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
하아~
집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크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보는 사람이 일절 없는 자신만의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의 끈이 풀렸다.
피로가 몰려온다.
스르륵!
다리에 힘이 풀린 정호준은 방문 옆의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준비해뒀던 말 다 한 거 맞지? 제대로 조리 있게 이야기했겠지?'
정호준은 강현태와 김철수를 만나기 전에 상사나 바이어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진행하는 직장인처럼 미리 대본을 짜 놓고 수십 번을 읽어 암기한 뒤 말하는 연습을 했었다.
"원하던 결과를 이끌어냈고 강현태 변호사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잘한 게 맞겠지."
강현태가 자신의 보좌관으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걸 생각하면 못하진 않았으리라. 그리고 못 했다 한들 이제 와 어쩌겠는가. 이미 끝난 일인데.
'장희팔과 관련해서는 이제 크게 신경 쓸 필요 없겠지?'
강현태는 똑똑한 사람이다. 조심해야 할 점을 이야기해뒀으니 굳이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리라.
이제는 다시 본인의 일에 집중할 때였다.
"어디 있지? 옛날에 한 번 물건 정리하면서 본 적 있었던 거 같은데? 어디였더라?"
색다른 경험을 위해 여행 가는 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여유 자금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돈을 소비할 생각이 없었던 정호준은 집안을 뒤졌다.
"아, 찾았다. 여기 있었네."
정호준은 안방을 한참이나 뒤진 끝에 시대에 아주 뒤떨어진 듯한 디자인의 캐리어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근데 막상 찾고 나니 괜한 생각이 들었다.
"시대에 많이 뒤떨어지긴 했네. 올드해도 너무 올드한데?"
알류미늄인지 철인지, 플라스틱인지 제대로 구별이 안 되는 재질에 단조로운 검은색 색을 입힌 곡선이나 문양이라곤 없는 사각형의 캐리어 가방.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알록달록하던 미래의 캐리어 가방을 봐왔던 정호준이 보기에 너무 낡고 촌스러워 보였다.
사용하는 것 자체가 껄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화장실에 들어갈 때랑 나갈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고 막상 부모님이 신혼여행 갔을 때 썼을 게 분명해 보이는 디자인의 공항 캐리어는 정호준에게 자꾸만 충동 구매를 속삭이는 듯했다.
"안 돼 이러지 말자."
자꾸만 이거 하나 더 산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피어났기에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짐을 싸기 위해 움직였다. 캐리어 안을 짐으로 꽉꽉 채워 놓으면 최소한 짐을 다시 싸기 귀찮아서라도 쓰리라.
하나라도 더 많이 넣기 위해 캐리어를 열고 차곡차곡 개진 옷들을 하나하나 깔끔하게 정리해서 욱여넣었다. 욱여넣는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군장 싸 본 사람은 다 알다시피 아무리 각을 열심히 잡고 짐을 싼다 해도 결국 마지막엔 힘으로 꾸역꾸역 집어 넣는 거다.
군장 만큼은 아니지만 캐리어 가방에 짐을 싸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1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끝에 정호준과 박기태가 탑승한 비행기는 시애틀 터코마 국제공항(영어: Seattle Tacoma International Airport)에 착륙했다.
"호준아 도착했어, 일어나!"
"알아. 일어났어."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을 몇 번이나 틀고 있는데 잠이 계속 올 리가 없다. 침대에서 자고 있으면 또 모르지만.
'이코노미석은 불편하다던데, 딱히 그런 건 못 느끼겠네.'
신입이나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부하 직원들로부터 '이코노미석은 불편하다.'란 소리를 들어왔던 정호준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역시 모든 일은 겪어봐야 아는 거지 남들의 말만 듣고는 모른다.
'아니면 이때랑 2010년 이후랑은 다른 건가?'
한 사람이라도 더 탑승객을 태우려고 좌석 시트를 바꿨는지까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정호준은 별다른 불편함 없이 편히 왔다. 물론 오래 앉아 있었던 만큼 몸이 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렸을 뿐임에도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박기태는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그만 좀 두리번거려. 이러다 우리가 꼴찌로 입국 심사 받겠다."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린 여기서 3시간은 기다려야 하잖아. 천천히 둘러보자."
두리번거리며 걷느라 속도가 안 나는 박기태와 달리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다른 승객들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뒷좌석에 앉은 터라 비행기에서 내린 것도 거의 막바지에 내렸는데 걷는 것조차 느지막이 걷는다.
그들이 탑승했던 비행기에선 그들이 가장 꼴찌로 입국심사 절차를 밟으리라. 그 말은 즉 또 기다림의 시간이 길다는 말이다.
정호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박기태는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잖아. 우리는 분명 18일 오후 4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거의 12시간을 날아왔는데, 여기는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어. 이거 나만 신기한 거야?"
서울의 시간은 시애틀에서 통용되는 시간보다 약 17시간이 빠르다. 한국이었다면 19일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어야 할 시곗바늘이 이곳에선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해가 쨍쨍한 것도 그렇고 말이다.
박기태도 시차가 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이론으로만 알고 있는 거와 직접 체감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박기태의 되물음에 답하는 정호준의 대답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래 너만 신기해."
"거짓말 마. 너도 신기하잖아."
"그렇게 남들 보기 부끄럽게 와 신기하다 하며 구경할 정도는 아니지. 그냥 '이런 거구나'하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거잖아."
"냉정하기는."
"니가 너무 쓸데없이 감성적인 거야."
자고 일어난 직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민할 타이밍이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그냥 웃으면서 받아 주지를 못했다. 잠깐 예민하게 군 정도로 기분 나쁘거나 흔들릴 우정은 아니었고 타이밍이 좋지 않음을 박기태도 인지했기에 알아서 기었다.
"넌 안 까다로웠어? 난 심사관이 물어보는데 완전 얼어서 제대로 못 알아 들었다니깐.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박기태가 수능에서 받은 영어 등급은 2등급. 결코 영어를 못한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회화에 신경 쓰지 않고 독해, 문법, 듣기 만을 중시하는 한국 고교 교육 과정의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나도 조금 어렵더라. 문법이나 발음을 맞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입국 심사장의 직원하고 대화하고 나온 정호준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박기태에게 살갑게 대답했다.
자신이 예민하게 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과는 하지 않더라도 태도로 보인 것.
"그치? 지금껏 배운 게 쓸모없게 느껴졌다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박기태의 헛소리는 컷했지만 말이다.
*****
비행기 환승의 경우 본인이 들고 탄 수화물이 아닌 이상 항공사 쪽에서 알아서 수화물을 옮겨준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과 박기태의 짐은 등 뒤로 메고 있는 가방 딱 하나뿐이었다.
박기태의 말마따나 비행기를 타면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기에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온 정호준과 박기태는 공항을 구경했다.
공항을 돌며 VIP고객 전용 라운지를 제외하고 구경을 마쳤다.
"이것도 재미인데 같이 하자. 응? 응?"
구경할 것을 다 구경한 박기태는 박기태는 복권 판매한다고 적힌 매점을 가리키며 같이 해보자고 졸랐고 정호준은 거절할까 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메가밀리언 복권을 1장 구매해 국제면허증을 꺼내 그 사이에 끼웠다.
어느덧 비행기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LAX공항으로 향하는 항공기에 탑승했다.
*****
LAX 공항에서도 입국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은 정호준은 공항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뭔가를 찾으며 돌아다니자 호준의 뒤를 따라나서던 박기태가 물었다.
"뭐야, 안 나가? 우리도 빨리 택시를 잡든 버스를 타든 해야지. 아까는 서두르더니? 나 뭐 타야 하는지 알아둔 거 있어. 모르면 날 따라오도록."
오랜만에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듯 기세등등하게 나서는 박기태에게 정호준은 다시 한 번 핀잔을 주었다.
"그때그때 버스 타고 다니려면, 참 알아볼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겠다. 그치?"
LA를 무슨 한국의 서울처럼 생각하는 박기태의 말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은 잘 사는 나라답게 대한민국보다 GDP도 높고 노동자의 최저 임금 평균치도 훨씬 높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런 미국보다 자국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교통 수단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교통 시설이 참 잘 되어있었다. 대한민국은 국토의 면적 자체가 미국처럼 크지 않아 길과 교통 수단들이 거미줄처럼 꼼꼼하게 얽혀있다.
차가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가는 것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달랐다. 차가 없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목적지까지 갈 수는 있지만 1시간이 차이 나는 건 기본이고 경우에 따라선 수 시간의 차이가 생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시간 낭비를 할 게 아니라면 미국 관광에 차량을 렌트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 새끼는 대체 전에 어떻게 성공했던 거지?'
성공한 사람은 하나를 준비해도 철저해야 준비해 남들과 다른 특별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준비를 안 한 건 아닌데 하나부터 열까지 2% 부족한, 아닌 많이 어설프게 준비된 박기태의 모습에 정호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가 아니야. LA가 속해 있는 주 하나가 우리나라보다 커. 버스나 전철 타고 다니면서 언제 다 구경하겠냐. 여기서 차 렌트 할 거야. 알아보니까 공항 내부에 차 렌트하는 곳이 있다더라."
여권 발급신청부터 티켓팅까지 한꺼번에 후딱 해치운 다음 날인 2월 10일.
정호준은 도로교통공단 강서운전면허시험장에 운전면허증과 증명사진을 들고 직접 찾아가 영문 면허증과 국제 면허증을 동시에 발급 신청했다.
'혹시 모르니까 둘 다 준비해두는 게 낫지.'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다는 걸 주워들은 적이 있어서 정호준은 기왕 하는 거 철저하게 준비했다. 둘 중 하나라도 써먹을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둘이서 대중교통을 이것저것 이용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렌트하는 값이랑 큰 차이 없다더라."
"그래?"
정호준은 박기태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서도 주변의 공항 관계자로 보이는 금발의 라틴계로 보이는 스튜어디스를 붙잡고 물었다.
- 공항 내부에 자동차를 렌트해주는 업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딘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호준의 질문에 스튜어디스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 친절히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즐거운 관광 되기를!
정호준은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미모의 스튜어디스 또한 웃으면서 떠나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박기태는 정호준을 보며 말했다.
"야, 호준아 너 되게 달라 보인다."
"뭐가?"
"영어가 자연스러운 것도 그렇고, 저런 예쁜 스튜어디스랑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그렇고. 뭔가 멋진데?"
"원래 난 지적이고 멋졌어."
"솔직히 생긴 건 내가 더 낫지."
"시끄럽고 빨리 따라와."
박기태가 자신보다 인물이 나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정호준은 자뻑으로 이어지려는 박기태를 데리고 설명 받은 대로 움직였다.
차를 렌트해 주는 곳에 도착한 정호준은 여권과 국제면허증, 영문면허증 세 개를 모두 꺼내 보여주며 차를 렌트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 언제까지 렌트하실 건가요?
- 23일, 5박 6일간 렌트해 사용하겠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설치되어 있는 '가야 자동차'의 쏘렌트를 렌트했다. 차량 임대차 계약서 작성을 마친 정호준은 차키를 수령 받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동차가 세워진 곳까지 이동했다.
"일단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어떻게 움직일지 정하자."
정호준은 차 트렁크에 자신과 박기태의 캐리어 가방을 집어넣었고, 내비게이션 목적지인 'Boutique Hostel'을 입력해 내비의 안내에 따라 운전했다.
"너 운전 처음 하는 거 아니었어? 나랑 같이 가서 면허 땄으면서 왜 이렇게 안정적이야?"
"운전에 재능이 있었나 보지."
회귀 전 스물여덟에 차를 사서 운전했기에 운전경력이 최소 7년은 넘었다. 운전이 자연스러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박기태가 보기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운전면허를 땄음에도 운전이 능숙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정호준은 대충 얼버무렸고, 좋은 게 좋은 거인 박기태의 성격상 굳이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운전 초보인 거 알면서 내 차를 탄 거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친구가 자신을 얼마 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운전면허를 막 땄을 때 함께 차를 타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말을 지금 상황에 대입해 보면.
'별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죽음을 각오한 우정인 거야?'
박기태의 맹목적인 우정이 부담스럽고 닭살 돋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