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6)
“대신관님, 1황자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래요, 나가 봐야지요.”
젊었을 적 연갈색이었을 머리칼이 반백이 된 초로의 여성이 읽던 것을 덮고 안경을 벗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숄을 벗고 헐겁게 땋아 내렸던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어 올리는 내내, 문 근처에 서 있는 안톤미오노는 공손하게 양손을 모아 쥐고서 바닥 어스름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
대신관의 케이프를 어깨에 걸친 대신관이 안톤미오노의 얼굴을 얼마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안톤미오노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안톤미오노.”
“예, 대신관님.”
안톤미오노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대신관의 잿빛 눈동자는 늘 그랬듯, 어떤 특별한 기색도 띠지 않은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저 눈동자에 몇십 년을 휘둘린 것인지 모르겠다…… 안톤미오노가 그리 생각할 무렵이었다.
“어머니께서 형제님의 기도에 응답하신 모양입니다.”
“예? 그게 무슨…….”
“형제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루셨다고 하시더군요.”
대신관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안톤미오노는 얼빠진 표정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바라는 바……?
그가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은 대신관 후계자 자리였다. 고티유 대신전에 배속되고서 한 계단 한 계단 승급할 때마다 조금씩 더 간절히 바라게 된 바였다.
그가 상급 신관이 되고, 마침내 보물고의 열쇠를 쥐게 되었을 때.
갓 사제 서품을 받은 루카미오노가 고티유 대신전으로 배속되었다. 하급 사제로는 이례적인 온갖 특혜를 받으면서.
‘내가 정말로 무얼 바라고 있는지 아신다면, 저렇게 말할 수 없으실 텐데.’
당장 이 자리에서 대신관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겠다고 말하지 않는 한, 그가 바라는 바가 이뤄질 리는 없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그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이제 와 말을 번복한대도 이미 이야기된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안톤미오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몇 시간. 몇 시간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
“마카롱? 마들렌? 스콘? ……소풍 나왔니, 너희들?”
눈속임용으로 데려다 놓은 급사 아이들과 성소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온 루카가 손님방에 들어섰을 때. 클로에와 미라벨이 궁정백저에서 가져왔다는 티푸드를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며 루카가 짐짓 타박하듯 말했다. 와중에도 아이들 앞이라 비속어는 섞지 않는 게 가상했다.
그녀들이 들뜬 듯 구는 것이 긴장을 잊기 위해 그런 것이 빤하니 놀리자고 그러는 거였다.
“왜애, 긴장한 때일수록 뭘 먹는 게 좋댔어.”
“애들도 좋아할 거야. 아까 애들이 잘해 줘서 나랑 파이겐 경이 무사히 돌아왔잖아?”
“맞는 말이야.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경비원이 바로 자리를 비우는 게, 보통 똘똘한 애들이 아니야. 상으로 너희들도, 어르신들 드시는 것 같이 먹자꾸나.”
미라벨의 말을 답삭 받아 물며, 파이겐이 루카의 손을 잡은 급사 애들을 한 팔에 하나씩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높아진 시야에 열 살쯤 된 아이들이 꺄아, 탄성을 냈다.
‘저 아이는 그때.’
제 검을 손질하던 데메트리안이 슬쩍 시선을 던졌다.
파이겐의 왼팔에 들린 아이는 루카와 단둘이 술을 퍼마시던 시절에 보물고에 용돈 주머니를 떨어뜨렸다던 아이였다.
“보통 똘똘한 애들이 아니긴, 나처럼 성국 아카데미 갈 애들인데.”
“그래, 루카미오노 사제님처럼은 되지 말고.”
파이겐이 느물대며 하는 말에 루카는 제 성미대로 쏘아붙이지 못하고 입꼬리만 파들대며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우리 주방 디저트가 아마 고티유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걸.”
“입맛 잘못 들이면 상이 아니라 벌인데. 왜 이런 걸 다 가지고 왔어?”
루카가 장난스런 목소리로나마 클로에에게 핀잔주니, 데메트리안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내가 집에다가는 멜라니네 간다고 했거든…….”
“웬일로 우리 엄마가 안 하던 짓을 해서.”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겠지만……. 미라벨이 그리 중얼거리자, 파이겐은 식은땀이 났다.
농브르의 단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대신전에 은신해 들어가려는 모습이 어설퍼 보였던 건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 일에 긴장하여, 또 미라벨과 있으니 마음이 풀어져서 그들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것 또한 모골이 송연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밤 대신전에 몰려드는 무장 세력이 퍽 많았다. 농브르에, 크레벨의 기사단에, 분리 독립파에…….
파이겐이 아이들을 다과상이 차려진 쪽에 내려 주고서 데메트리안에게 물었다.
“크레벨 기사단은 외부에서 대기하는 거죠?”
“응, 분리 독립파가 자정쯤에 들이닥치기로 했어.”
“분리 독립파랑 동선을 맞췄어?”
클로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고조된 긴장감에 말소리가 조금 빨라져 있었다.
“응, 성배 약탈 맡은 자들이 보물고에 접근할 때까지 약속된 행동을 하는 척하면, 그들이 도망칠 때 현장을 덮치기로 했어. 경시청 쪽에 검거해 뒀다가, 왕실 쪽 인사들 잡히면 풀어 주기로.”
“약속된 행동? 헌금함 탈취하는 거?”
“신전 경비대가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목을 끌도록 최대한 크게 난리 피우는 게 그들의 임무래.”
“그들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스칸다르의 왕자에게 실망한 그 마음을 믿는 거지…….”
에둘러 표현하는 데메트리안의 말에, 파이겐은 눈동자를 굴려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겐은 요 얼마간, 내딛는 모든 걸음을 예견하고 있던 사람처럼 구는 제 주군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차였다.
‘인신매매 사건을 맡을 때까지만 해도 황명을 받드시는가 보다 싶었는데.’
그것이 올해 유독 관심을 갖던 분리 독립파와의 일로 이어지는 것도 그렇고, 역모로까지 몰 수 있는 1황자의 비행을 알게 된 것도 그렇고……. 저에게는 놀라 자빠질 일투성이인데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번번이 의연하시니 말이었다.
‘좀 허황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데…… 요즘 우리 공자님이 미래를 살다 온 건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단 말이오.’
풉, 마시던 것도 없는 미라벨이 낸 소리에, 파이겐은 그녀 또한 비슷한 사정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크레벨의 마차를 타고서 대신전에서 빠져나가는 척을 하던 때였다.
어쩐지 라크루아 아가씨도 요 얼마간 좀 색다르게 구시더라니……. 파이겐이 턱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을 수는 없어도, 믿어야 하는 게 충복 아니겠는가.
‘오늘 일이 중요하단 것만 알고 있어요. 뭐, 우리야 시키시는 일 묵묵히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누아제트 아가씨도 그러신 줄은 이제 알았습니다. 두 분이 워낙에 자매처럼 보이셔서 말이지.’
‘저도 몰랐는데, 제가 충심이 좀 깊은 모양이더라고요.’
미라벨은 클로에가 말해 준 미래에 셰비크의 왕궁에서 칼 없이 싸우게 될 제 신세를 그리며 아스라하게 웃었다. 제가 어떤 싸움을 하게 될지 고민해 왔었지만, 이제는 아르투젠에 남아 그대로 칼 들고 싸워도 될 거라니 잘된 일이었다.
꿈꾸는 듯한 미라벨의 표정을, 파이겐이 멀거니 쳐다보았다.
‘오늘 일 잘 끝나면, 저도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스르르 파이겐을 향했다. 제 주군들 신변 달라지는 것 따라 처지 변하는 신세지만, 제국에 남는다면 상황이 조금 낫지 않을까. 저도 보다 열린 미래를 상상해도 되지 않을까.
미라벨의 그런 고민을 알 리 없는 파이겐은, 그녀가 배시시 웃는 양에 덩달아 어설픈 웃음만 흘리고 말았더랬다.
“참, 로이, 챙겨 온 거 지금 입을래, 이따가 입을래?”
단둘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발랄한 미라벨의 목소리가 파이겐의 회상을 깨뜨렸다. 아이들이 티푸드 맛보는 것을 흐뭇한 낯으로 보던 클로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따가, 다 먹고서…….”
그 챙겨 온 것의 목록이 요 며칠 공자님이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마법사를 만나며 마련한 주책맞은 것들임을 알아, 파이겐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게 다가 아닌 걸 라크루아 아가씨는 모르셔야 할 거야.’
성소의 손님방에서 기다리게 된 여섯 시간은 예상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급사 아이들과 티푸드를 나눠 먹으며 애써 들뜬 척 부산을 떤 덕택이었다.
22시가 넘어 아이들이 잠들고 나자, 이내 모두가 중압감에 가라앉고 말았다.
“야, 너는 거창도 하다. 옷까지 새로 맞췄어?”
“라비랑 같이 맞춘 거거든? 드레스 계속 입고 있었으면 역시 영애님들이란, 쯧쯧, 뭐 이럴 거였으면서.”
클로에와 미라벨이 곁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루카가 부러 비아냥대어, 수순처럼 클로에와 루카가 아옹다옹하였다.
“이래 봬도 아가씨께서 한몫 제대로 하셔. 그, 아가씨 영광의 상처가 괜히 생긴 게 아니잖냐.”
파이겐이 슬며시 거들며 제 주군의 눈치를 보았다.
요즘 들어 라크루아 아가씨의 일만 되면 시선도 쫑긋거리는 귀도 못 감추던 데메트리안도 무슨 상념에 빠졌는지, 제 검만 쓸데없이 몇 번이고 광을 내고 있었다.
‘아닌 척하셔도 요즘 하시던 일이 황자님의 역모로 이어지니 꽤 골치 아프신 거겠지.’
오늘 일의 중요함을 정확히 알고 있는 미라벨, 주신의 신비까지는 몰라도 오늘의 작전이 최근 몇 달간 제 주군이 공들인 일의 결말임을 확신하는 파이겐, 제 친구들이 주신의 시험에 들었다 생각해 죄책감을 지고 있는 루카.
‘오늘 내 눈으로 확인하는 거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나 하나 좋자고 피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럴 일이 없게 되었다는 걸.’
‘오늘, 현행범을 체포하고 스칸다르 왕실에서 성배 약탈을 꾀했음을 공표하여 다시는, 로이가 스칸다르와 얽히지 않게 하는 것.’
각자 중요한 것들을 마음에 품고서 기다려 온 순간.
멀리서 도적 떼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릴 때까지, 다들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
자정이 다가오는 예배당 안, 제단 뒤편에 마련된 가장 고결한 이를 위한 기도실.
겹그믐의 날 의식을 치르고 있는 1황자 프레더릭이 석실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한가운데 제단에 몸을 기댄 채 양손 맞잡고서 기도하는 그의 낯은 일종의 고통에 잠겨 있었다.
황제를 닮아 두꺼운 하관 위, 황후를 닮아 가느스름한 눈매 너머로 황실의 상징인 금안이 불안스레 침잠했다.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석벽의 위편으로는 여덟 사도의 설화가 구현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천장을 따라 장식돼 있어, 어스름한 별빛을 색색으로 투과하였다.
프레더릭의 맞잡은 손 위로 빛의 띠가 희붐하게 드리워 있었다.
공전주기가 훨씬 긴 제2의 달 뷜이 그저께부터 그믐이어서 평소보다 어두운 밤의 나날. 제1의 달 에시스 또한 제 자취를 감추고 만 뒤라 예배당은 올해 들어 가장 짙은 어둠에 잠겼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기도하며 맞잡은 그의 두 손에 새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잠시간 모든 것을 모른 척하면, 대륙에 내려앉을 혼란이 그에게 왕관을 씌워 줄 것이다.
이런 어둑한 밤에 입 맞추곤 했던 카타리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면서부터 사랑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 나의 삶, 나의 밤 요정, 나의 사도, 나의 에르드 어머니.
그녀를 위해서 프레더릭은 가장 우매한 시골의 촌부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녀를 위해서 황제가 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리라.
거기에 작은 눈속임이…… 활용되는 것뿐이다.
땡땡땡땡땡땡땡땡.
그때, 대신전의 외벽 너머에서 외부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자비하게 우짖었다.
그러니까,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