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7)
“좋은 오후야.”
“……응, 좋은 오후.”
아무리 물의 날이어도 낮에 치러지는 사교계 모임에는 발걸음하는 일이 없던, 그래서 원래도 이 살롱에 참석하지 않았던 데메트리안이었다.
클로에의 얼굴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크레벨 공작부인이 함께한 것도 잊고서.
제이크 콜린스와 환담을 나눌 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슬며시 내려가고, 호선을 그리던 눈매가 풀어지는 그 작은 변화에서도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저와 마주친 것을 껄끄러워하고 있음을.
‘……그래도 괜히 온 건 아닐 거야.’
데메트리안이 이 자리에 온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에 기인해 있었다. 결정 자체는 충동적으로 내렸지만, 기실 그는 늘 그녀와 어떻게든 마주치고, 기왕이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해 왔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는다거나, 어느 날 갑작스레 데이트를 신청한다거나, 밤을 틈타 그녀의 발코니로 숨어든다거나…….
그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 이따금 그녀를 곤혹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직 크레벨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 제가 감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자제할 뿐이었다.
아이펠 장원에서 제가 못나게 굴어 버린 이후로는 더더욱…….
제게 그럴 자격이나 있던가.
그럼에도 그리움이 깊어질 때면, 언젠가의 그녀의 말소리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다음 주 알로제의 정찬회에 올 거지? 응?’
‘앨포드 후작가의 무도회 정도면 갈 만하지 않아? 공작 부부께서도 오실 테니, 너까지 오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루이폴트까지 다 같이 오면 보기에 좋을 거란 뜻이었어.’
‘어차피 시험 기간 끝나서 아카데미 안 가도 되잖아? 그냥 한 번쯤 다과회도 와 보면 어때?”
그녀가 공작저에 놀러와서든, 제 집무실에 찾아와서든, 어떤 연회에 참석했다가 함께 귀택하는 마차 안에서든 반짝이는 눈으로 건네던 말들.
타박과 장난을 잘 섞어 둔 그 말 너머에는, 어쩌면 이 절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었던 거였을까.
어떤 때에는 제 정해진 일과를 이유로, 또는 다른 일정을 이유로, 또는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클로에가 조르는 것들을 적당히 받아들이거나 적당히 거절해 왔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배가 불렀지. 그 시절의 데메트리안 크레벨.’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야 했고, 또 한편으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 용서……라는 것을 그녀가 해 준다면 말이지.
그날 스칸다르의 왕자가 보란 듯이 그녀에게 살롱에 함께 가기를 청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던 마음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 윈제르 백작저의 살롱이 정말 기대되지 뭐니?”
“아, 다음 주 물의 날이 윈제르 살롱에 가시는 날이군요. 새삼 기대되는 일이 있으세요?”
제가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시는 양 그 살롱에 가는 일을 어머니께서 입에 올리셨을 때.
아우인 루이폴트가 그 말을 살갑게 받아 주는 것을, 데메트리안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 숨죽여 듣고 있었다.
“지난번에 클로에가 내게 그림을 하나 선물해 줬어. 데미는 알겠지만.”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하늘빛 눈동자에는 어떤 당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무명 화가의 그림이었는데, 느낌이 좋아서 내가 윈제르 백작부인에게 그걸 자랑했거든. 그랬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던지, 그 화가를 찾아내서는 이번 살롱에서 그를 소개한다지 뭐야?”
“그럼 어머니께서 그 화가를 발굴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하신 셈이군요?”
“응. 나랑, 또 클로에가 함께 말이지.”
공작부인이 ‘함께’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는 것에, 크레벨 공작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윈제르 백작부인 안목이 좀 까다로워? 그런데 그 눈에 들었다니까? 이번 살롱에는 클로에가 꼭 오겠지.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네.”
그리 말하며 제 어머니가 제 쪽을 보시는 것을, 데메트리안은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흠, 거참.”
계속 불편한 티를 내던 크레벨 공작은, 답답한 마음에 제 잔에 따라진 포도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공작부인에게 계속 타박당하는 터라 어찌 말은 못 꺼내지만, 그는 매번 크레벨들의 만찬 자리에 클로에의 이야기가 올라오는 것을 불편해하는 듯했다.
데메트리안은 곁눈으로 제 어머니를 흘끗 살폈다. 그녀가 제 편에 줄곧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어가는 것에는 분명 어떠한 의도가 있으리라.
이걸 덥석 물어야 할까.
그러고 싶지만, 제가 가도 괜찮은 걸까. 괜찮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녀와의 관계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까.
그리 고민하며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데메트리안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을 무렵이었다.
“데미, 혹시 다음 주 물의 날에 바쁘니?”
저 요령 없는 애를 어쩌면 좋아, 그런 마음을 담아 크레벨 공작부인이 제 큰아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데메트리안은 이를 넙죽 받아들였다.
“아뇨, 물의 날인 걸요. 중요한 날이니 에스코트해 드릴 사람이 필요하신 거죠? 그게 15시에 시작이던가요?”
루이폴트가 숨죽이며 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문자와 숫자에만 관심 있는 상아탑 속 수재여도, 제 형의 혼사 문제와 관련된 집안 분위기 정도는 읽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크레벨 공작은 지금껏 일관되게 보여 온 제 아내의 태도를 떠올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심기 불편한 티만 낼 뿐이었다. 어느새 하인이 잔에 채워두고 간 포도주를 다시금 물처럼 삼킬지언정.
그런 남편의 기색조차 즐거워서, 크레벨 부인의 눈동자가 봄 하늘처럼 빛났다.
“그럼. 소공작이 도맡아 주시면 이 어미가 체면이 설 것 같아. 중요한 날이니까.”
그렇게 온 것이 오늘.
그녀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건만…….
“정말 맞나 봐.”
“그치? 같이 온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지한 사이인가?”
크레벨의 마차가 당도했을 때, 평소 같으면 공작부인에게 알은체를 하기 위해 이편으로 다가왔을 사람들이 저들만의 열띤 대화에 빠져 있어 의아했던 것도 잠시.
“아까 그 왕자 얼굴 봤어? 아주 훈기가 돌던데.”
“잘 어울리긴 하더군.”
그 내용을 귀담아듣던 데메트리안은 얼굴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둘이 같이 올 것을 알고야 있었는데도…….
스칸다르 왕실저의 마차에서 사교계 가십의 주인공들이 함께 내린 것을 확인해 주는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데메트리안은 제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크레벨 공작부인도 이 소문에 대해 아주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그 주인공 중 한쪽이 제 아들의 짝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으니 모든 판단을 미룰 뿐이었다. 같은 제후국 출신의 입장에서 볼 때 스칸다르의 왕자는 조금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고…….
제 어머니의 여상한 표정에 안심한 데메트리안이 그녀로부터 시선을 거뒀을 때였다.
‘이 녀석도 알고 있었나 보군?’
그녀는 손에 쥔 부채로 입가를 톡톡 치며 제 아들의 안색을 슬며시 살폈다.
하나같이 떠들어 대는 이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리는 없는데, 애써 표정을 굳히고 있는 걸 보면 말이었다.
남들 눈에야 평소처럼 고고한 표정일지 몰라도, 어미 눈에는 그가 얼굴을 와락 구기고 싶은 것을 애써 참는 게 다 보일 뿐이었다.
‘클로에랑 싸우기라도 했는지, 요즘 일 귀신에 씌인 것처럼 살고 말야.’
답답한 남편이야 이제 은퇴할 때가 다 되었다는 건지 느긋하게도 입궁하고 지겹도록 또박또박 저녁때를 맞추어 귀택하곤 했건만.
그래 봐야 갓 쉰이 된 크레벨 공작이 은퇴하려면 10년은 남았지만 말이다.
‘오늘 분위기 좀 살펴봐야겠네.’
그리고 그녀의 소망은, 정말로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되었다.
살롱의 주인공인 제이크 콜린스에게 인사하러 그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 먼저 도착해 있던 클로에의 낯이 제 아들을 마주한 순간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이 아닌가.
오호라. 크레벨 공작부인은 거기서 약자가 되는 것이 제 아들임에도 그저 흥미진진한 낯만 띄웠다.
“자네가 오늘 살롱의 주인공이라고.”
데메트리안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내디뎌, 제이크 콜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네에…….”
아, 악수……? 제이크 콜린스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고장 난 듯 망연히 바라보았다.
귀족 나리와의 악수라니, 고티유 시내 전망 좋은 스튜디오를 월세 안 밀리고 빌릴 정도로 성공한 자들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인데.
‘게다가 이 귀공자는 또 누구신지……?’
한눈에 봐도 지체 높으신 저 귀부인의 아들인 듯하고 라크루아의 영애님과도 안면이 있으신 듯하니, 제이크 콜린스는 일단 허리를 숙이며 그 손을 조심스레 잡을 따름이었다.
그 몸짓에서 대강의 사정을 알아챈 클로에가 사무적으로 크레벨의 모자를 소개했다.
“이 귀부인께서 크레벨 공작부인 되시고, 이쪽은 그 아들인 크레벨의 소공작이오.”
“아, 고, 공작부인이셨습니까.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부인.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경께도 감사드립니다.”
뭐가 그리도 감사한지, 제이크 콜린스의 허리는 연신 굽어져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새카만 머리칼 아래로 심해의 물빛을 담은 것 같은 눈동자, 단정하되 고결해 보이리만치 깍듯한 턱선, 훤칠한 키와 그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비율의 체격 등등……. 그 귀공자의 모습이 귀족 나리들께 자주 불려 다니는 동료들이 읊던 그대로였다.
‘다른 곳에서 봤어도 알아볼 수 있었겠어.’
라크루아의 아가씨를 대신전에서 처음 봤을 때에도 느꼈지만, 세도가의 젊은이들에 대한 풍문은 다소 과장될지언정 모두 일리 있는 묘사였던 것이었다.
“클로에, 네 덕분에 내가 윈제르 살롱에서 소개될 만한 화가를 발굴했다는 찬사도 받고 말이야.”
“무슨 말씀을요, 부인. 저는 그냥 선물을 드렸을 뿐인데요. 부인께서 윈제르 백작부인께 소개해 주신 공이 크죠.”
원래 제이크 콜린스는 누구의 소개도 없이 자력으로 윈제르 백작부인의 눈에 들 예정이긴 했으나……. 발굴될 때까지 2년은 더 빛을 못 보고 있을 예정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공은 공일 거였다.
클로에는 크레벨 공작부인의 치사에 멋쩍은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주인공인 제이크 콜린스를 앞에 두고서 두 여인이 손을 맞잡고 환담을 나누는 그 장면을, 데메트리안이 오래간 눈 담고 있을 때였다.
“이곳에 계십니다.”
그들을 안내하고서 물러났던 집사의 말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누가 또 오려나, 데메트리안이 발을 놀려 그편으로 몸을 돌렸을 때.
“고맙네.”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절대 아니기를 바랐던 인사가 문을 열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찾았습니다.”
“어머, 왕자 전하시군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공작부인.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선 뷔욘은 느긋한 몸짓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호리호리한 그의 몸짓은 일견 무대 위를 사뿐히 걷는 무용수 같았다.
그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짧은 방황 끝에 데메트리안에게 붙박였다.
“소공작도, 또 뵙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