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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55화 (55/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5화

결국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나는 내 뒤에서 눈치를 보면서 뭉쳐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사람들을 내보내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먼지 좀 봐. 아가씨, 그쪽에 있어?”

‘응?’

뭐야. 저 녀석, 안 튀었어?

일리안은 유들유들한 미소를 안고 천천히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바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안 도망갔네?

똑똑한 녀석이니 내가 왜 자신을 굳이 데려가지 않고 홀로 사라졌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생각나 그를 향해 물었다.

“이블린은?”

“아, 그 꼬마 아가씨는 진즉에 저택으로 보냈지. 우리 아가씨는? 어디 안 다쳤어?”

“아니. 안 다쳤는데.”

“그래? 다행이야. 걱정했잖아.”

왜?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여전히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천 번 양보해서 레르하겐이야 그렇다 쳐도 쟤는 왜 날 걱정하지? 나를 죽이러 왔다면서?

오늘따라 이상한 이들의 행동에 어마어마한 곤혹을 느낀 나는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그때, 일리안이 내 표정을 발견했는지 생긋 웃었다.

“아무래도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날 보낸 사람이 화나지 않겠어?”

뭐 이 녀석, 나를 손수 끝장내겠다고 말하는 건가.

“경비대를 불렀어. 이제 곧 올 거야. 아, 그리고 밖에 있는 두 놈은.”

“아, 그러고 보니 그 둘도 포획해서 당장 궁으로 데려……”

“미안. 내가 그만 반죽으로 만들어 버렸어.”

“……?”

“하지만 나만 뭐라고 하지 마. 먼저 손을 쓴 건 내가 아니거든.”

“…….”

“나는 그냥 더 쫀득하게 밟아 줬을 뿐이야.”

“닥쳐. 먹을 걸로 비유하지 마.”

나는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레르하겐이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일리안은 왜 여기서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는지, 그 와중에 하시스는 어딜 갔는지.

‘아니지. 하시스처럼 오지 않는 게 정상인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일 하지 마라.”

“…….”

“다시 말하지만, 희생은…….”

“싫어요.”

하나 레르하겐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드물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아니, 이전에도 말대답하기는 했지만 이번엔 정말 단호하게 대꾸했다.

사실 평소였다면 그저 대충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레르하겐의 표정에 나는 왠지 모르게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저는 올 거예요. 그리고 제 약속은 희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남을 돕지 않는다, 보호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아니었어요.”

“에슈트.”

“말하자면, 제 선택이에요. 희생을 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것은 로……아빠가 관여하실 바가 아니에요.”

사실 나도 내 말이 상당히 건방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나를 돕는 입장이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라면,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만큼, 나 또한 이 땅의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을 구할 의무가 있었다.

레르하겐은 내 말에 입매를 굳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마디만을 남긴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마음대로 해라.”

저 말을 진짜로 마음대로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일리안은 그런 나와 레르하겐의 대화를 듣다가 조용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희생은 달리 죽는 것만 희생한다고 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우리는 희생이라고 해. 다만 그게 성공으로 끝나냐 실패로 끝나냐의 차이지.”

“그게 어떻게 희생이야. 그건 그냥 리스크를 감수하는 구출 행위일 뿐이야.”

“우리 아가씨는, 본인이 하는 선택이 희생이라는 것도 몰랐구나?”

일리안은 드물게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경비대와 함께 제2기사단이 왔다.

“황녀 전하. 무사하십니까.”

“괜찮아. 오느라 수고했어. 난 멀쩡하니까 나 말고 저기 저 사람들부터 챙겨.”

“아닙니다. 황녀 전하. 저자들은 경비대가 맡을 겁니다. 신전에 이미 연락을 했습니다. 혹시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전혀 없어. 보다시피 멀끔해.”

기사들은 내 모습에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이윽고 안에 갇혀 있던 이들이 전부 구출되었다. 나는 그들을 보다가 다시 내 앞에 서 있는 제2기사단 단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들을 근처의 병원으로 보내서 검진받게 해.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해 줘.”

“오늘 일이라고 하면.”

“안쪽에서 마물이 발견됐어.”

“……네?”

“다행히 어마마마……와 아빠가 준 마력석과 오빠가 호신용으로 준 아티팩트가 있어서 큰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마물들에 관한 건, 아무래도 소문이 나면 곤란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앙기사단에도 굳이 보고할 필요 없어. 아니, 그냥 오늘 일은 절대 함구해. 어마마마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테니.”

혹시라도 보고 따위를 하다가 말이 새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게다가 오늘 마물을 처리한 건 나니까. 괜히 소문이 이상하게 나면 안 돼.’

기사들은 아이치고는 다소 침착한 내 모습에 당황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정도야 뭐, 그저 드래곤 로드의 딸이고 황녀니 그럴만하다 정도로 퉁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럼 아가씨, 이제 갈까?”

“그러지 뭐.”

레르하겐의 태도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약간 속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가 바쁘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아가, 아니, 황녀 전하.”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까 전 나를 아가라고 부르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낱 미천한 인간이 어떻게 드래곤 로드의 마음을 알겠느냐마는…….”

“……?”

“세상 사람들이 다 죽어도, 내 자식만큼은 무사하게 이 세상에 살아 줬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랍니다.”

“……”

“그냥, 저는 이 짧은 인생이나마 그랬습니다.”

그 순간 나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설마 아까 전 대화를 듣고 그러는 건가?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르하겐은 내 친아빠가 아닌데.’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관계와 달리 나와 레르하겐은, 애초에 내가 아이가 된 뒤 새롭게 맺었던 모든 인연은 그저 필요에 의해서 맺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그렇군.”

결국 나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그때, 뒤에서 아까 전 남자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아, 아니, 고맙습니다!”

나는 그에 피식 웃어 주고는 완전히 마차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일리안 또한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 밖을 힐끔 본 내가 통신 마법으로 리건에게 연락했다.

<경비대에 다녀와. 뒤처리는 깔끔하게. 절대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입을 틀어막아.>

그것을 발견한 일리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 * *

“야! 이, 이 애물단지 같은 게! 응? 이 애물단지가! 야!”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세상에, 납치라니. 이게 무슨.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고요?”

“너는 아주 그냥 호되게 큰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려.”

“이, 일단 신관을 부를까요? 신관, 신관이 지금 근무를 하나요?”

“너, 다시는 어디 사라지고 그러면 아주 나나 스승님한테 제대로 혼날 줄 알아.”

“황녀 전하, 괜찮으신 거죠? 진짜진짜 괜찮으신 거죠?”

“……둘다 좀 진정해줄래?”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를 기다리는 것은 하시스와 셀라의 질문 세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 세례보다는 그저 나를 들들 볶는 것에 가까웠는데, 심지어 하시스는 나를 세 번 정도 빙글빙글 돌려 보고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진짜 아무 일도 없으신 거죠?”

“없어. 그것보다 일단 나 목욕물 좀 받아줄래?”

“네! 저, 신관에게…….”

“아니, 괜찮아. 아까 올 때 일리안 오빠가 다 치료해 줬어.”

“응? 내가?”

“…….”

“응. 내가.”

일리안은 내 눈빛에 바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셀라가 안심한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따뜻하게 물 받아 놓을게요.”

말을 마친 셀라가 급히 뛰어 방으로 돌아갔다.

곧 그녀의 인영이 완전히 사라지자, 하시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네 실력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가득한 곳에서 진짜로 납치를 당한 건 아닐 테고.”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하. 더 혼나야겠네.”

“이미 충분히 로드님과 한바탕하고 왔으니까 너까지 나 귀찮게 하지 마.”

“스승님과?”

“응.”

하시스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했다.

“너 설마 네 목숨은 네 거다, 뭐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응. 맞는데?”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사실인걸.”

“뭐, 너다운 생각이긴 하다만, 주변 사람 생각도 좀 해 주는 것이 어떠냐? 네 그 보좌관은 얼굴이 하얘져서 뛰쳐나가고 네 시녀는 네가 오기 전까지 아주 펑펑 울었다.”

“뭐?”

“나도 중간에 갑자기 시비 걸리지 않았으면 바로 너한테 갔어.”

“시비?”

나는 그제야 하시스의 얼굴에 미세하게 난 상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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