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마지막 후회 (10)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안의 머리칼이 무슨 색인지 클로에는 확실히 알았다.
‘디에크 경!’
뷔욘의 호위 기사, 디에크였다.
클로에는 꼼짝도 못한 채 눈동자만 속절없이 떨었다. 데메트리안이 그녀를 엄호하는 중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분리 독립파가 바닥에 떨어졌던 기사의 검을 주워드는 것이 보였다.
“조심해!”
데메트리안이 자세를 넓게 벌려 서며 클로에를 그들로부터 온전히 가렸다. 클로에는 분리 독립파의 움직임을 주시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
‘……으윽.’
희미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뭐지, 이거.’
숨이 조금 헐떡여 왔을까.
심장이 쿵쿵 뛰며 시야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면.
진동하던 물담배 냄새가 언제부턴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건물을 메운 그 증기가 날아가서가 아니라……
‘코가 마비된 거였나.’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대던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뒤편의 벽에 몸을 기댔다.
시야가 마치 1초 단위의 연속 판화처럼 흘러갔다. 천천히.
클로에는 다리가 풀리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며 벽에 기댔다.
챙, 채앵! 데메트리안이 검을 부딪는 소리가 웅웅대었다. 그때,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은 것을 확인한 분리 독립파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피해야 하는데…….’
그의 손이 주머니에 들어갔다가, 천천히 빠져나오더니, 그 손을 치켜들어, 손에 쥔 폭탄을……
“로이!”
곁눈으로 상황을 판단한 데메트리안이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쾅!
궤도가 바뀐 폭탄은 다시금 벽에서 터졌다.
“잠깐만 참아!”
데메트리안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나 파이겐이야 독이나 환각제에 어느 정도 내성을 기른 이들이라, 간접 흡입이 일반인에게 효과를 낼 거란 생각을 못했다.
얼른 이 기사를 해치우고, 클로에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 데메트리안이 끈질기게 달려드는 기사를 상대할 때였다.
쩌저적.
불길한 소리가 났다. 클로에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벽이…… 무너지나?’
클로에는 벽에 기댄 팔을 밀며 똑바로 서려고 했다.
“공자님!”
파이겐의 고함이 실내를 울렸다. 데메트리안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을 때, 디에크의 검을 거세게 받아친 파이겐이 제 뒤편을 향해 턱짓하고 있었다. 디에크의 얼굴에 혈흔이 났다.
챙!
다급히 검을 받아쳐 시간을 번 데메트리안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안팎에서 수난을 당한 벽면 전체에 위태롭게 금이 가 있었다. 클로에가 기댄 벽이었다.
챙!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의 검을 날려 버리고서 몸을 돌리기도 전에.
쾅!
분리 독립파가 폭탄 하나를 벽에 투척했다. 거미줄만큼 촘촘하게 금이 가 있던 벽면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로이!”
벽에 지탱하고 있던 클로에는 제 코를 스치는 그의 헛손질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시야에 5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들어왔다.
어어, 나 떨어지나……?
퍽.
암전이었다.
* * *
“로이, 로이…….”
대신전으로 내달리는 크레벨의 마차 안, 데메트리안은 하염없이 클로에의 이름만 부르며 그녀의 얼굴만 쓸었다.
머리에서 피가 많이 빠져나가서였을까, 차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파리했다.
무너진 벽 너머 난간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피 흘리는 클로에를 안고서 달리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데메트리안은 파이겐에게 현장을 정리하라 소리치고는 곧바로 루카에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1분에도 다섯 번씩 그녀의 콧가에 숨결이 느껴지는지 확인했다. 뒤통수를 단단히 지혈해 둔 그의 프록코트는 원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루카, 루카미오노를 만나러 왔네. 로이가 위급하다 하면 알 걸세.”
“예, 예.”
불침번을 서던 신전 경비가 급사를 보낸 사이, 데메트리안은 클로에를 안아 든 채 성소 현관을 서성였다.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밀려드는 불안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 팔에 달린 일 인분의 무게쯤은 그의 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몇 분도 되지 않는 루카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무슨 일이야?”
야심한 밤에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루카는 가운도 제대로 못 걸치고서 뛰쳐나왔다.
데메트리안이 이 시간에 온 것도 이상했지만 클로에가 위급하다니……?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급사의 전언에 얼빠진 얼굴로 성소 문을 열어젖힌 루카는 깜짝 놀랐다.
달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뒷마당, 데메트리안이 처음 보는 얼굴로 서 있었다. 잔뜩 흐무러진 그의 낯에는 절망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의 셔츠에는 피가 잔뜩, 그리고 그의 팔에 안겨 축 늘어진 여인.
“빨리 들어와.”
루카는 제 방에서 가장 가까운 손님방을 내주고, 급사를 시켜 신전 구빈원의 당직 의원을 불렀다.
대충 용태를 듣고 온 의원이 클로에의 머리를 처치한 뒤 루카가 제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괜찮겠지?”
“아까 들었잖냐. 며칠 안 걸릴 거라고.”
“그런데 왜 안 깨어날까.”
“무슨 신성력이 만능이냐?”
“…….”
만능, 아니었나.
데메트리안은 침통한 낯으로 루카의 손에 맺힌 빛무리를 흡수하고 있는 클로에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미라벨이 도착한 건 자정이 조금 넘어서였다. 메리앤을 친위대 기사들과 함께 먼저 귀택시킨 후에 달려왔더니, 파이겐이 현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30분을 못 버텨서!’
미라벨은 말없이 클로에의 침상 옆에 주저앉았지만, 데메트리안은 그녀가 제게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두머리는 도망쳤고, 여덟 정도가 숨이 붙어 있어서 경시청에 인계했습니다. 기사들은 공작저로 귀환했고요.”
나지막한 보고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실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이겐이 바로 옆의 다른 방으로 가고, 미라벨이 궁정백저에 연통을 보내는 동안 데메트리안은 내내 클로에의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기도하듯이 침대 위에 깍지 껴 둔 손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저택에 연락해 두었어요.”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미라벨이 말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신전에서 잔다니 믿으실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라벨의 얼굴이 씁쓸하게 빛났다. 달빛이 창문을 지나며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더욱 괴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두 사람은 얼마간 말없이 클로에만 지켜보았다.
“……제가 있을게요. 공자님은 가서 쉬세요.”
“아닙니다. 제가 있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미라벨은 그의 말끝에 그런 소리가 덧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얄미운 적이 많았다. 클로에가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고 고뇌하는 걸 볼 때마다 그의 애매함이, 솔직하지 못함이 미웠다. 이제는 요령이 없어서 클로에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 한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의 어깨가 작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서 거의 엎어질 듯이 상체를 기울인 채, 클로에의 낯만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아주 미세한 기적이라도 비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얄밉지만, 원망스럽지만, 한심하지만. 싫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만큼 클로에를 아끼는 이가 없었으니까.
저이는 왜 저렇게 미욱해서. 바보 같아서.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제 마음에만은 그리도 서툴러서.
미라벨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먼저 눈 붙일게요.”
“…….”
차마 다른 방에 가서 잘 수가 없어, 미라벨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담요를 덮었다. 둘 다 날밤 지새우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으니.
한참 뒤, 미라벨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울려올 무렵이었다.
끄응, 클로에의 입가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신성력으로 급히 회복력을 끌어올렸지만 면역 반응으로 인해 열이 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동그란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 데메트리안은 물수건으로 조심스레 이마를 닦아냈다.
‘조금만 늦었으면 뇌에 큰 손상을 입었을 수도 있습니다.’
‘간접으로라도 환각제에 장시간 노출되셨으니 깨어나시는 게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복도에서 의원과 루카가 주고받던 말들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클로에의 낯은 여전히 달빛 아래 조각상처럼 창백했다.
제 고통만큼 그녀가 확실히 안전할 수 있다면 평생을 감내하리라. 제가 괴로운 만큼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눈뜰 수 있다면 얼마든지 괴로워하리라.
곰베르 산맥의 정점에서 산신의 분노를 홀로 짊어지고 있다는, 그 거인과도 같이.
모든 게 다, 제 탓이었다.
그녀를 직접 보호해야만 안심이었다. 제가 그녀를 가장 아끼니까.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을까.
오늘 슈바츠 거리에서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릴 걸 그랬다. 그랬다면 요즘 저를 피하는 그녀가 이 근처에 오지 않았을 텐데.
분리 독립파를 주시 중인 걸 말했어야 했다. 인신매매 사건에 스칸다르인이 얽혀 있는 걸 말했더라면 그녀가 그들을 좇지 않았을 텐데.
스칸다르의 왕자에 대한 것도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왕자를 경계하고, 스칸다르의 것들을 조심했을 텐데.
그녀의 행복을 바란답시고 똑바로 말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었다. 그녀에게 선택지가 없었던 게 문제가 아니라 유일한 선택지에 불행할 가능성이 있는 게 문제였다. 그런 선택지는 없애 버리고, 어떻게든 행복할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하면 되는 거였는데.
아니, 그 전부터…… 그녀의 절박한 눈동자를 피했고, 대답을 회피했고, 성배 도난을 막고자 하는 제 계획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리고, 그리고…….
수년 전 그녀를 그리도 허무히 보냈고.
그 모든 시간을 돌아 이렇게 그녀를 제 눈앞에서 다치게 하고 말았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각하고서 정말 매 순간이 후회였다.
그들을 비추던 달빛이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깊은 어둠에서 데메트리안은 작게 어깨를 떨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만큼 떨리는 손길이, 이불 위에 포개 둔 클로에의 손에 내려앉았다.
수십, 수백 번을 마주 잡은 손. 햇볕 아래서는 마차에 오르내릴 때가 아니고서야 맞잡지 못하는 손.
이 손을…… 마음껏 잡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그의 눈가에 달빛이 고였다.
“나는, 너를 이미 한 번 잃었어.”
데메트리안의 손이 클로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하면 그녀의 그 무엇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니 다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손길로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클로에의 팔이 맥없이 그편으로 딸려 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갖다 대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 아래서 그의 눈에 고였던 것이 뚝, 떨어져 내렸다.
“다시는,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어.”
그건, 일종의 기도이자 맹세였다.
* * *
‘나는…… 스칸다르의 왕자와 결혼했었어.’
‘너도 알잖아, 그렇지……?’
아느냐면, 너무 잘 알았다.
그걸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단 한 순간도 그를 내버려 둔 적이 없어서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그는 숨을 쉴 때마다 그 사실에 확인 사살당하는 느낌으로 살았으니까.
수확제가 열려 연회에 참석했지만, 그녀가 없었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 왔지만, 그녀가 없었다.
크레벨 온실에 프리지아가 폈지만, 그녀가 없었다.
이 연회에 참석했고, 저 무도회에 참가했고, 또 그녀와 독서회를 갖던 물의 날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고, 첫눈이 오고, 승마를 가고, 해산물 요리를 먹었지만 늘, 그녀가 없었다.
그 모든 순간에 데메트리안은 매번 새로이 깨달았다. 그녀를 잃었다는 것을.
* * *
처음에는, 그저 이별이란 다 이런 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