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태상장로께서 고민이 있어 뵈지?
-그렇고말고!
청난은 장로직을 거절했으나, 그를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여전한 미련을 담아 수야각 제자들은 청난을 본인 몰래 그렇게 칭하고 있었다.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도움이 되겠나?
-우리가 산 날이 몇인데 도움이 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시게나.
-태상장로께서도 나이가 지긋하지 않으신가.
-…….
-그……. 그랬지, 참.
그랬다. 청난의 전생을 합한다면 그 또한 적어도 쉰두 살은 되었다. 이는 수야각 장로들의 평균 나이와 엇비슷했다. 청난의 외관이 젊고 수려하니 누가 그를 보며 중장년의 나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들이 종종 까먹고 마는 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방금 전 나이를 지적했던 의약당주의 말이 또다시 이어졌다.
-더구나 더 지긋하신 백매선께서 곁에 계시지.
-그렇지. 우리 나이를 다 합쳐도 그분에게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지.
-끄으으응…….
침묵의 시간은 또다시 이어졌다. 그러던 중 그나마 나이가 젊은 호법장로가 객점의 탁상을 내려치며 육성으로 말했다.
“뭘 이렇게 고민해? 난 간다!”
혼자 온 손님이 허공에 말을 거는 것은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마침 그에게 차를 가져다주려던 차였던 점소이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언제 그에게 다가갔냐는 듯 경로를 바꾸고 멀리 사라졌다. 이상한 사람은 되도록 피한다. 이것이 수진계 객점의 점소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일등 비결이었다.
수진계, 그것도 거의 대가 끊겨 가는 수야각에서 먹고살려면 관찰력은 물론이거니와 눈치까지 필요한 법이다. 의약당주는 떠나는 점소이의 뒷모습만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몇 번 내뱉더니 옷매무새를 만지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리에 은자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객점을 나선 호법장로는 즉시 신당으로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도착할 때까지 청난은 여전히 녕녕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인.”
“아, 장로…….”
어제 녕녕과 인사했을 때와 같은 구도였건만, 청난의 표정은 그때와 달리 다소 떨떠름했다.
‘설마 누나가 있는 데서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
그들이 찾아오고 며칠 되지도 않았으나, 청난은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려 지치고 말았다. 그런 청난의 속내를 눈치챈 호법장로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헛헛 웃었다.
“오늘은 귀찮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평소엔 귀찮게 했었다는 건 아는 모양이네. 청난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켜 내고 이어지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고민이 있으신 것 같더군요. 이 노인이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딱히…….”
“와! 같이 고민해 주시겠어요? 청난이 개를 키운대요!”
“…….”
청난은 거절하려 했지만, 녕녕의 목소리가 보다 빠르고 컸기에 청난은 하려던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장로는 청난이 거절하려던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기회가 떨어졌는데 그걸 제 발로 걷어찰 자가 어딨겠는가. 그는 녕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호오, 어떤 개 말인가요?”
“돌봐 주는 개가 있대요. 난이를 엄청 잘 따른다는데 곁을 내주진 않아서 걱정이에요.”
호법장로는 청난과 녕녕의 옆에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청난은 저 눈치 빠른 장로가 눈치라도 챌까 걱정되었다.
“대인께서 돌보시는 개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모든 생물은 사실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좋아하는 존재의 곁에 있고 싶고, 보호해 주고 싶기 마련인 거죠.”
“오! 그럴듯하네요! 그럼 난이가 개랑 친해지려면 무슨 방법을 쓰는 게 좋을까요?”
“대인께서는 술진에 능하시니 그걸 활용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어라, 난이가 그런 것도 쓸 줄 아나요?”
“하하하, 저 말고 화 선사가요. 선사가 잘해요.”
호법장로의 말에 청난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녕녕은 아무런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녕녕이 청난에게 집중하는 동안 호법장인은 제 턱은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은 그가 ‘그런 설정이셨군요.’ 하고 말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그랬구나. 하긴 선사님의 능력은 난이의 능력이지 뭐. 늘 붙어 다니잖아.”
“하하하. 맞습니다. 소저의 말이 맞아요. 그럼 이 노인이 마저 말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할아버지!”
호법 장로는 자신의 말에 이렇게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은지 양 입 끝이 하늘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그는 한층 커진 목소리로 자신의 명안을 밝혔다.
“그 개를 술진에 가두는 겁니다! 물론 그 안에 대인도 계시는 거죠. 그럼 대인 곁 말고 갈 곳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잠자리는 따뜻하길 바라니까요! 그렇게 붙어 있으면 더 친근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
이번엔 청난이 눈으로 말했다. ‘그렇게 쓰라고 가르쳐준 술법이 아닐 텐데요.’ 눈치 빠른 호법장로는 그 뜻을 읽고 눈길을 돌리며 모른 체했다.
설사 가르친 청난이 괜찮다 하더라도, 술법의 창시자는 따로 있었다. 선계의 선배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무덤 뚫고 일어나 천벌을 내리지 않겠는가. 청난이 녕녕의 앞에서 어떻게 돌려 말할지 고민하는 사이 다른 두 장로들이 합류했다.
“술법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오.”
“의약당주의 말이 맞소.”
“거참, 왜 이제 나타나 딴지를 거시오?”
의약당주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꺼내며 청난을 가리켰다. 호법장로는 그제야 청난의 표정을 보고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그럼 다른 방안이 뭐 없겠소?”
“먹을 걸로 회유해 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무릇 생물은 음식을 좋아하는 법이니 말이오.”
“그건 이미 해 봤어요. 난이가 특급 요리까지 준비했는데 안 통했대요.”
“허어… 대인께서?”
셋은 한배에서 타고난 자들처럼 같은 표정으로 청난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청난이 수야각에 있을 땐 요리는커녕 부엌에 들어간 적도 없었으니 저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너무 무례한 거 아냐……. 요즘 애들은 다 저런가.’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기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속으로 삼킨 청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잘못된 생각을 짚어 주었다.
“제가 요리한 게 아니에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뭐가 다행인 거죠?”
대체 뭘 상상한 거야?
수야각은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나, 그만큼 각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만한 것에는 엄격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청난은 수야각 제자들의 발언이 이토록 자유분방한 것이 꽤나 낯설었다.
‘삼백 년은 참 긴 시간이었구나.’
청난은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둥글게 선 녕녕과 세 명의 장로들의 이마엔 주름이 사이좋게 자글자글 맺혔다. 그러다 수야각주가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보호 본능을 자극해 보면 어떠려나…….”
“응? 뭐라고 했소?”
“아니, 별거 아니오. 약한 척하면 보호 본능이 일어나지 않을까 했으나……. 대인께 그런 걸…….”
각주는 청난을 슬쩍 보았다. 무를 갈고 닦는 수선자에게 약한 척을 해서 애정을 탐하라니. 망발 중의 망발이었다. 심지어 청난은 까마득한 선배이지 않는가. 하늘에서 천벌을 떨어트려도 할 말이 없었다. 각주가 뒤늦게 말을 주워 담으려 하였을 때 녕녕이 불쑥 말을 가로챘다.
“난이가 그런 건 참 잘하죠!”
“…….”
청난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녕녕은 청난의 반응은 미처 볼 생각도 없이 말을 이었다.
“툭하면 넘어지고 아프잖아. 정말 진짜 같을 거야. 개도 속을걸?”
“음……. 그건 그렇네요.”
솔직히 실제로도 약한 게 맞으니 ‘약한 척’을 청난보다 잘하는 사람은 손에 꼽힐 것이다. 청난은 털털하게 대답했다.
“그럼 한번 해 볼게요.”
“역시 태상장로십니다! 마음이 넓어요.”
“하하하, 장로 아닙니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호법장로의 말에 청난은 녕녕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행히도 녕녕은 별다른 생각은 없는지 그저 이 ‘좋은 생각’을 손뼉을 치며 반길 뿐이었다.
“난아 응원할게!”
“대인, 응원합니다. 친해지시면 저희에게도 소개해 주세요.”
“하하하. 네 그럴게요.”
청난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을 하며 응원 속에서 귀가했다.
밤이 무르익자, 찬란한 빛이 청난의 방 안에 강림하여 이내 사라졌다. 빛과 함께 나타난 백매는 외출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신은 피곤함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 아이가 제게 숨기는 것일까. 침상에 누워 있던 청난은 몸을 일으키며 평소보다 늦은 제 반려를 반겼다.
“청난, 더 주무시지 않고요.”
“네가 보고 싶어 그런다.”
백매가 몸을 숙여 청난과 눈높이를 맞췄다. 청난은 상체를 기울이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오늘은 누가 귀찮게 했더냐.”
“오늘따라 방문자가 많았습니다. 연화문까지 이리되니 다들 발등에 불이 난 게지요.”
“피곤하진 않아?”
“그랬는데……. 청난을 보니 피곤함이 달아났습니다.”
백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가 마치 몽환적인 구름처럼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그를 연모하는 탓일까, 아니면 그가 신선인 탓일까. 청난은 이번에도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을 제 속에 품었다.
청난의 포옹에 답하듯, 백매의 양손이 청난의 허리를 지나며 깊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