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1화 (134/146)

#1

외전 1. 사귀었더니, 옛 제자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 왕이 아닙니다!”

공간 전체에 울리는 큰 목소리에 청난은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 고개를 땅에 박으며 큰절을 하고 있는 건 바로 수야각의 장로들이었다.

한연화를 봉인하고 수야각에 자신의 정체를 알린 일로부터 이 개월가량 지났다. 그동안 청난은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물론 삼백 년 전의 선조가 갑자기 찾아왔으니 수야각의 몇 안 되는 제자들은 바짝 경계했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영광을 온몸에 두른 해류진군 백매선이 있었으니 그들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밤을 꼬박 지새운 대화 끝에 그들은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이 수야각주였던 진청난임을 인정했다.

청난이 바빠진 건 그 이후였다. 수야각은 전해져 오던 많은 비술이 끊어졌고, 비술이 남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즉, 수야각은 수학에 목말라 있었다.

가뭄에 단비가 내렸는데 환호하지 않을 이 있겠는가, 단비를 받아 두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청난에게 달려들어 그의 지식을 나눔받고자 했다.

청난은 현 수야각의 처지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손의 일인데 어찌 거부할까. 그로 인해 낮에는 수야각 제자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유실된 비술서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나날을 보내었다.

다행히 수야각의 현 장로들은 이해력이 몹시 뛰어났다. 덕분에 청난은 반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한 일을 단 이 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청난은 마지막 비술서의 집필이 끝나자마자 고향인 아랑 마을로 돌아왔다. 수야각의 제자들은 수련에 매진하느라 청난보다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청난은 굳이 바쁜 이들을 불러 세워 인사하기보다는 서신을 남기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 주째 되던 어젯밤, 장로들이 찾아온 것이다!

“난아, 이것도 먹으렴.”

“하하하… 아버지…….”

청운은 눈앞에 있는 스무 명의 수사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 순간도 시선을 건네지 않고, 오직 제 아들의 그릇 위에 반찬을 올려 주는 일에 전념했다. 청난은 그런 청운을 보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온 수사들이 아들을 데려간다고 하니 싫을 수밖에 없지.’

수야각에서 찾아온 수사는 장로뿐만 아니라 새로 입산한 제자들까지 총 스무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나이가 가장 많은 수석 장로는 자리보전한 상태임에도 제자의 등에 업혀서까지 찾아왔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와서는 청난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더니 한다는 말이 “저희와 함께 본문으로 돌아가시지요!”였던 것이다.

청운이라고 처음부터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가 청난을 바라고 있으니 대화가 쉬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더니, 결국 청운의 분노로 대화의 장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수련을 한 수사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버지가 던진 화병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겠지……. 내가 아이들은 잘 가르친 모양이네.’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 또한 불편하였기에, 청난은 오롯이 청운의 편이었다. 그는 청운이 올려 준 반찬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켰다.

수야각 제자들이 갑자기 찾아와 자신 앞에 머리를 박아 댄 탓에 청난은 청운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장황한 이야기를 다 들은 청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 그럼 나는 앞으로도 네 아버지인 게냐?”

그뿐이었다.

청운은 탓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아들 청난으로 대해 주었다.

‘인복으로도 비승할 수 있으려나.’

청난은 스스로의 우스갯소리에 쓴웃음을 삼키곤 수야각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어젯밤에도 말씀드렸듯, 이리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상선, 부디 저희를 돌봐 주세요.”

“돌봐 주세요!”

현 수야각주가 말을 하자 열아홉의 제자가 복창하며 또다시 공간 전체를 울려 대었다. 청난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 말했다.

“각주, 제가 장로직을 마다했을 때는 아무 말 없으셨잖습니까. 이제 와 이러시는 연유가 무엇인가요. 혹여 제가 남긴 서책에 부족함이 있었습니까.”

“그건 전혀 아닙니다. 상선께서 집필해 주신 비술서는 수야각의 술법을 익힌 자라면 쉬이 배울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라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탁월한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또 그 내용은 어찌나 충만한지 이제껏 비어 있다 생각한 것들을 모두 채우고도 남아 제일문파의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찾으시는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말로 떠나실 줄 몰랐습니다. 그저 직위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분인 줄 알았지요. 비록 현재의 수야각에 삼백 년 전과 같은 영광은 없으나, 상선께서 머물러 주신다면 그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상선의 대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정녕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청난은 맛을 음미하듯 그들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더니 젓가락을 톡, 가볍게 내려놓았다.

“네, 그렇습니다.”

“상선…….”

“우선, 저는 비승하지 않았으니 그리 부르지 마세요.”

“그럼 태상장로…….”

“제 말을 안 들으신 게지요?”

“…….”

어떻게 스무 명 전부가 고개를 돌리며 모르쇠 할 수 있는 걸까. 수야각이 술법은 실전되었어도 그 연대감은 더 끈끈해진 모양이었다. 그걸 하필 자신을 상대로 쓰다니! 제 손으로 키운 개에게 물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등을 밟힌 정도는 되는 듯했다.

청난이 짧게 한숨을 내쉬자 수야각주의 눈빛을 받은 제자 둘이 청난의 앞에 바짝 붙었다. 청난의 옆에 있던 청운은 이목구비 전체로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청운이 그들을 무시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청운을 무시했다.

두 명의 제자는 청운이 했던 것처럼 청난에게 찬을 집어 주거나 그의 물 잔을 채워 주는 등 자진해서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로 입문하고, 수야각에 발걸음해 기도를 올리는지, 수야각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훌륭해졌는지 등의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먹다 체하겠네.’

청난은 당장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으나 차마 어린 후손들 앞에서 그럴 수 없었다.

“이보세…….”

“실례합니다.”

결국 청운이 탁자를 탁 치며 호통치려던 찰나에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스물두 쌍의 눈동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새하얀 손이 줄을 꼬아 만들어진 문발을 젖혔으며, 그 사이로 물결처럼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 뚜렷하였으니, 이런 훌륭한 외모를 가진 이가 백매 말고 또 있겠는가. 청난과 눈이 마주친 백매는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청난, 불편하면 물릴까요?”

청난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후손들 앞에서 이런 해이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청난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정돈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아 냈다.

“물리긴 뭘 물리느냐. 이 아이들 또한 식사를 하러 온 것뿐인데.”

“흐음…….”

백매가 말을 끌며 잠시 생각했다.

청난의 낯이 다소 피곤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속으로는 내쫓아 주길 바라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면을 신경 쓰는 분이니 어찌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낼 수 있겠는가. 하여, 백매는 대화 상대를 바꾸기로 하였다.

백매는 스무 명의 수야각 제자들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지, 안 드냐?”

“…….”

“…….”

이건 존댓말일까 반말일까. 기묘한 말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만 젊을 뿐, 나이는 청난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많았으니 그의 말투에는 하등 문제가 없었다. 따지자면 오히려 나름 대우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다소 낯선 방식이었지만…….

백매의 분명한 ‘눈치 주기’에 장문인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먹을 식사를 받으러 갔다. 그렇게 청난의 앞이 텅 비자 백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이 있는 곳은 백매선군의 신당이었다.

이곳은 처음부터 신당을 목적으로 지어진 곳은 아니었다. 청난과 백매가 돌아온 그날 밤, 청난이 자는 사이 백매가 하룻밤 만에 지은, 그들이 거주할 집이었다.

진 대인의 집보다 조금 좁은 정도인 이 집을 짓기 위해선 넓은 토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집을 짓겠다고 땅을 넓힐 순 없고, 원래 있던 건물을 철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백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제 신상이 있던 토지뿐이었다. 그는 신상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빙 두르는 집을 지었다.

지난날 신상을 조각하는 데에 사흘이 걸렸었다. 그런데 이런 큰 집을 하룻밤 만에 지었으니 어찌 눈길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많은 마을 주민들이 그의 찬란한 영광을 두 눈에 담았다.

황금빛과 함께 강림한 신선의 손짓으로 만들어진, 신상을 둘러 안은 집. 그리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수사. 오해하지 않기도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처음엔 소수의 주민들이 대문을 넘어 들어와 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이제는 명실상부한 백매신군 신당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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