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4)
그것이 조금 부럽다, 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 무렵.
“아냐,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오늘은 원로원 일을 좀 해야 해서.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꼭 같이 식사하자.”
“네, 그러세요.”
데메트리안이 말하는 ‘여유가 생기면’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에티엔은, 그저 눈썹만 까딱일 뿐이었다.
“연락 오면, 연락할게.”
“그래.”
***
다시 반나절이 지난 빛의 날 아침. 겹그믐의 날을 고작 이틀 남겨 둔 날.
클로에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맞추어 데메트리안과 연결된 통신구가 울렸다.
[루카에게서 연락이 와서 대신전에 가는 중이야. 혹시라도 거절하면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9시 되기 전에 도착할 듯한데…… 혹시 같이 만나고 싶으면 와. 오게 되면 연락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클로에는 하녀들을 부르지도 않고 잠옷 차림으로 미라벨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 수련을 마치고서 막 씻고 나온 참이던 미라벨이 놀란 눈초리로 클로에를 맞았다.
“로이, 눈곱은 뗐어?”
“대신전에 가자.”
“지금?”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빛났다가, 이윽고 놀란 빛을 내었다.
“루카 만나러? 연락 왔대?”
하녀들을 재촉해 급박하게 외출 준비를 한 클로에는, 10시가 다 돼서야 대신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너무 늦었으려나…….”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대신전의 정문을 통과할 때, 초조하게 회중시계를 만지작대는 클로에를 보며 미라벨이 지나가듯 말했다.
“어차피 데미 공자님이 보고하러 우리 저택으로 올 텐데, 뭐.”
“……나와 관련된 일이 내가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건, 그때로 족해.”
저 멀리 시선을 박아 둔 채 중얼거리는 클로에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걸 바라보는 미라벨은, 요즘 들어 클로에가 다시 한번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왔다는 그날 이후로 말이다.
‘그 왕자님이 꽤 이상하게 굴긴 했었지만, 정말로 이상한 사람일 줄은 몰랐으니까. 충격받는 게 당연하지.’
미라벨로 말할 것 같으면 뷔욘에 대해, 클로에가 말하는 미래에서 그녀를 불행하게 내버려 둔 자격 미달 남편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직접 마주한 그에게서 딱히 클로에를 좋아한다는 기색을 느낀 것도 아니어서, 미라벨로서야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어쨌든 그와 행복했다고 믿고 있었고 비슷한 미래를, 아니, 더 행복한 미래를 만들려고 동분서주하지 않았던가.
‘로이가 실망했다고 그대로 좌절하지 않고,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니 잘된 일이야.’
불행해질 거라며 스칸다르에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어찌 이십년지기이자 자매나 다름없는 그녀를 홀로 보낸단 말인가.
저도 덩달아 스칸다르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미래……. 미라벨은 티는 못 내도 클로에가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이 퍽 좋았다. 그걸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고.
제가 그리 상반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부디 티 나지 않길 바랄 따름이었다…….
“아, 벌써 이야기 다 끝났나 봐. 나와 있네.”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대신전 뒤편 성소 앞에 멈춰 섰을 때. 클로에가 아쉬움 한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주일 바로 다음 날인 빛의 날, 그것도 아침나절이어서 성소 뒷마당은 한산했다. 데메트리안과 루카만이 성소 현관 앞에 서서 라크루아의 마차가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늦어서 미안.”
“좋은 아침이야. 미안은 무슨, 아침부터 급히 나오느라 고생이었을 텐데.”
“내가 고생했나, 하녀들이 고생했지.”
머리를 제대로 단장할 시간이 없어 대충 쓰고 온 보닛 챙을 만지작대며 클로에가 수줍은 듯 말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의 햇살 아래서 맞이한 것이 또 나름의 감격인 양, 오늘도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해사한 열기로 빛났다.
두 사람이 수줍은 시선을 주고받는 내내, 루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에 구멍 난 건 괜찮냐, 그리 놀릴 게 빤해 보닛을 꼼꼼히 쓰고 온 건데.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루카를 바라보니, 그의 낯이 평소 제 친우들을 대할 때와 사뭇 달랐다. 어딘가 아련한 듯하고, 무언가 경이로운 것을 목격한 것만 같은…….
“고생했어, 클로에.”
얘 왜 이래? 깜짝 놀란 마음을 담아 클로에의 눈동자가 쪼르르 데메트리안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받는 데메트리안의 낯빛 역시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에르드 어머니께서 움직이신 일이 맞았어. 다만 누구를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 네가 하는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즐겁게 지켜보실 거라고도.’
데메트리안도 루카가 정확히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은 루카의 기색이 무언가 심상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저를 보자마자 클로에에게와 마찬가지로 고생했다고 이야기한 루카는 평소처럼 이기죽대지도, 쓸데없는 말로 신경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의 계획을, 성심껏 돕겠다고 말할 뿐.
두 친구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 클로에가 미라벨 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작게 으쓱일 때였다. 불현듯 루카가 입을 열었다.
“겹그믐의 날에 성소가 휴거에 들어가는 건 알지?”
“응, 다들 예배당 비우고 성소에서 쉬시는 거 말하는 거지?”
“성소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보물고 뒷문 쪽으로 이어져서 경비대에서 지키는 곳인데, 그날 신전 경비대도 성소에서 휴거하니까.”
그리고 데메트리안이 확보했던 이날의 경비 자료에 따르면, 그 자리를 대신 지켜야 할 프레더릭의 친위대는 그곳 또한 비워 둘 예정이었다.
“거기 말고도 은신할 만한 곳이 더 있는지, 그날까지 좀 더 찾아보고 있을게.”
데메트리안에게 했던 말과 동일한 이야기였다. 말수야 많아졌지만 어딘가 가라앉은 기색에는 변함이 없어, 클로에는 여전히 걱정스런 낯을 지우지 못했다.
“18시부터 휴거에 들어가니까, 그전에는 성소로 와야 해.”
“너 만나러 와 놓고 안 나가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때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쉬니까 미리 일 마치느라 다들 종일 정신이 없어. 급사 애들 도움만 받으면 별문제 없을 거야.”
루카의 진지한 기색에,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한술 더 떠, 루카의 목소리가 죄책감으로 떨렸다.
“……신전의 일에 휘말리게 된 셈이라, 너희들에게 미안해.”
“어, 얼씨구, 루카미오노 님. 교단 대표해서 입장 발표하시는 거예요? 교……황이라도 노리나 봐?”
“그러게, 낯설다, 루카.”
전혀 그답잖은 기색에, 클로에는 부러 농지거리를 했다. 그 노력이 가상하여 미라벨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으나 루카의 낯도, 데메트리안의 낯도 풀리는 기색이 없었다.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연유로 이렇게 가라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별로 신실하진 못해도 주신께서 이런 일을 네게 시험이랍시고 내리진 않으셨을 거란 건 알아.”
에르드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아이들의 일을 곁에서 살펴보시는 걸 좋아하셨지만, 그래서 신관들의 몸을 빌어 목소리를 종종 내셨지만,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방관하시는 쪽에 가까우셨으니까.
“나는 그냥,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는 거야.”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면 갈 수밖에 없는 그 길이 아니라……. 한편으로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한 그 말이 낭랑하게 울렸다.
“다른 길보다 더 나은 길이리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말이야. 평생 이런 기회를 가질 일이 누구에게 있겠어?”
“……그래, 에르드 어머니께서 네가 그리 생각하니까 즐거우시다더라.”
루카의 말에 클로에가 입을 홉 다물었다.
루카가 주신의 목소리를 받으니 퍽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정말로 지켜보고 계시다고 듣는 것은 아무래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우선…… 오늘은 얼른 가, 슬슬 신관들 나올 거야.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그래.”
“그럼 모레 보자.”
“모레 봐, 사제님.”
루카가 급히 등을 떠미는 말에, 세 사람은 지체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모든 건 그날에 달렸으니까.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카미오노는 어젯밤에야 간신히 답을 주셨던 주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슬픔이 너무 많아서 그랬단다.’
‘어쩌다 보니 네 친우들이 선택된 것뿐, 네 책임은 하나도 없단다, 나의 아이야.’
루카는 제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해 얼마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신께서는 그와는 하등 무관하다고 하셨지만…….
‘안톤을 살리고, 그 무용하고도 많았던 슬픔이 사라지면 더할 나위 없겠구나.’
제가 생각 없이 굴었던 나날 때문에 재수야 없지만 신관으로서 존경할 바가 없지만은 않은 그에게 허튼 마음을 먹게 만들고, 그에 휘말려 친구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는지.
안톤미오노의 비행은 단순히 그렇게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루카는 제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벌 받았던 일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겨서…… 에르드 어머니께 퍽 감사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경건히 굴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차에 나눠 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카가 손을 말아 쥐었다.
“……정말로 딱 이틀 뒤면.”
대신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클로에가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꼬옥 쥐었다.
그녀의 결연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그 자그만 주먹을 제 손으로 단단히 덮었다.
미라벨에게 부탁해 마차를 바꾸어 타고서 클로에를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예전이면 으레 그랬듯이, 마차에 나란히 앉아서.
어느 연회가 끝난 밤에 술기운을 핑계로야 하던 일을, 햇볕 아래서 은근슬쩍 그리하고 있는 마음이 또 설렜다. 마차가 지나고 있는 앙헬라타 대로의 활기찬 소리가 새어 들어와, 이리 나란히 앉아 손잡고 있는 순간이 마치 일상인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좋은 건, 클로에가 더 이상 곤란해한다거나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고.
‘나중에는 커튼 다 걷고도 이럴 수 있겠지.’
데메트리안은 저만의 소박한 희망을 떠올리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을 그러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에, 클로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잘되겠지. 정말로 성공해서, 떠날 일 없게 되는 거겠지. 이런 순간이 잊어야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이 작전에 뛰어들겠다고 다짐한 이후, 클로에는 이따금 셰비크 궁의 꿈을 꿨다.
스무 살로 돌아온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던 때와 반대로 그 시절을 꿈으로 꾸게 되는 거여서, 클로에는 매일 아침 복잡미묘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 아침이면 꼭 악몽을 꾸었다 생각하게 되었기에.
다정했던 부군이 준 것이 일종의 행복이기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데메트리안이 짐작한 것처럼…… 이 시절의 제가 바라던 모양의 행복은 아니었다.
하물며 제가 믿고 있던 그 운명이, 그가 꾸민 일로 인해 그리됐던 것이었다니.
‘잘하고 있는 일이야. 마침 주신께서도 지켜보신다니, 말은 그리하셔도 잘되게 될 거야.’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제 손을 덮은 데메트리안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에 깜짝 놀란 데메트리안이 저도 모르게 손을 더 꾹 쥐었다.
“…….”
“…….”
얼굴이 달아오른 두 사람은 나름의 생각에 빠진 척, 각자 커튼 꼼꼼히 친 차창만을 노려보며 별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에 다다랐을 때.
“……내일은 못 올 거야. 원로원 일을 계속 빼서, 퓌잘리 경이 단단히 화났어.”
클로에는 데메트리안과 독서회를 가지러 놀러갈 때면 사무적인 무표정 너머로 친근함을 표현해 주는 여인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준비할 것도 많고, 라구 경에게 의뢰한 것도 있고 말이야.”
“내 동업자를 너무 혹사하는 거 아냐?”
“청구서에 부풀린 금액을 적어도 내가 군말 없이 결제해서 좋대. 큰손이래.”
“라구 경답네.”
다시금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거사를 앞둔 마음이 속절없이 무거워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게 되었다.
그게 클로에만 그런 것이 아니니 데메트리안 또한 자꾸만 답잖은 농지거리를 하는 것이리라.
그리 손을 맞잡은 채로 얼마쯤 정적이 흘렀을까.
데메트리안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로이,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