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3화 (136/146)

#3

“으으으으…….”

“어머, 난아,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사람을 불러……!”

이제 막 모든 꽃을 장식한 녕녕은 청난이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구기는 것을 보자 뛰쳐나가려고 하였다. 단지 애정 행각을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던 청난은 그 사실이 마을 주민들에게 널리 퍼질 위험에 처하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만류했다.

“아, 아니에요!”

“그러니?”

높게 들렸던 그녀의 발은 청난의 다급한 목소리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양발을 가지런히 모아 청난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허둥지둥하는 청난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법하건만 그녀는 무엇도 묻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 주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청난은 그들의 대단함에 감탄하곤 하였다. 이들의 힘은 연약했지만, 그저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전생에 폭포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마음을 달랬을 때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청난이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사실은 말이에요…….”

“응! 말해 봐, 말해 봐.”

“음… 사실 제가 돌보는 개가 한 마리 있어요.”

“어머, 그랬어? 궁금하다. 어디 있어?”

“그 아이는 사람을 안 좋아해서 보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 아쉽네. 그럼 그 아이 때문에 고민이었던 거야?”

청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 ‘개’는 백매였다. 그녀 또한 해류진군의 신도인데 어찌 그와의 잠자리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그의 이름을 알리지 못할지언정 체면을 깎을 순 없었다. 청난은 최대한 백매를 떠올리지 않도록 에두르며 설명을 이었다.

“그 아이가 참 저를 잘 따라요. 사냥을 할 때가 아니라면 제 곁에만 있으려고 하거든요.”

“그럼 지금은 사냥을 나갔겠구나?”

“네, 맞아요. 그런데… 음… 제, 제 곁에 있으려고만 하지 그보다 친근한 행동은 하려고 하지 않네요.”

“친근한 행동이라면 어떤 거?”

“그건…….”

청난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청난이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에 녕녕은 양손을 짝 하고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배를 쓰다듬지는 못하게 하는 거구나!”

“아, 맞아요! 맞아요. 머리밖에 못 쓰다듬었어요.”

맞는 말이지. 머리카락은 하루에 열 번은 더 쓰다듬는 것 같았다. 그 아래로 못 가서 문제지.

“음… 희한하네. 매일 네 곁에 있으면서 배는 허용하지 않았다고?”

“네, 그렇네요…….”

“그럼 거기서 만족하는 게 아닐까? 개들도 다 성격이 다르거든. 그저 네 곁에 있기만 하는 게 가장 좋은 건지도 모르지.”

“으음…….”

청난은 팔짱을 끼며 고민하였다. 확실히 그는 외향적인 편은 아니었다. 그가 수야각 제자였던 시절에는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는 편이었으나, 비승한 이후의 행적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땐 그저 제 스승의 소망에 따라 어울리는 척했던 것일 터였다.

‘정말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 걸까? 그럼 그 접문은? 그날 해 보니 별로였던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청난은 백매를 좋아하는 거지 그와의 입맞춤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니, 그를 위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청난의 양어깨가 축 처졌을 때, 녕녕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더 다가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려나?”

“응?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에게 과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더 다가가면 버려진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한번 버려진 개들이 자주 그런다나 봐. 그 개 말이야, 전 주인이 있던 게 아닐까?”

버려졌다.

청난은 그녀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백매는 자신을 잃고 삼백 년간 홀로 지내 왔다. 고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은 그를 떠났었다.

‘그가 두려워한대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이건 내 탓이야…….’

청난의 눈꺼풀에 힘이 풀리며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지자 녕녕은 청난의 등을 팡팡 때렸다.

“으악!”

그 바람에 청난은 하마터면 앞구르기를 할 뻔했다. 그녀는 제 키만 한 화분을 두 개씩 번쩍번쩍 들고 다니는 괴력을 지녔으니, 청난의 허리가 완전히 접힌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청난은 불타는 듯한 허리를 두어 번 문질렀다. 그가 속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녕녕은 하하, 웃음을 뱉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친해지겠지. 너는 절대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주면 되잖아? 내가 전에 들은 게 있어. 들어 봐. 개가 너한테 다가오면 그때마다 간식을 줘. 그러다 보면 개는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어때? 좋은 방법이지?”

“하하, 그렇네요. 고마워요 누나. 한번 해 볼게요.”

이미 백매는 청난의 곁을 좋아하고 있었으나, 그녀가 일러 준 방법을 시도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해는 저물고 달이 차올랐다. 땅과 하늘을 누비던 신선의 무거운 발걸음은 이때가 돼서야 저가 원하는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스륵-

가벼운 문소리가 들리고 소리 없는 발걸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신당’에서 지내기 시작한 후 백매는 더 이상 창문을 밟고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고, 그 덕분에 달을 감상하는 청난의 옆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밝은 달빛이 그의 윤곽을 비추었다. 그의 고개가 점차 돌아와 자신을 향하면 달빛에 역광이 지며 그의 이목구비는 어둠에 잠겼다. 그럼에도 백매는 그를 보며 더없는 찬란함을 느꼈다.

“왔니.”

“네, 다녀왔습니다.”

백매가 청난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달빛은 서로의 얼굴을 어렴풋이 비추어 주었다. 신선의 몸인 백매는 그 작은 빛으로도 청난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난은 평범한 양민의 몸. 심지어 평범한 이들보다도 시력이 좋지 못하였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달빛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졌으나, 지금은 작은 등불이 아쉬웠다.

“매아, 불 좀 켜 주겠니. 네가 다 보이지 않는구나.”

청난의 말이 끝나자 창 옆에서부터 어떤 식물의 줄기가 넘실넘실 다가왔다. 그것은 빠르게 성장하여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곧 꽃잎이 벌어지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잎은 스스로 발광하여 창 근처를 더욱 밝혀 주었다.

그 빛은 야경과 퍽 어울렸기에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시야를 밝게 비추어 주었다.

“맘에 들어.”

“다행이에요.”

“네 술법이니?”

백매는 고개를 저었다.

“법보예요. 연화문 아래에서 만났던 세 명의 신선을 기억하시죠?”

“응, 기억하지.”

“그중 부채를 들고 있던 신선이 인사선인데, 그자가 주었어요. 이런 보기 좋은 법보를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신선이지요. 황금 잉어도 키우고 있어요.”

청난은 한연화가 보여 주었던 황금 잉어가 생각났다.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좋아 기대하마.”

이미 보았던 것이지만 청난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와 보면 색다르지 않겠는가. 스스로 즐거움을 없앨 필요는 없었다.

“요즘 선계는 어떠하냐?”

“아직 정신없어요. 그나마 다행히도 지화선이 하계의 일에 나서기 시작하니 다른 신선들도 돕고 있어요. 많은 신선들이 그자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요. 금방 진정될 거예요.”

아마 연화문 때문이겠지. 연화가 연화문에서 나온 신선이니 평판도 살려야 할뿐더러, 현재의 연화문은 거의 멸문 상태. 되돌리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인계가 정리되어야 했다.

‘이번 일의 원인이 연화가 아니었어도 나섰을까.’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벌어지지 않은 일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청난은 이 주제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다행이구나.”

“네, 그러니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청난.”

백매가 손을 뻗어 청난의 볼을 감싸 쥐었다. 청난은 그런 그의 손바닥에 고개를 기댔다.

“청난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말아라. 내 곁엔 네가 있지 않느냐.”

청난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 백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청난, 무슨 일 있었나요?”

청난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티 나는 편인가?’

예전에는 만인 앞에서 거짓을 입에 올리기도 했었는데. 오늘만 두 번이나 들켰다. 청난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매는 여전히 걱정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저런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어떻게 이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수 있겠어?’

아동 학대다. 그는 아동이 아니었지만.

청난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 장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장 안에서 기다란 병을 꺼내 왔다. 이곳에 있는 것 중 백매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은 없을진대 그것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백매가 고개를 기우뚱하였다.

“그건 뭔가요?”

“예전에 잠시 가르쳤던 학생의 학부모님께서 주셨단다. 먹는 건 즐기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네 신화를 들어 보니 음료는 좋아하는 것 같기에 준비했단다. 한잔하겠느냐?”

백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청난은 이미 술병을 열었다. 달달한 꽃향기가 퍼졌다.

최근에야 깨달은 것인데 백매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술은 향만 달달할 뿐 단맛은 은은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백매가 좋아하는 건 대개 청난이 좋아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은애하고 존경하는 이에게 가까워지려고 하다 보니 청난이 좋아하는 것에 호감을 가진 것일 뿐이었다. 하여 청난은 해류진군의 신도인 학부모를 찾아갔었다.

그녀는 해류진군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꽤나 다양했다. 청난은 그중에서도 그의 호불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해류진군의 취향에서 자신의 취향을 걸러 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바로 이 술, 구온춘주(九醞春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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