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마지막 후회 (12)
「로이에게.
그곳 생활은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 스칸다르는 겨울이 빨리 온다고 들었는데.」
거기까지 적은 데메트리안은 한동안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찍어 둔 마침표가 번져 나갔다.
‘이번엔 답장이 오려나…….’
클로에가 스칸다르에 간 것이 넉 달 전.
스칸다르의 젊은 왕이 독립 협약서에 조인하러 온 그 길로 함께 떠났기에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하여, 못 본 것은 다섯 달이 넘었다.
그리고 한 번도 오지 않는 답장.
목소리건 글씨건, 그녀로부터 전해져 오는 메시지를 못 받은 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할 때마다 드는 감정은…… 허전함일 거였다.
‘혹시 화가 난 걸까?’
그 허전함이 일종의 그리움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가 그 핼쑥하고 창백한 낯 위로 비치던 초록색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때 무슨 다른 말을 해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달리 보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배 송환 협상에서 지명될 인물은 클로에밖에 없었으니까.
그녀도 분명,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닐 거였다. 그들에게 지어진 운명을 서로가 잘 아는데.
‘아직 정신없을 때기도 하겠지.’
스칸다르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편지를 썼다.
답이 없어서 의아했던 것도 잠시. 번잡한 시기인 만큼 편지가 유실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한 번 더 보냈다.
그러는 사이 휴가철이 되었고, 여름이면 라쥐르의 바다에서 그을려 오는 그녀가 생각나 스칸다르의 여름은 역시 듣던 대로 선선하느냐는 시답잖은 안부를 한 번 더 물었다.
그리고 지난달에는 국혼에 참석한다며 라크루아들이 스칸다르로 떠나는 것을 보며 그녀의 미래를 축복하는 편지를 적어 보냈고.
스칸다르가 독립하면서 제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대도, 정기 우편 창구가 닫힐 리는 없는 일인데.
‘한 나라 살림을 다 배우자면 정신이 없기야 하려나.’
편지에 답해야겠다는 생각 한번 하기 힘들 정도로 바쁜 걸까.
그게 조금, 서운하게도 느껴졌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오래간 생각해 온 대로, 데메트리안이 부인을 맞아들이기 전에 클로에가 크레벨이 아닌 다른 어디의 부인이 된 것뿐이었으니까.
‘그 왕의 모후가 있대도 궁의 안주인 자리가 비었던 셈이니까 아무래도…….’
그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리라 짐작하며, 궁의 살림을 장악한다는 일에 대해 상상해 볼 따름이었다. 황궁의 행정 실무나 공작저를 관리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일 거였다.
‘로이처럼 사람 찍어 누르지 못하는 애가 하기엔 더 어렵겠고.’
너무도 쉽게 그녀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이어서 손을 움직였다.
제가 서운해도 꾸역꾸역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클로에도 지금은 제게 서운한 게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답신하리라.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여러모로 고단하겠지만, 건강이 최고야. 감기 조심하고.
너의 벗, 데메트리안.」
그녀의 일과를 상상하면서 걱정하는 제 마음이 마치 친정 오라비의 것을 닮아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착각은 덤이었다.
***
이듬해 봄, 캄포 대공가의 타운하우스에 불이 났다. 대축일 주간이 지나 캄포 대공 부부는 캄포령으로 돌아간 뒤였고, 유일하게 그 저택에 머무르던 캄포인 루시엔은 외출 중이어서 대공가 모두 무사했다.
다만 주인 가족 지내시기에는 꼴이 비루해지고 말아, 저택을 보수하는 동안 루시엔은 다른 거처를 구해야 했다.
전해에 결혼하여 분가한 그녀의 오라비, 자코마르 백작 올리비에의 타운하우스가 고티유에 있었으나 신혼부부에게 신세 질 순 없는 법. 어른들은 어차피 들어가게 될 공작저에서 미리 지내 보는 편을 추천했다.
그렇게 루시엔 캄포의 크레벨 공작저살이가 시작되었다.
약혼 전이었으니 루시엔에게는 손님을 모시는 별관이 배정되었다. 공작저의 본관 서편으로 여느 댁 만찬장만큼 넓은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그 별관에서는 크레벨의 온실이 한눈에 보였다.
“전망이 좋네요. 좋은 방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지내렴. 비비아나가 도와줄 거야.”
여태껏 캄포와의 정혼에 대해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공작부인은, 루시엔이 공작저를 드나들기 시작하고부터 굉장히 우호적으로 굴었다.
근 서른 해 전 공작저에 처음 들어선 제 모습을 겹쳐 보아서였을까. 스체르바뇰에서부터 함께 넘어온 시녀의 딸을 루시엔의 시녀로 붙여 주기까지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크레벨 모두가 모이는 만찬 때면 꼭 루시엔이 함께하게 되었고, 주말에 공작부인이 집에 머무를 때면 온실에서, 정원에서, 또 정원이 잘 보이는 응접실에서 루시엔과 단둘이 티타임을 가졌다.
클로에가 공작저에 놀러 올 때면 공작부인과 살갑게 담소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 기시감이 갖는 의미를 생각도 못한 채, 데메트리안은 그저 새로운 풍경이 주는 낯선 감상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정략혼의 풍경이 이런 것일까.
정략혼을 먼저 경험한 그녀가 속절없이 떠올랐지만, 그 심사에 대해 공유할 방도가 없어 그는 혼자 결론 내리고 말았다.
‘로이도 선왕비와 정답게 지내고, 셰비크 궁을 슬슬 제집처럼 여기게 되었을까? 라크루아들 앞에서라도 정실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니…….’
그렇다면 저도, 낯선 곳에 기거하게 된 정혼자에게 예를 다해야 할 터였다. 제가 정혼자에게 성심을 다하는 만큼, 다른 나라에서 삶을 새로이 꾸리고 있을 그녀가 평온할 것이리라.
이는 일종의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혹시 식사하러 함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원래 아침은 혼자 간단히 때워서요.”
“좋은 저녁입니다. 혹, 주말에 승마라도 가시겠습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다음 주에 시험이 있어서요.”
그런데 그 정성이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손님 대하듯 예의를 차려 보았지만 열여덟 자그마한 아가씨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아침 식사를 꿀 넣은 요거트에 과일을 곁들인 오트밀 정도로만 때우기도 했고, 리도테 아카데미의 시험 기간이 다가온 것도 맞기야 했지만.
‘그 꼬맹이는 어디 가고 웬 까칠한 여인 하나가 들어온 건지.’
……그리 생각하기에, 어린 시절 꼬맹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것이었다.
“루시엔 양. 이번 탄신연에 어찌 참석하실 예정이십니까?”
“제가 크레벨에 의탁하고 있는 게 빤한데 따로 가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럼 드레스를 어떤 색으로 맞추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크라바트를.”
“부인께서 이미 경의 크라바트를 제 드레스에 맞춰서 주문하신 걸로 알아요.”
그럼 이만. 더 이상 대화할 것도 없다는 듯이, 루시엔은 고개를 까딱이고 별관 쪽으로 떠나 버렸다.
‘아, 진짜.’
어려웠다.
너무도 어려웠다.
지금껏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그가, 평생을 함께할 정혼자를 대함에 있어 인생 최초의 시련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그는 캄포의 마차가 현관에 다다르는 것을 기다리던 날의 날카로운 햇볕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날의 데메트리안 크레벨은 어찌나 순진했던가.
제 부모님이 그러하듯 자연스레 그럴싸한 부부의 모습으로 거듭나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실 그의 시련은 데메트리안을 제외한 모든 이가 예견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가 개인적인 관계랄 수 있는 것을 쌓았던 여성은 클로에 라크루아 단 하나뿐이었기에.
***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무슨 표정?”
“내 그럴 줄 알았다, 뭐 그런 표정.”
“내가?”
대니얼이 천연덕스럽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뭐랬냐는 듯 이기죽대는 그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치미는 것은, 사실 저 스스로를 향한 답답함인지도 모를 거였다.
“약혼식은 언제쯤 할 거야?”
“약혼은 무슨.”
“안 할 거야?”
“……하겠지.”
대꾸가 없어서 쳐다보니 대니얼이 예의 그 의뭉스런 표정을 다시 지으려 하고 있어,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덧붙였다.
“약혼은 성년 간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민법 29조 1항.”
“그래, 같이 들어오는 거 보니까 잘 어울리더라.”
그리 말하는 대니얼의 말투는 흡사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왜 춤은 같이 안 춰?”
“뭐, 아직 데뷔탕트도 안 했고…….”
데메트리안이 머쓱하게 대꾸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춤이라.
늘 첫 춤을 함께하던 이가 사라진 이후로 언젠가부터 데메트리안은 춤을 추지 않았다. 어머니와만 어쩌다 한 번씩 췄을까.
그러게. 약혼 전이나마 정혼자와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했는데, 이상하게, 첫 춤을 함께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늘 예의 바르게 꾸며 두는 그의 얼굴 너머에 어떤 고뇌가 스치는 것이 선연해, 대니얼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정혼자랑 빤히 같이 들어와 놓고 춤도 한 번 안 추면 이상한 소문 돌잖아.”
대니얼이 지나치던 시종에게서 와인 잔을 받아, 데메트리안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데메트리안은 그에 대꾸하는 대신,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벽면에 돌출된 기둥에 기댈 뿐이었다.
“……참 사교적이셔서.”
대니얼이 그의 시선이 향한 쪽을 따라 보았다. 루시엔이 오리포네 사절단의 젊은 귀족들과 미소 띤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왜, 너한텐 비사교적이야?”
“넌 왜 넘겨짚고 그러냐.”
“틀렸다곤 안 하네.”
데메트리안의 입이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대니얼은 루시엔의 사촌이었고, 동시에 크레벨이 섬기는 아르투젠 황실의 직계였다. 크레벨의 후계자로 자라난 그로서는 절대로 아니라고 선을 그어야 했으나, 데메트리안은 쉽게 대니얼의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왜 속상한지도 모르고 속상해하고 있겠지.’
힘든 건 그일 테니, 이제 와서 뭐라 타박할 이유도 없었다. 대니얼은 장난스레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게 네가 다, 여자 마음을 몰라서 그런 거야.”
“여자는 뭐 사람 아니냐.”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규범이 다르니까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
“흰소리 좀 하지 마.”
그 말소리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울려, 데메트리안은 괜히 방어적이 되었다. 클로에가 제 미래를 황제가 점지해 주기까지 기다리던 그 시간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는 괜히 마음이 침울해지려는 것 같아, 활시위를 대니얼에게로 돌렸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되는데? 혼인.”
“나야 뭐 급할 거 있나? 캄포 대공위는 황태자 전하의 자식 중 누가 넘겨받을 테고.”
“아무리 황족이라도 서른 다 돼서 결혼하면 만혼 아냐?”
“너는 네가 만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데메트리안이 무언가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캄포 대공녀가 성년이 되길 기다린다면 스물여덟이 될 거였다.
프레더릭이 지난해 스물여덟에야 황태자 책봉을 받으며 혼인한 덕에 아르투젠 귀족 사회의 혼인 적령기가 다소 높아지기야 했지만…….
‘저렇게, 혼인만 언급하면 사형 선고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본인은 몰라서 그럴 거야.’
물론 저처럼 가깝지 않고서야 그의 낯에 흐르는 희미한 고통을 알아채기란 힘들겠지만 말이다.
대니얼은 작게 웃으며 부러 장난스런 말소리를 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를 기다릴 거야.”
“정략혼이 싫어서 황태자 자리 마다한 거라고 말하겠다?”
데메트리안이 그의 낯을 흘기며 빈정거렸다.
“그거 참, 좋은 핑계네. 아바마마께서 납득하실.”
그의 말을 웃어넘기는 대니얼의 얼굴에 담긴 것이 단순한 미소라기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