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투명한 잔에 술이 차오르자 백매도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청난이 슬쩍 백매를 엿보았다. 다행히 어떠한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청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구온춘주가 담긴 술잔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구온춘주는 곧바로 백매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청난은 그 모습을 마냥 지켜보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네 입맛에 맞느냐?”
“네, 매우 잘 맞습니다.”
“네가 이리 좋아하니 준비한 보람이 있구나.”
달달한 술 향 때문일까, 제 앞의 반려가 어여쁜 탓일까. 청난은 이유 모르게 흥에 취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백매가 오기 전부터 놓여 있던 찻주전자를 들어 빈 잔을 쭈룩 채우더니, 찻잔을 높게 들어 달 앞에 비춰 보이고 한입에 털어 마셨다. 잔 속에 든 것이 차가 아닌 술이고, 이곳이 한적한 방 안이 아닌 연회장 같은 떠들썩한 곳이었더라면 청난은 이 모습으로 호탕한 사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청난,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그렇단다. 이토록 한적한 곳에서 내 어여쁜 반려자와 아름다운 달을 보며 차를 나누고 있지 않느냐. 어찌 기쁘지 않겠어.”
“저 또한 그렇습니다. 꿈에서나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광경이 이리 제 앞에 펼쳐져 있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사실 아직도 허상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나 또한 허상 같느냐?”
백매가 천천히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럼 날 믿으면 되겠구나. 허상이 아니야. 허상이어선 안 되지. 그럼 참으로 아까울 것이야.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생을 살아왔는데, 최근에서야 ‘나의’ 삶을 찾은 것 같거든.”
청난은 자신의 찻잔을 한 번 더 채웠다. 이번에는 마시지 않고 손에서 빙글 돌리며 얕게 찰랑이는 물결을 감상하였다.
“수야각원들은 날 각주라 불렀고, 진가장에서는 도련님이라 불렸었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근수사라 추켜세워 주기도 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꽤나 듣기 좋은 말들인 건 분명하지.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만큼 살아 있다는 감각을 열렬히 느낀 적이 없어. 어째서일까. 하하하.”
마지막 물음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타인이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청난이 또다시 빈 찻잔을 채우려고 했을 때, 백매가 대답하였다.
“그건 청난의 이름이 아니었으니까요.”
“으음?”
자신도 모르게 뱉은 소리인지 백매는 뒤늦게 제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청난의 두 눈동자가 하염없이 대답을 기다리자 그는 손을 내리고 차근차근 대답했다.
“사실……. 저는 청난이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마치……. 그 호칭에 자신을 맞추려는 것 같았거든요.”
“그랬어? 난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떤 점이 그렇게 보이던?”
“예를 들면……. 아침잠이 많으시면서 졸음을 견디고 굳이 남들보다 일찍 기상하신다거나, 단 음식을 즐기시면서 주로 드시는 건 쓴 채소라든가 하는 점들이요.”
청난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참, 다 들켜 버렸구나.”
“청난은 제게는 숨기지 않으셨잖아요.”
“그랬지. 너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네게 숨길 수 있었겠어?”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금빛의 두 눈동자는 너무나 올곧아서 청난은 제 감정을 숨기려 지었던 웃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를 내린 청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매는 그런 제 연인의 손등에 사뿐히 손을 올렸다.
“당신에겐 그런 허울은 필요 없어요.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이 무어라 불리든, 어디에 있든 제게 있어 당신은 늘 하늘이시니까요.”
“……맞다. 네 말이 맞아. 그런 건 전혀 필요하지 않아. 내게 필요한 건… 오직 너뿐이야.”
청난의 상체가 절로 기울었고, 그에 따라 두 명의 입술 또한 점차 가까워졌다. 청난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백매의 얇은 머리카락이 청난의 뺨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청난의 예상과 달리 백매의 뜨거움이 느껴진 곳은 그의 입술이 아닌 목이었다.
백매는 청난의 목과 어깨에 제 고개를 기대고 그를 큰 품으로 안았다.
“…….”
청난은 저 혼자 ‘그런’ 기대감에 찼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민망해졌다. 백매와 껴안느라 양손이 바쁜 게 아니었더라면 청난은 바쁘게 손부채질을 하며 이 열기를 떨쳐 내려 했을 것이다.
‘뭐, 이것도 좋지.’
청난은 저의 고개 또한 그에게 살포시 기대고는 손목을 흔들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난의 눈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백매의 양손이 가늘게 떨고 있는 건 보지 못했다.
햇살은 따사로웠으며, 바람은 선군의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남녀노소 누구나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이렇게 화창한 날씨와 달리 청난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오늘도 수야각 장로들을 떼어 놓고 해류진군 신상 앞에 온 청난은 신상 맞은편 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야각 장로들은 이 시대 몇 안 남은 수계 수사 중 손꼽히는 실력자들이기에 청난의 실력으로 그들을 감쪽같이 떼어 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청난이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그들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에게 백매의 이름은 무겁고 고상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겠지.’
청난은 제 제자의 영향력이 큰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고민을 안은 채로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면 아무리 청난이라도 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이 나이 먹고 처음 해 보는 고민이 생길 줄은 몰랐지…….’
청난은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머, 난아! 그러다간 주름 생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오늘도 어김없이 꽃을 한가득 품은 녕녕이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청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언제 왔어요?”
“네가 털썩 앉아서 모래 개수를 세고 있을 때부터?”
“하하하……. 오늘은 분홍 꽃들이네요.”
“응, 이게 제철이거든. 이 시기에 많이 팔아야 해.”
녕녕의 입이 청난과 재잘거릴 동안 그녀의 손발은 바쁘게 신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꽃을 장식했다. 녕녕은 아침에서 점심 무렵에 신당을 장식하고 오후에 다시 와서 꽃들을 회수했다. 그렇게 몇 시진 동안 신당을 꾸미며 많은 신도들 눈에 들었던 꽃들은 녕녕의 가판대에 올라와 빠른 시간 내로 팔려 나갔다.
이건 녕녕이 생각해 낸 것이었다. 신당에 찾아온 이들은 녕녕의 꽃으로 꾸며진 미관에 만족했고, 녕녕은 많은 사람들에게 꽃을 소개할 수 있었으니,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탁월한 장사 방법이었다.
‘만약 녕 누나의 인품이 좋지 않았더라면 신당을 이용한다고 항의받았겠지만, 이 마을에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모두가 만족하는 것이지. 대단한 사람이야.’
그녀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청난의 우중충했던 낯은 한결 나아졌다.
신상 주변을 다 장식한 녕녕은 오늘도 청난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오늘도 그 개 때문이야?”
“으음, 네, 맞아요.”
“안 통했구나?”
“하하하…….”
“간식도 준 거지?”
“식탐이 없어서 그나마 좋아하는 걸 줬어요.”
“식탐이 없어? 독특한 개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청난은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목 너머로 꾹 삼켰다. 홀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아 녕녕은 지금까지 만났던 개들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거짓말을 이토록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어 주다니, 청난은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녕녕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으럼 산책…은?”
“매일 하고 있어요.”
“그것 참 어렵네.”
“그렇네요…….”
청난과 녕녕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녕녕이 번뜩이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럼 이건 어때? 못된 개가 나타났을 때 네가 지켜 주는 거야!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처럼!”
“음……. 아주 좋은 생각이지만……. 그 개가 저보다 더 강해요.”
녕녕은 청난을 잠깐 동안 빤히 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겠네. 완전 무리였어~.”
“…….”
청난은 녕녕이 자신을 열한 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무리라뇨. 그 아이가 강한 거지, 평범한 개들은…….”
“못 이기잖아?”
“…….”
그렇다. 못 이긴다.
차라리 군대를 지휘하여 적군을 물리치는 게 더 쉬울 것이었다.
“너무 걱정 마. 선사님이 다 지켜 주실 거 아냐?”
“하하하…….”
청난은 웃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이 고민이 그 선사 때문인걸요!
청난과 녕녕이 잡다한 대화를 이어 나갈 동안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바로 수야각의 세 어르신인 각주, 호법장로, 의약당주였다.
그들 중 한 명은 여관의 창가에서, 다른 한 명은 나무 위에서, 또 다른 한 명은 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신당 안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음은 물론이고 서로와의 거리도 멀었으나, 그들의 눈은 신당 안을 비추었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서로의 귓가에 울렸다.
그것은 몇 달 전 청난이 알려 주었던 소실된 수야각 술법 중 하나였다. 만약 이것을 청난이 본다면 자신을 감시하는 데에 쓰라고 알려 준 게 아니라면서 서글퍼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