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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33화 (133/189)

133화. 마지막 후회 (11)

루카를 성국 아카데미로 떠나보낸 적이 있지만 그땐 그야말로 앓던 이 빠진 심정이었다. 그가 언젠가 돌아올 줄도 알고 있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클로에는 제가 원해서 떠나간 것이 아니었고, 그 모양새도 불쾌했다.

그래, 불쾌…….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전 근무만 마치고 가뿐하게 퇴근하는 물의 날, 춤 한 번 추지 않고 신사들과 정무 이야기만 늘어놓는 황궁 연회, 그러고서 어디 들를 것 없이 바로 귀택하는 크레벨의 마차 안…… 그 순간마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녀의 혼처가 그리 결정된 데 대한 불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상 조로 궁정백의 보수적인 정치관을 반영해 1황자 프레더릭을 황태자로 책봉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불쾌한 일임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그렇지만…….

클로에 라크루아가 없는 아르투젠의 시대는 열리고 말았다.

***

“축하해, 미래의 캄포 대공.”

“휴우, 정말 지난했다.”

대니얼이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너스레 떨었다. 데메트리안은 저나 에티엔 앞에서만 보이는 그의 친근한 모양새에 비죽 웃고 말았다.

대니얼은 지난 8년간, 그를 제 형과 맞붙이려 노력하는 원로원 어르신들의 유혹을 견디는 데 성공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황실을 사랑했고 제 형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 너른 마음이, 데메트리안처럼 내심 그를 지지한 젊은 귀족들에게는 아쉽게만 여겨지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로서도 그를 좋아했기에, 데메트리안은 그가 바란 바를 이룬 걸 축하해 주는 선에서 아쉬움을 정리하고 말았다.

“대공께서 빨리 은퇴하셔야 할 텐데. 올리비에야 수확제 때 작위를 받을 것 같고, 너와 루시엔만 결혼하면…….”

그리 말하던 대니얼이 피식 웃었다.

정혼에 관해 이야기만 꺼내려 하면 제 얼굴이 확연히 굳어지는 걸, 저 귀여운 친구는 평생 모를 거였다.

대니얼은 좌불안석인 듯한 그의 낯을 모른 체하며 말을 이었다.

“참, 다음 주 물의 날에 퇴근하고 뭐해?”

“물의 날에는…….”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물의 날. 클로에와 둘만의 독서회를 갖던 날.

저도 모르게 안 된다고 말하려던 것을 깨닫고 그는 스스로 다소 어리벙벙해졌다.

“뭐, 바로 귀택하든가 하겠지. 왜?”

“그날 겹그믐의 날이잖아. 같이 가서 루카미오노랑 식사라도 하자고.”

“작년에도 네가 갔잖아. 올해도?”

“형님은 슬슬 국혼으로 바쁘시니까. 재작년에 난리가 나서 그런가, 제3기사단 오는 걸 좋아하는 눈치고.”

“재작년?”

“그때 신전에 도적 들었었잖아. 헌금함 털어서 달아난 거. 사제 하나 죽고.”

“아아……. 그게 그날이었나.”

황족이 하룻밤 꼬박 밤을 새며 기도하는 그 경건한 시간에, 하필 그런 잡범이 들어서 황실과 신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더랬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데메트리안은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성배 환수 협상을 완수한 공을 인정받아 황태자에 책봉된 프레더릭. 그 성배가 보관되었던 대신전 보물고. 대신전을 혼란에 빠뜨린 도적떼.

……아니겠지. 아닐 거야.

너무 위험한 상상이었다.

***

“아, 그렇지. 데미야. 이번 주말에 별일 없지?”

“그렇죠. 겨울 치 예산안도 다 마쳤고.”

“그, 루시엔이 고티유에 와 있는 건 알지? 리도테에 다니느라고.”

“그렇다더군요…….”

“바람의 날에 오라고 했다. 빤히 아는 사이에 데뷔탕트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정 없겠다 싶어서.”

“……예.”

차곡차곡 심지가 다 타 버린 폭탄처럼 정혼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슬슬, 약혼인가.’

제가 여덟 살일 때 캄포 대공이 득녀했다는 소식과 함께 확정된 운명이었다. 설렐 일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황실 소년 병사단에서 또래 영식들의 신망을 얻고,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으로 활동하고, 원로원에 들어가 관료로서의 유능함을 뽐내게 된 것처럼…… 캄포 대공녀와 혼인하는 것 역시 예정된 그의 인생이었다.

정혼자가 성년이 되면 약혼하고,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하는 것.

이 정도로 감흥이 없어도 될까? 그런 생각은 들었다.

언젠가 그리될 줄 알았지만 정말 그리되자 속절없이 슬퍼졌던…… 클로에의 정략혼 소식을 접했던 날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래, 그것도 무덤덤할 줄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꽤 슬펐지.

제 정혼도 그럴 거였다.

‘대공녀가 성인이 돼야 약혼이라도 할 테니, 앞으로 또 3년.’

성인인 대공녀라.

아무리 상상해도 그의 기억 속 루시엔 캄포가 여섯 살배기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였을까.

조금 아득하게도 느껴지고, 조금 껄끄럽게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금껏 크레벨의 후계자로서 밟아 온 일련의 일들처럼 그에게 마땅히 지워진 의무였고, 그러니 군말 없이 수행하면 될 일인데.

왜, 자꾸만 클로에의 생각이 나는 걸까.

‘그러니까 말인데……’

정략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만난 날 절박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결국 로이가 말하던 대로 돼서일까. 로이가 먼저 결혼하고, 캄포 대공녀가 성인이 되면 내가 결혼……하고.’

집에 가기 싫다며 데미랑 결혼하겠다는 투정에 어른들이 캄포 대공녀를 언급하기 시작하자, 언젠가부터 어린 클로에는 그렇다면 제가 먼저 결혼할 거라고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정말로 그리되고 말았다. 뭐, 제 정혼자는 나이가 한참 적었으니까.

‘로이가 결혼……했지. 보지는 못했지만.’

캄포의 성배가 대신관의 보물고에 당당히 돌아온 것을 보면, 그 혼약이 성립된 것이 맞았다.

데메트리안은 제 서재에서 홀로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난생처음 홀로 술을 마시게 된 심사를, 저도 몰랐다.

캄포의 대공녀가 오기로 한 전날 밤 역시 데메트리안은 제 서재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하지 않으면 잠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진 탓이었다.

‘로이도 결혼을 앞두고 심란했겠지?’

그래서 자꾸만 그녀의 생각이 나는 것 아니려나.

‘친구 못 사귀면 어쩌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성적 안 나오면 라크루아 망신 당하는 거 아냐? ……원래 이렇게 떨리는 거야?’

열다섯 살의 클로에 라크루아가 리도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을 며칠 앞두고 바로 이 방에서 수선을 떨던 것이 선연했다. 청강생으로나마 리도테 생활을 했던 그에게 앓는 소리를 내뱉던 또랑또랑한 말소리.

저기 책상으로부터, 이쪽 책장까지를 한 다섯 번쯤 왔다 갔다 했었지.

책이 상하지 않도록 채광을 최대한 줄여 놓은 그 방에, 그녀의 귤빛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려 오후의 볕을 들여놓은 것 같았던 그 풍경.

데메트리안은 서재의 소파에 앉아 응접탁자 위로 다리를 뻗어 두고서, 특별할 것 없는 공간에 그리운 시간을 겹쳐 보았다.

그의 손에는 원통형으로 된 양철 케이스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한 손에 뚜껑 부분을 쥐고 이렇게, 저렇게 돌리니 종이에 싸인 것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사락사락 났다.

원로원 응접실에 더 이상 그 비스킷을 먹으러 올 사람이 없어서 치우기로 했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집에 들고 온 것이었다.

속에 든 걸 사용인들에게 나눠 줄까도 생각했지만…… 염두에 두고 산 이가 있어서 또 그러지 못했다.

‘로이가 결혼을 했고, 나도 캄포 대공녀와 교류를 시작하고, 언젠가 결혼하고……. 이리 될 줄 알았던 일이야.’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는 그 일들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은 계속 양철통을 움직여 종이 껍질 부딪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면 그 속에 든 걸 바스락 까서 입에 넣고 오독대던 아가씨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원로원의 응접실에서.

***

가을의 예민한 햇살이 공작저의 현관을 가득 채웠다. 캄포의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고서, 크레벨들이 모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가벼운 정장 차림으로, 긴장하신 부모님의 뒤에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정혼의 주체는 저일진대 제가 생각해도 참 남의 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서약에 내 의지가 반영된 건 아니니 주변인은 주변인일까.’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데메트리안은 캄포의 마차가 정문에서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덟 살 어린 정혼 상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이 11년 전이었던 캄포 대공녀.

잘 기억나지도 않는 여섯 살배기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 발밑이 붕 뜬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지금 열일곱이라고 했지.’

어떤 여인으로 자랐을까. 외모는 어떠하며 성정은 어떠할까. 뭐, 책임감 있게 신실한 짝이 되면 부모님 정도로는 지낼 수 있지 않으려나.

앞으로 제가 맞이하게 될 생활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오랜 이성의 친구가 있었기에, 이성을 대함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것이 서로에게 꼭 맞는 인간으로 자라난 클로에를 제외하면, 크레벨 소공작의 위명을 동경하는 영애들의 배려 덕이었던 것도 모르고 말이다.

‘일종의 동업자 같은 사이가 될 거니까.’

동질감. 그가 오래간 이름으로만 기억해 온 루시엔 캄포에 대해 가진 감정은 딱 그런 류의 것이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두 가문 간의 정혼을 태내에서부터 의무로 짊어진 이, 그리고 그 의무를 함께 수행하며 살아갈 이.

어느새 캄포의 마차가 공작저의 현관 앞에 다다랐다.

소탈한 캄포 대공의 성품을 닮아서일까, 꾸밈새가 유난스럽지 않은 마차였다. 호위를 겸하는 듯한 마부가 재빨리 내려,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공작부인.”

수도에서 가장 명성 높은 디자이너에게 맞췄을 것이 분명한 최고급 드레스를 몸에 휘감은 여인이 내려섰다. 작은 모자에 달린 망사로 된 페이스베일 너머로 검은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차분한 색감의 드레스에 장식된 레이스와 벨벳 리본에 맞춘 검은색인 그 페이스베일은, 묘하게 상복……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일종의 동업자, 그녀를 뜯어보는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어서 오거라. 주말에 제도서부터 나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갓 제도 생활 시작한 아가씨를 주말에 친구도 못 만나게 불러들여서 미안해요. 제도 생활은 좀 적응했고?”

“이제 막 길이나 익히는 정도랍니다.”

제 부모님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는 그 여인은 참으로 작았다. 그에게 작지 않은 여인이 드물었지만, 그중에서도 작았다.

작은 키, 가녀린 체구, 이마를 덮은 앞머리 때문에 더 작아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그녀를 더욱 어려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했을 때.

데메트리안은 제가 그녀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 나한테 가장 익숙한 사람이 로이니까…….’

그는 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꾸벅였다.

“오랜만입니다. 데메트리안 크레벨입니다.”

그의 말소리를 들은 루시엔 캄포가 치맛자락을 잡으며 깍듯하게 인사해 보였다.

더 작네. 자연스레 다른 누군가의 머리 높이와 그녀의 것을 가늠하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고개를 들어 올린 루시엔의 페이스베일 아래로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야트막한 조소…… 같아 보였을까.

그것이 그를 한심해하는 것이었음을, 데메트리안은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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