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
정호준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나선 박기태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띠띠띠띡! 찰칵!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선 박기태의 시선에 그의 부친이 보였다.
박기태는 그의 부친 박남정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하곤 웃으면서 물었다.
"일찍 들어왔네? 아빠 촬영 시작했다 하지 않았어?"
박기태의 부친 박남정은 영화업계에서 종사했다. 더 정확히는 업계 거장들의 부름을 받아 촬영팀에서 조명감독, 혹은 연출을 맡았다. 간혹 둘 모두를 맡을 때도 있었고 말이다.
영화업계에 종사하며 감독이란 타이틀을 가진 이들 대다수가 집안 가산을 탕진하더라도 제 작품, 자기 영화를 찍으려고 욕심내는 걸 생각하면 박남정은 특이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실제로 박남정은 관계자들로부터 종종 별종이라 불렸다. 물론 박남정의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박남정이 없는 자리에서 별종이라 불린다지만 성격 좋고, 술 잘 마시고, 기대치를 100% 충족시키는 실력까지 있다 보니 박남정을 팀에 넣고 작업하려는 감독들은 많았다. 덕분에 박남정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절친 아들내민데, 이번에 독립영화를 들어간다네?! 부탁 좀 하지. 자네가 옆에서 좀 도와주게. 자네 비싼 몸이라고 돈은 충분히 지급하라 일러뒀네."
이름 있는 감독들에게 부름을 받거나 혹은 거장들이 자기 작품 하려는 친한 지인(후배)을 소개해주며 도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인맥으로 얽히고 얽힌 게 이 세상이었으며 돕고 도우면서 살아가는 게 세상사였기에 박남정은 정말 안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부탁을 들어주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찍은 감독처럼 한 번에 큰 돈을 벌거나 연예계와 세간으로부터 영화감독으로써 명성을 얻진 못했지만, 벌이만 놓고 보면 남부러울 것 없을 정도로 잘 벌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간 건 아니라서. 그나저나 호준이는 좀 어떻디?"
"다행히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아."
"그러냐?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네."
정호준이 수능을 코앞에 두고 교통사고로 양친과 사별했다면 박남정은 아들 박기태가 11살이 됐을 무렵 아내와 사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를 잃어버린 그의 아들 박기태는 박남정이 일에 치여 잘 챙겨주지 못했음에도 정 많고 착하고 외향적으로 잘 자랐다.
'공부를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다.
자기 일에 치여서 자식을 제대로 돌 볼 여유도 없는 그가 무슨 자격으로 더 바라겠는가?
부모 욕심을 생각하면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지만 다른 집안처럼 하나하나 신경 써주지도 못하면서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건 이기적인 욕심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참았다.
박기태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박남정은 조심스럽게 박기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좀 괜찮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쯤 본 적 있을 거다.
엄마 없는 애라고 같이 놀지 말라 자식을 다그치는 극성 엄마들의 모습을.
극적 전개를 위한 빌드업. 과장되게 표현한 씬들이지만 현실은 종종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일 때가 있다.
연예계에서 일하면서 남들이 오냐오냐 띄워주는 바람에 제멋대로 행동하며 상식 밖의 행동을 벌이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한 바 있는 박남정이었기에 아들의 절친인 정호준과 정호준의 모친, 강혜순은 그에게 고마운 이였다.
"학원 가기 전에 호준이랑 같이 밥 먹고 가렴."
정호준은 박기태가 모친과 사별했음을 안 뒤에도 이전과 변함없는 시선과 태도로 대했고, 강혜순은 아들인 정호준이 박기태와 어울리는 걸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박기태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마음을 썼다. 그리고 마음 쓰면서도 박기태가 동정심이나 측은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며 챙겨주었다.
"기태 녀석에게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서 이렇게 연락을 드리네요.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드십시오."
박남정은 자신이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자식을 챙겨주는 강혜순의 선의에 보답하고자 명절날에 선물을 보냈다. 그랬더니 정호준의 집에서도 아들인 박기태 편으로 선물을 보내왔다. 덕분에 업무상 별다른 접점이 없음에도 명절날마다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배고플 때 간식이라도 사 먹어라."
그 때문에 박남정은 집에 놀러 온 정호준을 보게 되면 종종 지갑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쥐여 주며 용돈을 주곤 했다. 돈 욕심이 날 만도 한데 괜찮다고 거절하는 걸 쥐여 주느라 애쓰긴 했지만 말이다.
90년대의 배춧잎 5장은 2000년대, 2010년대의 배춧잎과는 의미가 달랐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대기업 신입사원 초봉이 100만 원이 채 안 됐다는 걸 고려하면 박남정이 혈육도 아닌 정호준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건네준 배추 잎 다섯 장은 정말 큰 돈이었다.
"슬프지. 슬프긴 한데, 호준이도 괜찮아지려고 노력하잖아. 그런데, 내가 뭐라고 슬픔에 잠겨 있겠어?"
"가족이 아니면 슬퍼해선 안 된다고 누가 법으로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말하고 그래? 슬퍼할 수도 있는 거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기태가 좋은 감정을 품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엄마처럼 여겼을 수도 있지.'
정호준과 같은 반이 되어 친구가 된 12살부터 약 올해에 이르기까지 약 8년에 걸쳐 강혜순은 박기태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도 박기태가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하면서 말이다. 강혜순에게 죽은 아내를 투영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조심스러워하는 부친 박남정을 보며 박기태는 장난기 섞인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설마, 내가 신경 쓰여서 일 안 나간 거야?"
"무슨! 아직 촬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시간 나서 있는 거야. 이제 정말 바빠질 것 같은데 그 전에 밥이나 먹으려고."
아닌 척하는 부친의 행동에 박기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니라니까!!"
피식 웃는 아들의 모습에 박남정이 소리쳤다.
"누가 뭐라 했나?"
*****
'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인간에겐 최소 세 번의 기회는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그중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탄생 자체를 한 번의 기회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어떤 탯줄을 잡고 태어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
우스갯소리긴 했으나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이아몬드 수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구분하던 미래를 생각하면.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탯줄을 잘 잡고 태어난 게 첫 번째 기회라면 두 번째 기회는 바로 대학입시를 가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었다.
좋은 대학에 나왔다고 떵떵거리며 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나왔는지에 따라 추후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의 수준이 변하고, 받는 월급이 달라지며 승진의 기회와 주변의 인맥이, 인생이 달라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수능이란 단어가 더 익숙한 이 시험은 중간에 정신 차리고 따라붙은 이들이 아니라면 유치원 때부터 준비를 시작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최소 14년 이상의 세월을 투자하게 만드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전생의 정호준은 생후 20년 동안 벌어진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이벤트라 불리는 수능시험을 제 실력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정호준에게도 변명 거리는 있었다.
수능이 한 달도 채 안 남은 상태에서 부모님 두 분 모두를 교통사고로 잃는 큰 사건을 겪었는데 19살 먹은 아직 채 성인이 되지도 못했던 그가 제대로 멘탈을 부여잡고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아니 나이를 떠나 그런 불행에 초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닌 초인이었다.
정호준은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고, 이 세상은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은 정호준이 절망스러운 경험을 수능 직전에 겪었다고 해서 이해하고 배려해줄 만큼 사려 깊고 따듯하지 않았다.
전생의 정호준은 국영수는 물론이고 탐구과목에서까지 3년 동안 꾸준히 치러온 모의고사 성적만도 못한 점수를 받았다. 그나마 선방한 과목은 본래의 성적보다 2등급이 떨어졌고, 심하게 망친 과목은 4등급까지도 떨어졌다.
탈선 없이 고등학교 내신 성적을 꾸준히 관리해온 3년이란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내신 덕에 가까스로 서울에 연고를 둔 대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사람들로부터 명문이라 평가 받는 상위권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수능을 치른 2003년은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기 전이라 수능 점수의 변별력이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이후보다 훨씬 강력했다.
보통 회귀 전의 정호준 정도로 망했으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업이나 사람들이 학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사회생활을 통해 체감하고 있는 부모가 먼저 재수라는 선택지를 권한다. 정호준처럼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회귀 전의 그에겐 재수를 권해줄 부모가 죽고 없었다.
게다가.
'미래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지.'
겨울인 탓도 있겠지만, 부모님의 부재로 사람 사는 온기나 인기척이 전혀 없던 터라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집이 더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집안 곳곳에선 쌀쌀함이 가득했다.
매번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빈집의 한기는 정호준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끼게 했다. 갑작스레 닥친 시련과 연이어 이어지는 사건사고(?)들 때문에 따로 유품을 정리할 시간을 낼 틈이 없어 부모님의 자취가 집 구석구석에 남아 있어 상실감과 그리움도 컸다.
이런 환경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성장하는 양분이 되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마따나 부모님의 흔적은 느껴지는데 역설적으로 빈자리를 체감할 때면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그 때문에 전생의 정호준은 미래를 생각해 재수를 선택하기보단 합격한 대학교에 등록금을 납부해 학부 등록을 마치곤 곧장 군 휴학계를 내고 군대로 도망쳤었다.
'수능도 수능이지만, 나 군대 가야 하네.'
과거 회상을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징집할 땐 국가의 아들, 대한의 건아지만 다치면 남의 아들이 되는 곳, 몸 건강히 태어난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다녀와야 하는 곳.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군대에 두 번 갈 순 없지. 안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군역의 의무를 끝마치고 무사히 전역해 사회에 나온 한국의 성인 남성들은 종종 군대를 한 번쯤 다녀올 만한 곳이라 말한다.
회사처럼 계급이 존재하는 군대는 추후 그들이 수십 년 간 하게 될 사회생활이란 정글을 미리 경험한 거라 여기기도 했다. 군 생활을 이어가면서 눈치가 늘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깨닫게 되며 단체 생활에 필요한 인내심을 키우며 철이 들곤 했으니까.
그에 더해 군대는 이런 정신적인 성장 외에도 체력과 건강을 증진시켜주며 친구를 만나던 군대 동기를 만나던, 상사와 이야기하던, 그 대상이 여자친구나 이성 친구만 아니라면 나고 자란 환경이 다름에도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감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위에 나열한 장점들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얻는 게 있어 한 번쯤 다녀올 만하다 말하지만, 그 말이 결코 군 생활을 두 번 해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 중에 어느 누가 군대를 두 번 다녀와도 괜찮다 여기겠는가?
정호준 또한 군대에 두 번 가고 싶진 않은 한 명의 평범한 남성이었다.
'절대 다시 군에 끌려가고 싶지 않다. 절대로'
군대란 곳이 한 번쯤 다녀올 만한 곳이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빠질 수 있다면 빠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란 걸 전역 후 사회생활을 이어가며 종종 만난 신의 아들들을 통해 경험했다.
게다가 새파랗게 어린(?)것들에게 무시 받거나 하대 받고, 이유 없이 갈굼 받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
수능을 망쳐 대학입시에 실패했던 과거를 바꿔보기로 결심했고 이런저런 인생 계획을 세웠지만...
세상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란 걸 떠올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책상에 앉아 정리해둔 오답 노트를 읽자마자 새로운 장애물이 앞을 막았다.
언어나 영어, 사회탐구 과목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공부한 기억이 없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했던 게 국어, 영어, 역사, 경제, 법 등이었으니까.
결혼하지 않아 책임질 가정이 없는 30대 중후반의 남성, 운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남성이 즐길만한 취미는 역사나 군사력과 같은 전문적인 요소가 들어간 마니아적인 것들과 전문 요소가 섞여 있는 미국 드라마 시청, 낚시, 골프 등이다.
회귀 전의 정호준은 그러한 일반화에 딱 들어맞은 유형의 인간이었고 그 덕에 언어, 영어, 탐구 과목은 물론이고 제2외국어 과목까지도 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다름 아닌 수학. 즉 수리 영역이었다.
수학과나 사범대에 들어가지 않는 한 대학입시에 성공한 뒤로 사용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게 수리란 과목이다. 특히 이과가 아닌 문과를 선택해 수험을 준비했던 호준이었기에 졸업한 뒤론 수학 공식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공식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풀이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미치겠다 진짜."
굳게 다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발생한 장애물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탄식하며 내뱉는 정호준의 중얼거림이 텅 빈 집안에 메아리친다.
상을 무사히 마친 정호준에게 수험 전까지 남은 시간은 3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수리만 죽어라 파자.'
짧은 시간이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 게다가 짧은 시간이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효과는 천차만별인 법. 정호준은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궁리 끝에 최선의 계획을 세운 정호준은 할 수 있는 최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