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6화
“어쩌다가 시비 걸렸는데?”
“뭐, 이리저리 찾아다니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 밀치더라고. 그래 놓고 시비를 걸길래 그냥 다 처리를 했지.”
“하.”
“아무튼, 너 앞으로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주변 사람 걱정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이번에는 입을 다물었다. 하시스는 내가 대답이 없자 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이럴 때는 그냥 알겠다고 하면 안 돼?”
“나더러 거짓말을 하라는 거야?”
“언제 그렇게 성실했다고.”
“…….”
“하여튼 꼬맹이라니까.”
“이……!”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하시스의 발을 콱 내리찍었다. 그러나 이번에 하시스는 빠르게 발을 빼더니, 이내 얄미운 얼굴을 하고 걸음을 뗐다.
“그럼 난 이만 가서 잔다. 너도 가서 자.”
“하. 어이없어.”
“그러게, 스승님도 아마 너 정도로 어이없을 거다.”
하시스의 말에 나는 착잡한 얼굴을 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솔직히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것을 나 스스로 해 왔고, 그것은 내가 황제가 아니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황제가 된 내게는 엄청나게 많은 목숨의 무게가 얹어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무모하게 행동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내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돼.’
나는 틀리지 않았어.
결국 나는 고집스럽게 읊조렸다.
* * *
다음 날 아침.
“흐어어엉. 황녀 전하. 죄송해요. 제, 제가 인형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갑자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달려와 안기는 이블린을 토닥거렸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속으로 묻는데, 이블린이 엉엉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 어제 갑자기, 흑, 갑자기 황녀 전하가 사라지셔서, 흑.”
“어, 응. 그, 그래.”
“그랬는데. 흐읍. 갑자기 저더러 집에 가라고 해서 흐읍. 그래서 물, 물어보고 싶었는데, 오빠분이 무서워서.”
나는 내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하나같이 호들갑이라니까.
그러나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이블린의 등을 토닥토닥해 줬다.
그리고도 이블린은 한참을 울었다. 마지막에는 흑흑거리는 그녀를 향해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종이를 내밀었다.
“일단 얼굴부터 닦아.”
“흐읍, 네.”
“코도 좀 풀고.”
“네, 네.”
“자, 흥.”
“흥!”
“……입으로 소리 내지 말고 코를 풀라니까.”
곧 눈물과 콧물을 다 닦아 낸 이블린이 진정된 듯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셀라가 다과를 가져오자 나는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자마자 온 밤을 걱정했던 거야?”
“네…….”
“그렇구나. 후작이 걱정했겠네. 딸이 자지도 않고.”
나는 여상스럽게 이블린을 향해 읊조렸다. 그리고 내 말 속에 담긴 다른 뜻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블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버님은 어제 늦게 귀가하셔서 뵙지 못했어요.”
“오늘 아침에는 만났겠네?”
“네. 그냥 저한테 황녀 전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혹시라도 황녀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당부를 하셨어요.”
“그랬구나.”
나는 담담하게 차를 마셨다. 그때, 쿠키를 아삭아삭 씹던 이블린이 나를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별일 없으신 거죠?”
“없어. 보다시피 멀쩡해.”
“진짜 다행이에요.”
“그렇게 걱정했어?”
나는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물론 이블린의 입장에서는 겨우 사귄 ‘친구’가 사라지는 게 걱정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녀는 다시 보호막을 잃고, 마그릿에게 다시 어떤 식으로 괴롭힘을 당할지 모르니까.
어린아이의 걱정이야 그런 식 아니겠나.
그러나 정작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이블린이 내뱉은 말에 내가 조금 멈칫했다.
“엄청 걱정했어요. 저는 황녀 전하와 영원히 어…… 치,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요.”
“…….”
“황녀 전하는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저는 황녀 전하와 언제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는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어.”
“그렇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는, 황녀 전하시잖아요.”
“…….”
“다른 친구가 생긴다고 해도 저는 황녀 전하가 제일 좋아요.”
순간 내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마치 내가 그녀에게 대체할 수 없는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나는 이블린을 힐끔 보았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오독오독 쿠키를 먹고 있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시야에 이블린의 눈가에 채 씻어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젯밤 레르하겐의 표정이나 일리안의 말이 걸려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하시스의 다급함과 셀라의 호들갑이 생각나서일까.
갑자기, 저도 모르게 속이 뻐근해졌다.
* * *
그날 오후, 누구보다도 피곤한 얼굴로 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린 리건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이미 어젯밤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는 행여 또다시 잔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급히 입을 뗐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잘못’과 ‘걱정’이라는 말을 내뱉을 거면 밖에서 다 말하고 와. 듣기 싫으니까.”
“하나만 묻겠습니다. 납치를 당하신 겁니까, 아니면 당해 주신 겁니까.”
“네 생각에는 뭐인 것 같은데? 내 실력, 몰라?”
“후자인 것 같습니다.”
“맞아.”
“역시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에 리건의 원망스러운 표정이 내게 꽂혔다.
곧, 그가 자신의 미간을 살짝 짚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분부하신 대로 경비대에 가서 처리를 마쳤습니다. 인질들에게는 일정한 수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그 대가로 오늘 본 것은 절대 함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경비대한테는?”
“이번 일은 그저 단순한 납치로 마무리를 지을 것을 명했습니다. 당연하지만 황녀 전하의 이름은 지워질 겁니다. 다만…….”
“다만?”
“다만, 레르하겐 님이 그곳을 너무 화려하게 부숴 놓아서, 범인을 잡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애초에 나도 범인보다는 잡힌 인질들의 목숨을 우선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것은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곧바로 아쉬움을 털고 허리를 폈다.
“뭐, 이미 망가진 단서를 아까워하기만 하는 것도 의미는 없지.”
리건은 내가 생각 이상으로 깔끔하게 손을 떼자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살짝 안경을 치켜올렸다.
“납치를 당해 주시면서까지 들어간 곳에서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신 분이 이런 얼굴을 하실 리는 없고.”
“흐음.”
“역시, 다른 단서를 손에 넣으신 겁니까?”
리건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에 예상했다는 듯이 리건이 한숨을 쉬었다. 하나 곧, 그가 조금 기대 섞인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뭡니까?”
“거기, 마물들이 엄청나게 많았어.”
“마물들이요?”
“그래, 그리고 인간들을 잡아와서 죽이려는 것까지 고려해 보자면, 아마 흑마법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커.”
“그럼…….”
“그리고, 결정적으로 각하라고 했어.”
“……네?”
“나를 납치한 두 범인이 각하라는 말을 입에 올렸어. 뭐, 내가 황녀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 같지만.”
“잠깐만요, 각하라면.”
“리건, 후작 이상의 가문에 초대장을 보내. 그리고 알려.”
나는 책상에 턱을 살짝 괴었다. 이윽고, 내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사냥을 하겠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