
"게다가 이 회사들은 투자자를 몇 명을 데려왔냐에 따라 월급을 지급하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습니다. 배당금과 함께 이들이 지급한다는 월급이 욕심난 이들이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죠."
장희팔이 벌인 다단계 사기는 정해진 날짜에 맞춰 정확한 금액을 매달 입금했다. 돈 계산만 하는 전산실을 따로 만들어 돈 계산을 철저히 했다. 덕분에 그가 잠적하기 전까지 돈 계산과 입금에 관련된 실수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당금을 받는 이들이나 월급과 배당금을 동시에 받는 이들이나 꼬박꼬박 돈이 입금되니 사기란 의심을 하지 못했다. 돌려받은 투자금과 받은 꼬박꼬박 챙겨 받은 배당금까지 합쳐 재투자를 감행했다.
직접 참여해본 사람들에겐 440만원을 투자해 8개월 만에 141만원을 버는 환상의 재테크로 보였기에 개중에는 빚까지 내서 투자를 감행한 이들도 있었다. 사기란 걸 모르고 봤을 때는 그들의 계산대로라면 은행 이자보다 의료기기 렌탈 사업을 통해 들어오는 돈이 더 많았으니까.
잘살아 보고 싶은 욕심, 좀 더 나은 형편의 삶을 살길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 폰지(금융)사기였다.
"조사를 꽤 많이 했네요? 혹시 정호준군에게도 투자하라고 찾아왔던 사람이 있었던 건가요?"
"예. 합의금이랑 보험금으로 얼마를 받았는지 그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투자를 권하더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돈이 벌린다고 막연하게 투자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니 최선을 다해 알아봤죠."
사실 정호준에게 다단계를 권유하러 온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정호준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자연스럽게 거짓을 이야기했다.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 이렇게 세세히 파고든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정호준에겐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마침 강현태가 거짓말을 할 판을 깔아주기도 했고 말이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진 않았네.'
강현태는 정호준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정호준이 뭘 해도 될 놈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을 이렇게 금방 증명해주어 흡족하달까?
"아무것도 모르는 저 같은 시민들은 윗분들이 다 끼리끼리 논다고 생각하죠. 인맥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고요."
"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죠."
"어린 제 소견이지만 이 일은 금융감독원과 검찰의 힘이 모두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변호사님이라면 금융감독원과 검찰에 직급이 높으신 분과도 친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 바라 보고 있는 강현태를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본 정호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치 욕심이 있으신 분들에겐 이 사태가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기 당할 뻔한 국민의 돈을 지키기 위해 검찰과 금융감독원에 문제를 제기한 변호사, 그리고 이를 가벼이 흘려듣지 않고 파고들어 국민의 돈을 지켜낸 검찰과 금융감독원."
잠깐 말을 끊으며 임펙트를 준 정호준은 준비해두었던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알고 계시는 기자들에게 정보를 뿌려 고생하신 것까지 홍보해 영웅담을 만들면 정부 기관부터 사건을 담당한 당사자들까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짜 사람을 보고 뽑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솔직한 말로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학력이나 경력은 거의 비슷했다.
행정 쪽에서 1~3급 공무원까지 갔거나 변호사, 판사, 검사와 같이 법조계 출신이던지 그도 아니면 외교관 출신이던지 말이다.
경력을 줄줄이 달아 놔도 사실 그들을 뽑는 국민의 입장에서 별로 와 닿지 않는다. 투표하는 사람들은 주로 '정권이 잘했는지 못 했는지'와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후보가 소속된 당'을 보고 투표한다.
언론을 통해 금융사기 사건이 알려지고 사건의 전말을 모두 국민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강현태는 확고한 지지층을 얻게 되리라.
"하아~. 참 대단하네요 호준군은."
자신이 볼 이득까지 모두 정리해 알려준 정호준의 말에 강현태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혹시 내 보좌관으로 활동해볼 생각 없나요? 나는 자꾸만 호준군이 놓치기 아쉬운 인재 같거든요.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내 옆에서 지낭(智囊)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대학에 입학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를 데려다가 어디다 쓰시려고요."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강현태는 옆에 있는 김철수를 의식하지 않고 미친 것처럼 웃어 댔다. 다 웃었는지 표정을 수습한 강현태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요? 나를 웃기려는 거면 성공했습니다. 난 호준군이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아서 무서운데 말이죠? 일단 내 제안에 대한 답은 거절인 것 같으니,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활동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니 조금 기다려야겠네요."
강현태의 말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중에게 어필을 하시려면 좀 더 기다리시는 게 좋겠죠. 일망타진해서 돈을 제 때 환수한다 해도 피해 금액이 커지면 커질수록 변호사님이 하신 일의 의미가 커질 테니까요."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데, 어떻게 내가 욕심이 안 나겠어요? 정말 내 보좌관 할 생각 없어요?"
정호준은 자꾸만 자신을 꼬시려는 강현태의 유혹을 무시하며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건넸다.
"전산실까지 만들어 철저하게 돈을 관리하는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어설프게 들쑤시면 바로 잠적할 겁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판이 커지면 정치권과 법조계를 매수할 테니까, 맞죠?"
"예, 맞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 자본금을 갖게 된 저들은 수사하는 이들의 시야를 가려줄 높은 직위를 지닌 이들을 매수할 겁니다. 그러면 수사 과정에 당연히 방해 들어오겠죠."
장희팔이 사망했다는 소문과 장례 영상이 퍼진 뒤로 검찰과 경찰, 두 기관 모두 장희팔의 행방을 찾겠다고 시끄럽게 군 적이 있다. 결과는 장희팔의 돈을 먹은 부패 검사와 부패 경찰만 밝혀졌다. 양측 기관으로서는 안 하느니만 못한 수사가 된 것.
"그리고 굳이 사서 힘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다"
강현태와 강현태가 움직일 사람들이 가진 힘과 장희팔이 매수한 사람의 힘이 비슷해도 거짓보단 진실이 강한 힘을 갖고 있기에 사건을 해결할 순 있으리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패배한 이가 아무 감정 없이 상황을 넘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가장 최선은 적을 만들지 않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적을 만들게 되면 반드시 파멸시켜야 하고.'
강현태를 설득한 정호준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제삼자처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김철수를 보며 말했다.
"김철수씨께서도 강현태 변호사님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실 돈으로 기름칠을 해서 과정을 매끄럽게 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돈이 일하기 시작하면 분명 과정이 더 깔끔해질 테니까. 하지만 차마 그 말까지는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얻는 것 없이 돈만 쓰라는 거였으니까. 김철수가 도울 생각이면 굳이 정호준이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강현태 변호사가 자금을 요청할 때 도와주리라.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습니다. 5월이나 6월쯤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두겠습니다."
만남이라도 갖는 게 중요해 차선을 선택했는데 강현태가 알아서 최선의 선택을 찾았다. 정호준이 다시 한번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인사하고 나가려는 정호준을 강현태가 불러 세웠다.
"정호준군 오늘 일은 빚으로 달아둬요. 갚을 일이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요."
정호준이 가져온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로 국회로 가는 지름길을 열게 될 강현태와 달리 정호준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말 그대로 강현태를 도와주기 위해 움직인 거다.
'계산이 정확해야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거지.'
강현태는 확실히 느꼈다.
눈앞의 핏덩이는 큰 성공을 거둘 거다.
강현태는 정호준과의 관계를 오래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관계를 오래 이어가려면 강현태 또한 정호준에게 도움 줘야 한다.
그래서 이름 적힌 백지 수표를 날리듯 반드시 도움을 주겠다고 확언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