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야각의 제자들이 백매의 눈치를 보며 각자의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 때, 백매는 눈썹 끝을 끌어 내린 온순한 낯으로 청난을 바라보았다.
“청난, 맛은 괜찮으신가요?”
“매일 묻는구나. 오늘 식사 또한 아주 일품이니 걱정 말아라.”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당연하지. 너보다 날 잘 알고 있는 이가 없을진대 어찌 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건……. 그렇네요.”
백매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제 아들과 사위의 풋풋한 감정 교류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보던 청운은 결국 크흠! 헛기침을 뱉으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에 청난이 푸흐 웃음을 뱉었다.
“하하하,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야말로 절 가장 잘 아는 사람이시죠.”
청운은 그 말을 듣고서야 표정을 풀었고, 심지어 턱을 살짝 드는 모습이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알아주니 기쁘구나. 화 선사는 네가 기어 다니던 시절은 보지 못했다지?”
“…….”
이렇게 기 싸움을 하시다니! 심지어 부끄러움은 청난의 몫이었다.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린 청운의 입이 다시 한번 열렸다. 청난은 이번엔 어떤 부끄러운 말이 나올까 침을 꼴깍 삼켰지만, 이어지는 말에 안심하였다.
“그래도 네 말은 몹시 일리가 있구나. 화 선사, 어찌 요리 솜씨가 이리도 뛰어날 수 있답니까. 선사의 이름을 몰랐더라면 등선할 때 검이 아닌 식칼을 잡았다 오해했을 겁니다. 이 또한 난이가 가르쳐 준 겁니까?”
“그랬더라면 이보다 훌륭했겠지요. 요리는 독학했습니다.”
“아쉬웠겠군요. 난이에게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네, 그렇습니다.”
“…….”
아니, 너무 빨리 안심했던 모양이다. 청난은 더더욱 말을 이을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번에도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걸까.
청난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절대로.
전생에는 불에 굽는 것 외엔 요리 비슷한 것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현생에서 그나마 늘었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개수가 매우 적어 주막 음식을 사 오기 일쑤였었다. 어찌 저런 거짓말을 침 한번 안 바르고 할 수 있는 걸까. 청난은 이렇게 제 가족의 신기한 재주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의외였지.’
청난은 튀긴 꽃빵을 크게 베어 물며 생각했다.
지금 청난과 청운이 먹고 있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 만든 식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백매가 그들만을 위해 직접 조리한 음식들이었다.
아랑 마을에 돌아와서야 백매는 식사하는 행위 자체가 어색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신선인 그는 먹을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삼백 년을 보내 온 탓에 음식물이 몸 안에 흡수되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다고. 청난은 그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즐겼기 때문에 아쉬워했다. 그러자 백매는 대신 자신이 직접 조리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끼익- 의자 다리가 끌리며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비는 먼저 일어나마. 저자들이 귀찮게 한다면 봐주지 말거라. 양심도 없지. 어찌 어린 널 이토록 괴롭히는 게야?”
“하하하. 아버지, 저 나이 많다니까요.”
“내 아들이 된 후부터 세어야지. 그 전은 무효야.”
“좋아요,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청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자신의 그릇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로써 식당에는 여전히 백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스무 명의 수야각 제자들과 청난, 그리고 백매만이 남게 되었다.
청난은 이번엔 산초와 고추를 넣어 볶은 버섯을 입에 넣었다.
사실 청난은 백매의 음식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삼백 년 전 그가 만들어 주었던 단 고기의 맛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한번 죽었다 다시 태어났는데도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해서 처음 백매의 음식을 먹을 때 청난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표정 관리에 집중하며 한 입 베어 물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정말 많이!
그날 청난이 그에게 물었었다.
“언제 요리를 익혔어?”
그러자 백매는 수줍음을 타면서 대답했다.
“청난이 보고 싶을 때마다 요리 연습을 했어요. 언젠가 해 주고 싶었거든요.”
청난은 하마터면 먹던 것이 목에 걸릴 뻔했다.
그가 홀로 견뎌야 했던 삼백 년, 그리고 십 년. 그 하염없는 시간을 떠올릴 때면 청난은 늘 먹먹해졌고, 그의 시간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강하게 끌어안아 둘 사이에 조금의 틈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도록.
지금도.
청난은 손을 뻗어 반대편에 있는 백매의 손을 그러쥐었다. 백매는 반려자의 복잡한 속마음을 상상도 못 하고 그저 맞닿은 살결을 보며 마냥 미소 지었다.
‘백매야.’
청난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은 주위를 둘러싼 스물의 후손들 탓이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그의 이름을 입에 담고, 그의 입술을 물고, 그와 마음을 나누었을 텐데.
청난은 자신이 인내심이 없는 편이란 걸 최근 들어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청난의 입술 대신 그의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백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청난, 정말로 수야각엔 돌아가지 않으실 건가요?”
“응? 응, 그렇지. 난 일반인이지 수선자가 아니잖아.”
이 말을 들은 스물의 수선자 중 절반은 먹던 것을 뱉을 뻔했고, 나머지 반은 실제로 뱉었다. 그들은 서로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 중 그의 지식이 제일 뛰어났다. 그런데 당신이 일반인이라고? 수선자의 기준을 얼마나 높이실 셈인 거죠? 그들은 같은 외침을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점심 무렵, 뿌예진 안경알을 닦고 있던 청난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꽃 뭉치를 발견했다. 퍽 기이한 모습임에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청난이 투명하게 닦은 안경을 귀에 걸치자 ‘꽃 뭉치’도 청난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난-아-!”
“누나, 오늘도 일찍 왔네요.”
“그러엄-! 손님도 있다는데 이럴 때 우리 가게의 저력을 자랑해야 하지 않겠어? 어때, 잘 팔릴 것 같아?”
“그럼요. 다들 이 꽃을 본다면 사지 않고 못 배길 거예요.”
청난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인 꽃집 주인 녕녕은 한 아름 들고 왔던 꽃 중 일부를 신상 앞에 공양하고는 양손을 맞잡아 짧게 기도하였다. 그녀는 늘 활달하며 장난스러운 면모를 보였지만, 이렇게 신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는 사소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짧은 기도를 끝낸 그녀는 남은 꽃을 번쩍 들어 신당 한편에 놓인 꽃병 위에 장식하였다. 그녀는 꽃을 보기 좋게 정돈하며 청난에게 말을 걸었다.
“난이 너, 요즘 걱정 있어? 잘생긴 선사님과 오순도순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생각지 못한 그녀의 말에 청난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자신의 뺨을 주물렀다.
“티, 티 나요?”
“그러엄~! 무슨 일인데 그래? 선사님이 홀대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매아는 언제나 잘해 줘요. 그냥……. 그냥 매아가 너무 바빠서요.”
“아, 갑자기 온 손님들 때문이겠구나. 속상하겠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자, 이거 받아.”
그녀가 청난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하얀 매화로, 아랑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이었다. 청난은 꽃을 받고 멋쩍게 웃었다.
사실 청난은 백매가 바쁜 것에는 조금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많은 이들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다. 백매는 바쁜 나날 속에서도 매 밤마다 청난의 곁을 찾아왔다. 밝게 빛나는 달 아래에서, 두 사람은 향기로운 차를 우리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것은 선계의 근황이기도 하였고, 어느 신도의 일화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길에서 본 특이한 모양의 나뭇잎처럼 사소한 것이기도 하였다. 청난은 그 시간을 매우 즐겼다.
‘분명 즐겁지. 좋지.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있었다.
밤이 무르익으면 백매는 청난을 번쩍 안아 들어 침상에 올려 주었다. 백매는 그제서야 겹겹이 입은 옷을 한 겹 한 겹 벗었다. 그렇게 청난처럼 얇은 내의 한 벌만 남으면 그는 청난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살며시 웃으며 저를 불렀다.
“청난.”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감미로운지, 청난은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마치 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 들곤 하였다. 아마 달빛이 아름답기 때문일 테고, 열어 놓은 창을 넘어 들어온 향기로운 꽃 내음 탓일지도 몰랐다.
청난은 그의 입술 움직임이, 그의 숨결이 제 눈앞에서 아른대는 듯해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백매는 그런 그의 옆에 몸을 뉘었다.
맞잡은 손을 통해 그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따스한 밤을 보냈다.
그래, 여기서 말하는 ‘손만 잡고 잔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손만 잡고 잔다. 아니, 아마 백매는 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손만 잡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날 이루어진 첫 접문. 그것은 현재로서는 마지막 접문이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진도가 느린 걸까?’
차마 물어볼 수도, 그럴 상대도 없어 청난은 매 아침마다 고민했다.
청난은 성적인 것은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의 성향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매와 보내는 매일 밤은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고역이었다. 청난의 머릿속에는 대개 이런 생각들이 펼쳐져 있곤 하였다.
그가 갑자기 입을 맞추면 어떡하지? 날 이불 위로 밀면 어떡하지? 버텨야 하나? 내가 뭘 해야 하지? 그가 다 하게 할 수 없잖아.
하지만 그런 고민은 언제나 무색해졌다. 백매는 그에게 입을 맞추긴커녕 한시라도 빨리 재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는 그의 연인이지 아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애정 행각을 싫어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는데…….’
그날 접문을 할 땐 누가 보아도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 참고 있는 건가? 매아는 원래 욕심부리지 않잖아.’
그렇다면 그는 언제까지 참을 생각인 걸까. 그때까지 긴장하며 지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걸까.
청난은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져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