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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57화 (5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7화

그런 내 표정에 하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괜히 기분이 나빠져 대꾸했다.

“평소에도 딱히 대화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어.”

“그래도, 사실 신경 쓰이지? 그날 스승님이 드물게 화를 냈다고 하더니.”

“아니.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데?”

물론 거짓말이었다.

레르하겐의 의중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나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 상태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시스는 내 표정에 이미 답을 얻어 냈는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 그가 검을 거두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스승님 성정에 그런 걸로 화를 내실 분은 아니니까. 아니, 애초에 그는 분노 같은 감정을 품지는 않지. 그날 일도 그냥 아무런 말도 없이 넘어갔다면서?”

“하지만.”

“뭐, 그래도 정 신경 쓰이면 먼저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던가.”

하지만 그러면 내가 진짜로 잘못한 거 같잖아.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하시스가 다시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곧,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어른의 소양이다.”

“그럼 로드님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야 하는 거 아니야? 로드님은 한참 어른이고 나는 아이잖아.”

“이럴 때만 아이라는 걸 써먹는 거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됐고, 대련 더 하자.”

“뭐? 또?”

“이렇게 은근슬쩍 쉬려고 하지 마. 난 강해질 거야.”

“아니 너 이미 충분히 강해. 혼자서 거기 있는 마물들을 다 해치웠다며?”

“그랬지. 하지만 더 강해질 거야.”

그렇게 말한 나는 하시스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에 하시스가 못 이긴다는 듯이 다시 검을 뽑았다.

후원은, 한동안 대련 소리로 가득했다.

* * *

그 뒤로도 나는 하시스를 들들 볶아 몇 번이고 더 대련했다.

‘너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냐?’라는 눈빛을 하는 하시스에게 없다고 대응한 나는, 대련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평소와 다름없이 셀라가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오자,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황녀 전하, 오셨어요? 마침 후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됐어, 이미 대련 끝났어.”

“이런, 죄송해요. 우유만 덥히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구워 놓은 쿠키가 좀만 더 기다리면 될 것 같다고 해서요.”

“쿠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올 때부터 고소한 향이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셀라가 세팅하고 있는 테이블 위를 힐끔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각종 동물 모양으로 귀엽게 구워진 쿠키가 놓여 있었다.

“난 단것 싫어해. 말했을 텐데.”

“그래서 달지 않게 만들었어요. 드셔 보실래요?”

“네가 직접 만든 거야?”

“네! 제가 한때 파티시에가 되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안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 있어요!”

그녀가 제일 처음으로 내 방으로 왔을 때 리건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황제가 된 뒤 황궁의 수많은 파티시에들이 내게 여러 가지 디저트를 만들어 바쳤지만, 딱히 나를 만족시킬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은 뒤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내 뒤에 서 있던 셀라가 살짝 흐트러진 내 리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툭.

쿠키를 한 입 베어 입 안에 넣는데, 그 순간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맛에 눈이 절로 커졌다.

‘맛있어?’

어, 어떻게 맛있지?

나는 입 안에서 서서히 퍼지는 쿠키 향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동안 수많은 쿠키들을 먹어 보았지만 이렇게 입맛에 딱 맞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입맛을 연구하고 만들기라도 한 듯한 맛이었다.

셀라는 내가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입맛에 맞으세요?”

“어…… 응.”

“다행이에요. 저번에 짭짤한 빵은 잘 드시기에, 그것과 비슷한 맛은 잘 드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빵? 그거 네가 만든 거였어?”

“네. 단 걸 싫어하신다고 해서, 주방장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잠시만 오븐을 쓰게 해 달라고 했지요.”

“주방장이 자기 주방을 넘겨줄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제가 잔뜩 애교를 떨었지요. 제가 누구예요, 그런 건 잘해요!”

곧 리본을 다 정리한 셀라가 내 옆으로 와서 코를 찡긋거렸다.

나는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입 안에 있는 쿠키를 마저 씹어 넘겼다.

이윽고 두 번째 쿠키까지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내 손에는 반쯤 잘린 병아리 쿠키가 들려 있었다.

“요리 좋아해?”

“요리보다는 빵이나 케이크, 쿠키 굽는 걸 좋아해요. 어렸을 때 동생들이 제가 구운 디저트를 너무 좋아했거든요.”

“동생들?”

“네, 동생이 셋 있어요. 다 엄청 귀여워요! 황녀 전하만큼이나 귀여워요. 아, 물론 황녀 전하는 귀여운 게 아니라 품위 있으신 거지만.

“됐어. 그 정도 귀엽다는 말까지 싫어할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사실이세요. 황녀 전하는 정말 품위 있으시고 예쁘시고 귀여우시고……!”

나는 셀라의 잇따른 칭찬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엘비어츠 공작을 한번 겪어서인가 의외로 딱히 기분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는 좋은 언니구나.”

“제가 저희 집에서 첫째예요. 그러니 동생들은 당연히 제가 돌봐야죠.”

“그러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잖아. 이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어.”

셀라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과 좋은 추억을 쌓은 그녀에게는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쿠키를 다 먹고 손을 내밀었다. 셀라가 손수건으로 내 손을 닦아 주었다. 그녀의 작은 뒤통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월급, 두 배로 줄게. 대신 내 간식은 네가 알아서 다 준비해 줘.”

내 말에 셀라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셀라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황녀 전하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는 건 제 의무인데요.”

“그게 어떻게 의무야. 너는 그냥 내 시중만 들면 되는데 간식까지 만들어서 바치고 있잖아.”

“제 의무는 시중 외에도, 황녀 전하를 보필하는 거랍니다. 그중에는 간식도 있어요.”

“하지만 네가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너를 질책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저를 질책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왜?”

솔직히 나는 셀라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잘해 줄 의무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금전적으로 어려운데,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셀라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하고 싶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보상도 없는데 왜 하고 싶어?”

“그거야, 제가 황녀 전하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셀라는 그리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낭랑하게 퍼지는 웃음에 내가 입을 꼭 다물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녀가 나를 좋아할 이유란 그저 내가 그녀의 고용주라는 사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해.”

“뭐가요? 제가 황녀 전하를 좋아한다는 거요? 그게 뭐가 이상해요. 황녀 전하는 애초에 싫어할 만한 구석이 없는데.”

“나 짜증 엄청 많은데.”

“저도 짜증 많아요. 황녀 전하 앞에서 내색 안 하는 거뿐이에요.”

“성격도 나쁘고.”

“그럴 리가요. 저는 전혀 그렇게 못 느꼈어요.”

“애들, 성가시지 않아?”

셀라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느냐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애가 왜 성가셔요.”

“손이 많이 가잖아. 뭘 해도 잘못하고, 어수룩하고, 시끄럽고. 게다가 한눈만 팔면 사고가 나니까. 저번 축제일에도 걱정했다면서?”

셀라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그녀가 풋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야 아이니까요. 아이는 원래 그래도 돼요. 아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건, 나쁜 마음을 먹는 것밖에 없어요. 그 외에는 얼마나 미숙해도 상관없어요.”

“…….”

“그리고 저번 그 사건은 황녀 전하의 탓은 아니잖아요. 나쁜 놈들 탓이지.”

영문을 모르는 셀라의 입장에서는 그럴 법했다. 그녀는 내가 끌려갔다고 알고 있으니까.

다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한테 짜증 한번 낸 적 없네.’

사실 셀라에게 말한 아이는 현재의 나와는 많이 다를 거다.

겉이 어쨌든 속은 어른이니까, 나는 일상도 홀로 해결할 수 있고, 적당하게 머리도 쓰고, 웬만한 건 다 척척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저 묻고 싶었다.

만약 내가 손이 많이 가고, 뭘 해도 야무지지 못하고 어수룩했다면 셀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물론 별 의미는 없어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곧 손을 깨끗하게 닦은 뒤 셀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키 더 가져올까요?”

“곧 저녁 시간인데 뭘, 괜찮아.”

“그럴까요?”

“그전까지 좀 잘 거야.”

“네. 알겠어요.”

말을 마친 뒤 셀라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순진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상기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돈 더 줘야겠네.’

비록 본인은 거절했지만 그래도 돈 만큼 좋은 보상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도.

‘그러면 계속 오랫동안 이 궁에 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내 계획은 내가 어른으로 돌아간 뒤 셀라를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내가 어른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필요가 있으니까.

다만.

‘시녀로 남기는 건 안 되지만, 파티시에로 궁에 남게 하는 건 괜찮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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