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5)
“어떤 거?”
“절대로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답을 바라듯 집요한 기색을 담은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클로에의 낯을 꼼꼼하게 살폈다.
퍽 가까이 자리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클로에는 얼마간 답을 내지 않았다.
혹여라도 심기가 상한 걸까, 데메트리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네가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해서 배제하는 게 아닌 거 알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에게 클로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수많았지만, 그중 그가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은 부디 무사하여서 저더러 곁을 지키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 소망과, 그녀의 대답을 바라는 마음과, 그 안전을 비는 마음이 곱해져서 그의 눈동자에 열기가 빛났다.
그 눈빛에 마음이 조금 간질간질하게 느껴져,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노력해 볼게.”
그 목소리가 새침하게 울린 그 순간. 떨구어진 이마 위로 짤막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 수줍은 기색이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데메트리안의 얼굴도,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굳어 버린 클로에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
“정말 저희가 같이 안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멜라니가 꼼꼼한 친구들 붙여줄 테니까 라비랑 단둘이 편하게 오래.”
“그렇구나……. 아가씨께서 친우분 댁에서 주무시고 오시는 건 처음 아니에요?”
“파자마 파티, 다음엔 우리 저택에서 해 주세요, 네?”
“네가 낄 것도 아닌데, 아가씨께 웬 생떼야?”
“로망스 읽을 때마다 파자마 파티 장면이 정말 재밌어 보였거든요!”
7월 마지막 주 물의 날. 클로에의 외출 준비를 도우며 폼폼과 쥘이 쉴 새 없이 재잘대었다.
멜라니와 파자마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것이 클로에가 꾸며 낸 오늘 외출의 내용이었다. 슈바츠 거리에서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외출하기 전에 행선지를 상세히 알려야 하게 된 것이었다.
탄신연 이후로 멜라니와 줄곧 편지만 주고받은지라, 궁정백 부부가 집사에게 딸애의 외출을 잘 관리하라 신신당부했음에도 납득할 수 있는 알리바이였다.
애초에 집사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탓에 아가씨의 외박을 꼭 막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로이, 편지 왔어.”
그때, 먼저 준비를 마친 미라벨이 파우더룸 안으로 들어왔다.
“루…… 캄포 대공녀께서 보내신 거야.”
캄포 대공녀, 라는 말에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나며, 폼폼과 쥘의 손동작이 잠시간 멎었다.
“대공녀가?”
제 하녀들의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클로에가 미라벨이 내민 은쟁반에서 편지와 페이퍼나이프를 들어 봉랍을 뜯었다. 평소에 루비네 앰버네 하며 보내던 것과 달리 퍽 격식을 차린 서신이었다.
「친애하는 클로에 양께.
7월의 드높은 태양을 부디 만끽하는 나날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방문을 요청드리고 싶어 이렇게 서신을 씁니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 여쭙는 바이니, 이번 주중에 괜찮은 날짜를 알려주시겠어요?
모쪼록 뜻하신 바 다 이루는 하루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앰버에게 해를 끼친 이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한 걱정을 담아,
캄포의 루시엔 드림.」
“아가씨, 미간요, 미간.”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가늘게 좁히자 클로에의 얼굴에 분을 바르던 쥘이 안타까운 소리를 내었다.
“머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나로 묶어 줘. 묶어서 아예 땋으면 덜 치렁치렁하고 좋겠다.”
“아무래도 더우니까, 그게 낫겠죠?”
제 하녀들과 그리 대거리하며, 클로에는 갑작스레 루시엔이 서신을 보낸 의도가 무얼지 상념에 빠졌다. 오늘 밤 필요한 짐을 몰래 챙기던 미라벨이 거울 너머로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대공녀가 나한테 진짜로 상의할 게 있을 리는 없겠고, 또 뭔가 할 말이 있는 건데. 나한테 해를 끼친 이라면 분명 분리 독립파일 테고…… 그런데 내가 분리 독립파 이야길 했던가?’
깜찍한 그녀의 지인께서는 크레벨 기사단이 작전을 벌인 것만 알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진상도 나름 소상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오늘의 일에 분리 독립파가 얽힌 만큼 그 내용을 얼른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무엇을 허투루 하는 법 없는 데메트리안이 분리 독립파를 잘 단속했을 테니 거기서 문제가 있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최대한 빨리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서신을 쓸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나저나, 뜻한 바 다 이루는 하루라…….’
오늘 밤, 스칸다르에 갈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나면…… 이 의뭉스러운 지인과도 속을 조금 더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으리라.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는 언제나처럼 아가씨의 아지트가 있는 앙헬라타 대로 뒤편 공지에 다다랐다. 거기에는 크레벨의 마차가 먼저 와 있었다.
“알로제 후작저까지는 데미가 바래다주기로 했으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 있어. 내일은 알로제 마차 타고 돌아갈게.”
내일 정말로 어느 마차를 타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지만.
“알겠습니다, 아가씨. 혹시 내일 필요하시면 언제든 전령 보내시고요.”
“으응, 알겠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네에, 후작저까지 다녀온 척하게 조금 둘러보다가 들어가겠습니다.”
중년의 마부가 너스레 떨며 말했다.
마부로 말할 것 같으면 요 얼마간 클로에의 외출을 함께하면서,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의 사이에 무언가 묘한 기류가 생겼음을 눈치챈 차였다. 저택 안에서 젊은 애들끼리 떠들어 대는 이야기는 몰라도 아가씨의 발이 되어 직접 보고 듣는 이야기는 있었다.
클로에가 마부를 보내는 사이, 미라벨은 하룻밤을 위한 짐처럼 여행 가방에 꾸려 놓은 오늘의 준비물들을 크레벨의 마차에 옮겨 실었다.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떠나자마자,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에게로 훌쩍 다가왔다.
“어제 푹 잤어? 오늘 늦게까지 못 잘지도 모르는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클로에는 부러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막무가내 부렸음을 잘 알아, 조금이라도 방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거였다. 높이 묶어 땋아 내린 머리카락 역시 같은 마음가짐에서였다.
새침한 표정 너머로 그런 고민이 빤히 보여서, 데메트리안은 손끝이 간질간질해졌다. 상황은 심각한데 마음은, 참.
“그, 갑옷은 왜 안 하고 왔어?”
“드레스 안에 그걸 입으라고?”
“반지는.”
“여기에 퍽이나 어울리겠다.”
그가 보채듯 물어오는 것에 클로에는 절로 툴툴대었다. 얘는 잘 나가다 정말.
“걱정 마, 다 라비가 챙겼어.”
알로제 후작저에 방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하녀들 시중 없이 입고 벗기 편한 것으로 골랐어도 드레스는 드레스였다. 밤의 작전을 위해 장만해 둔 것들은 모두 여행 가방에 담아 온 차였다.
그때쯤 미라벨과 파이겐이 짐을 다 정리한 듯하여,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탈 테니 에스코트하란 거였다.
그 손을 조금 감격한 낯으로 바라보던 데메트리안은, 이내 고이 받잡았다. 쪽, 짧은 입맞춤이 거기에 내려앉았다.
“오늘은 정말로, 잘 지켜 보일게.”
“……당연히 그래야지.”
크레벨의 마차가 대신전 성소에 다다른 것은 16시경이었다. 1황자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은 예배당에 방문객을 받지 않아서, 대신전 외부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사제 루카미오노 님을 뵈러 왔네. 친우들이 지나가다 들렀다고 전해주게.”
클로에가 ‘지나가다 들렀다’라는 부분에 묘한 강세를 주면서 말했다. 정말 지나가다 들른 것임을 강조하는 양, 미라벨이 티푸드가 담긴 피크닉 바구니를 슬쩍 들어 보였다.
알로제 후작저에 간다니 선물용으로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준비한 거였다.
‘주방에 부탁해 마카롱이랑 마들렌 좀 챙겼어요.’
……아무래도 저들의 오늘 계획이 들통나서 생긴 일인 듯하지만.
‘오늘도 유모 동료들이 따라붙었을 테니 진짜 비밀인 것도 아니겠지.’
남작부인으로서는 무언가 사고를 칠 작정인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둔 셈이었다. 그것이 민망한 한편으로, 조금 든든하게도 느껴졌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사제님들이 바빠서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사제님의 친우분들께서 이따금 그러하듯 방문하신바, 경비원은 별다른 생각 없이 급사 아이를 불러 그들의 방문을 사제님께 알렸다.
성소 내부는 과연 루카가 말한 대로 퍽 번잡했다. 와중에 루카는 저들을 맞이하겠답시고 응접실에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역시 그가 특별 대우를 받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진짜로 왔네. 파이겐 아저씨도, 이 녀석들 탐정 놀이에 놀아나시느라 고생이 많수다.”
“나야 황제의 나팔 없어도 까라면 까는 신세 아니겠냐.”
클로에 일행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기죽대는 루카의 낯은 평소의 모습대로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에 일견 침울해 보였던 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처럼 내 손님인 척하면 돼. 18시에 황자 나리께서 오시고 나서 대신전 식구들이 자기 처소로 들아가거든. 그 틈을 타서 마차 출발시키면 돌아간 줄 알 거야.”
“빈 마차로도 괜찮을까?”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인 말을 미라벨이 답싹 물었다.
“내가 잠깐 나갔다가 올까? 경, 어때요? 우리야 다시 돌아오는 거 일도 아닐 텐데.”
“어, 그게, 나는.”
미라벨이야 농브르의 단주로부터 평생을 사사한 은신술이 있겠지만, 거구의 파이겐은 누가 봐도 전방에서 적들의 이목을 한번에 사로잡는 유형의 전사였다. 미라벨의 기대를 배반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제대로 못 해내서 놀림을 받을까 싶은 걱정 반으로 고민할 때.
“성소 경비도 최소한으로 서니까. 한 19시쯤까지 어때?”
“응, 자정 넘어서 시작한댔으니까 넉넉해.”
데메트리안이 얼마 전 이올린 한센과 만나 합의한 바를 되새기며 답했다.
“그때쯤에 애들 시켜서 경비 잠깐 자리 비우게 할게. 우리 대신관 할망구 부임한 이래로 겹그믐의 날에 별일 있었던 적이 없어서, 경비도 크게 경계하지 않을 거야.”
“애들?”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무해해 보이는 게 아이들 아니겠냐.”
클로에의 반문에 루카가 문가를 눈짓했다. 평소 그가 손님을 맞이할 때 그의 부름을 받거나 누군가의 심부름을 온 급사 아이들이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아이들 몇을 성소에 머물게 하겠다고 해 뒀어. 겹그믐의 날에 성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하게 하겠다고.”
“사제님들 휴식하시는 날인데, 그런 걸 해도 괜찮아?”
“뭐, 맨날 처놀던 평사제 놈이 뭐라도 하겠다니까 할망구도 그러려니 하던데.”
루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 가볍게 말했지만서도 그는 속으로 적이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네가 하는 일이면 어머니께서 다 이해하실 테지.’
대신관은 이번에도, 그의 빤한 핑계를 다 알지만 넘어가 준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다만 지금까지는 인자한 어르신의 미소를 띠고서 그러했다면, 이번에는 그 반응이 사뭇 이질적이었다. 마치 주신께로부터 무슨 언질을 받아서 그런 것처럼.
‘내게 응답하셨을 정도면, 그분께도 무언가 목소리를 내리셨을 수도…….’
***
뎅-뎅-뎅-.
대신전 종탑에서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1황자 프레더릭을 태운 황실의 마차가 황실 친위대 기사단을 이끌고 대신전에 당도하였다. 신전의 모든 식구는 휴거를 위해 성소로 돌아갔지만, 최소한의 인원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예배당에 남아 있었다.
똑똑똑.
대신관의 집무실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답 대신 문이 열리자 안톤미오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관이 부재할 때 총관 역할을 하는 그 또한 그 최소한의 인원에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