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마지막 후회 (13)
황태자가 되지 않았어도 대니얼은 매력적인 신랑감이었지만, 기이하게도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영애 하나 없었다. 그 깔끔한 사생활은 얌전히 정략혼만 기다리는 말 잘 듣는 황자 연기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게 점잖음에 목숨 거는 원로원이 군침 흘리던 이유긴 했지만.’
프레더릭이 황태자에 책봉됐으니 어떤 연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혼사에 무심한 사람처럼 구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후사 생산의 의무를 지기 싫어서 황위를 고사한 줄 알겠어.’
스스로 생각해도 억측에 가까운 생각이라며, 데메트리안이 속으로 웃을 때였다.
“오랜만입니다. 제 누이가 유난일 게 빤해 제가 늘 죄송합니다, 소공작.”
“오, 내 사촌. 동시에 내 친우의 미래의 사돈. 부인도 잘 지내셨죠?”
대니얼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루시엔의 오라비인 자코마르 백작, 올리비에와 그 부인을 맞았다.
“즐거운 저녁입니다, 전하.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주홍빛 머리칼에 연녹색 눈동자를 영민하게 빛내는 자코마르 백작부인. 말레카 명문가 출신의 영애로 마탑주의 조카였다.
말레카의 왕녀가 황태자비가 되며 말레카와의 국교가 안정되긴 했지만, 철도의 기술을 쥐고 있는 건 마탑이라는 계산에서 이뤄진 혼약이었다.
올리비에와 지난해 결혼하며 고티유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자코마르 백작부인이, 데메트리안은 묘하게 불편했다.
그녀의 머리 색이며, 눈동자 색이며…… 하릴없이 떠오르고 마는 이가 있었으니까.
색채가 비슷한 것 외에 외관상 닮은 점 하나 없었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의 말레카에서 성장한 탓인지 직설적으로 쏘아붙이곤 하는 그 말투마저 그 연상을 부추겼다.
클로에가 그런 말투를 가감 없이 보이던 건 제게만이었지만.
‘데미. 이따 소고기 타르타르 먹을 때 꼭 레드와인이랑 같이 먹어. 조금 비린데, 와인의 탄닌이 세서 가려 주니까 너처럼 유난 떠는 사람도 먹을 수 있겠더라.’
‘아까 라이히 자작 영식이랑 춤췄는데, 걔 원래 그렇게 좀…… 자기가 모자라리란 생각을 못하나? 아르데보 스테인드글라스를 두고 아도르나래. 그래, 수학자 아도르나가 아도르나 수열에 따라 아르데보 양식을 발명했는지도 모를 일이지.’
스칸다르의 왕과도 그런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을까……. 그의 눈빛이 어스름히 가라앉았다.
“제후국 하나 줄었다고 이번 탄신연이 퍽 적적하지 않던가요?”
마치 데메트리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자코마르 백작부인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여름 스칸다르가 독립하면서 제국 연방에서 탈퇴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뭐, 여러 가지 걱정을 덜었으니 황실은 이 소박한 연회로도 만족합니다.”
“어머, 2황자 전하께서 황실의 의견을 대표하시는 건가요?”
“……라고, 황태자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는 이야기죠.”
대니얼의 능청스러운 말에 자코마르 백작부인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내년 가을은 그래도 좀 기대해 볼 만하겠어요. 황태자 전하의 30세연이니 스칸다르에서도 사절을 파견하지 않을까요?”
“30세연이 뭐라고요?”
자코마르 백작부인이 나타나고서부터 슬며시 대화에서 빠져 있던 데메트리안이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아, 이이가요.”
“예, 제가 작년 성배 송환 협상 때 황태자 전하를 수행했잖습니까? 그때 보니까 스칸다르 왕과 퍽 가까워 보이시더라고요.”
“황태자 전하랑요? 두 분이 친했……나요?”
대니얼을 슬며시 쳐다보자, 그도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이이가 잘못 본 건 아닐 거예요. 작년 스칸다르 국혼 때 제 아버지께서 사절로 가셨는데 비슷한 얘길 하셨거든요.”
“아바마마께서 스칸다르 선왕과 호형호제하신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군요.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와인 잔에 든 것을 마셨다.
연회의 1부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넉 잔째 마시는 거였다. 함께 춤추고 데려다줄 이가 있을 때라면야 2부가 마칠 때까지 많아야 석 잔으로 끝내던 것이었다.
***
「친애하는 클로에에게.
얼마 전에 에티엔을 만났어. 잘 지낸다는 이야기 들으니 좋더라.
예전에 너랑 읽었던 오펜바흐 남작의 근세 정치사 신간이 나와서 보내. 서책류는 관세 조정이 덜 끝났으니 스칸다르에 들어가자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늘 행복하게 보내고 있기를.
너의 벗, 데메트리안 크레벨.」
혼자서 아이펠의 마장에서 승마를 하고 온 어느 주말 저녁, 데메트리안은 정말로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며칠 전 셰비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온 에티엔을 마주친 이후로 편지하고 싶은 마음을 가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기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매일을 달구는 소망이었다. 그는 늘 클로에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그녀에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글줄밖에 없어서 매일같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아, 이런 얘기는 로이가 재밌어할 텐데. 다음에 로이 만날 때…… 아.’
‘오펜바흐 남작의 신작이면, 독서회 때…… 맞다.’
업무의 틈에서, 일상의 한중간에 반사적으로 그녀를 떠올리는 때가 수많았다.
그 마음이 누적되고 또 누적되었지만 해소되는 일은 없었다.
글로 적을 수야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낼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보내던 것을 답장이 오지 않아 한 달 걸러 한 번씩, 그래도 답장이 오지 않아 계절마다 한 번씩 보낼까 말까 하게 된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모으고 모으고 또 모았다가, 그녀가 제 편지를 기꺼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그 편린조차 담지 않은 멋없는 문장이나 적게 되는 것이었다.
크레벨 소공작의 서재에 ‘친애하는’으로 시작하는 종이 쓰레기가 매일같이 나오게 된 것 또한 벌써 1년이 다 되었다.
그렇게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적다가, 구기거나 찢어서 버리고 나면 그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들어찼다.
무언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
이토록 오래간 그녀와 이야기하지 못한 적이 있었을까?
화가 났는지 물어도 될까? 제국의 공작가 후계자와 스칸다르의 2왕비에게 그런 우정이 허락될까?
혹시…… 그녀에게 무슨 변고라도 있는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질문 앞에서, 데메트리안은 언제부턴가 위스키를 마시지 않으면 잠 못 드는 이가 되고 있었다.
***
“안에 계시지?”
“예. 그런데 잠시 대화 나누시는 중이라, 잠시만요.”
“그래.”
일찍 귀택한 어느 물의 날. 루시엔이 리도테에 통학하며 쓰는 캄포의 마차가 뒤뜰에 주차돼 있는 것을 보고서, 데메트리안은 그대로 별관으로 향했다.
요 며칠 그녀에게 용건이 있었는데 무엇이 그리 바쁘신지 통 얼굴을 볼 수가 없던 차였다.
병약함을 핑계로 고티유에 발걸음 한번 않던 그 캄포 대공녀가 누구였냐는 듯, 루시엔은 그녀 또래의 귀족들 사이에서 일인자로 거듭나 있었다. 매일같이 다과회에 다녔고, 탄신연 같은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면 꼭 권세 좋고 부유한 가문의 영식들과 춤을 췄다.
황제의 조카에게 잘 보이려는 이가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크레벨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 비싼 얼굴께서 일찍 귀택하셨으니, 며칠을 묵힌 용건을 꺼낼 때였다.
잠시 뒤 별관의 응접실에서 나온 것은 중절모를 쓴 사내였다. 검은색 로브 아래로 튜닉 속에 받쳐 입은 얇은 가죽 갑옷이 선명히 보이는 체격 좋은 사내.
‘이 자는 분명, 대공녀의 마부인……. 마르티노였던가.’
그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지나가는 것을, 데메트리안은 눈으로 답하며 살폈다.
마부가 제 아가씨의 응접실에까지 드나들 일이 뭐가 있어서……?
그 의아함을 삭이며 데메트리안은 응접실로 들어섰다.
편한 실내용 드레스 차림의 루시엔은 언뜻 서류로 보이는 종이 뭉치를 정리하고 있었다.
뭐, 대공녀를 오래 모신 이라 했으니 개인적인 심부름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 구매대금 같은 거려나.
그 구매 품목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서, 데메트리안은 간단히 생각하고 말았다.
“앉으세요.”
마르티노가 있을 때 앉았던 그대로 상석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루시엔은 제 오른편의 자리를 권했다. 문에서 가까운 자리였다.
빨리 용건 마치고 나가라는 건가.
데메트리안이 쓴웃음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어쩌죠. 마시던 차가 실키웨이밖에 없네요.”
크레벨에서 쓰는 고급 찻잎으로 우린 게 아니라 네게 안 준다는 소리였다. 데메트리안은 오기 반, 그것을 좋아하는 여인이 떠오른 마음 반의 심정으로 내뱉었다.
“좋습니다. 집무실에서 늘 마시는 건데요.”
데쎄르의 비스킷 통은 공작저로 들고 오고 말았지만, 그녀와 늘 함께 마시던 차만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었으니까.
의외라는 듯 눈썹을 작게 들어 올린 루시엔은 하녀에게 손짓해 여벌의 찻잔을 내오게 했다.
그 하녀가 캄포 대공가에서 따라온 자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손님께 박대받는 꼴을 사용인들에게 보일 뻔했으니.
하녀가 찻잔을 가지러 간 동안 데메트리안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별관에는 늘 부모님 손님만 드나드셔서, 여기 응접실엔 처음이네.’
그리 생각하며 굴린 눈동자에, 퍽 이색적인 것들이 몇 가지 들어왔다.
램프가 놓여 있어야 할 장식장 위에는 두툼한 나무를 깎아 만든 삼지창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중앙부에 이목구비를 조각한 데다 검고 뻘겋고 허옇게 도료가 덕지덕지 칠해진 것이 조금 섬뜩했다.
“토템……이군요?”
창문에는 뜨개로 만들어진 원반 아래 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곰베르 산맥 부족 양식의 걸개도 걸려 있었다. 또 한편에는 붉은 물감으로 서대륙 문자가 난삽하게 적힌 서예화가, 또 다른 곳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듯한 와인 병 높이의 촛대가 있었다.
“……다양한 문화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루시엔의 짤막한 코웃음이 울렸다.
“크레벨에는 꽤나 어울리지 않지만, 제가 다양한 문화권의 미신에 관심이 많아서요.”
“뭐, 크레벨도 그다지 신실한 가문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신실하지 않다라. 그리 중얼거리는 루시엔의 새까만 눈동자가 낯선 빛으로 빛났다.
“그럼 간절한 게 없는 가문이실까요.”
데메트리안이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썹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전 무엇에든 바랄 만큼 간절한 게 있어서요. 아직 이뤄지진 못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내던 루시엔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이윽고 하녀가 찻잔을 내오자, 두 사람 모두 얼마간 찻잔에만 입술을 묻었다.
그 침묵이 다소 길어질 무렵. 데메트리안은 제 용건을 기다리며 그녀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이유 없는 적의……. 짜증을 느끼며 데메트리안은 입을 열었다.
“저, 루시엔 양.”
“네.”
기다렸다는 듯 소리 없이 잔을 내려놓은 루시엔이 데메트리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다음 주말에 시간 됩니까?”
“다음 주말요.”
“알로제 백작가에서 결혼식이 있어서.”
“파트너가 꼭 필요하신 건가요? 저희가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