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8)
뷔욘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해 오는 것을, 데메트리안은 지난번보다는 여유로운 심정으로 받았다.
그와 맞닥뜨릴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역시 오늘 같은 날엔 파트너가 필요하시지 싶어서 말입니다. 공작부인께서도 소공작과 함께 오신 걸 보면 말이죠.”
뭐지, 엄마 따라온 애 취급하는 건가……. 그가 공작부인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며 말했음에도, 데메트리안은 그가 저를 겨냥해 그리 말한다고 생각했다.
“윈제르 백작부인께서도 이따 행사에 기대가 크신 것 같던데 말입니다.”
“아……. 저는.”
뷔욘이 클로에 쪽으로 다가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며 그리 말했다. 그러고서 손을 슬며시 내미는 모양새가, 그녀가 제 손을 잡고 움직일 것을 기대하는 듯했다.
문가에 선 데메트리안은 그런 그의 등짝과, 자못 당황한 듯한 클로에의 얼굴만 진득히 눈에 담을 뿐이었다. 어떤 안타까움이나 열망 같은 것은 감히 띄우지 못한 낯으로.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것을, 그의 곁을 지켜온 이들이라면 알 수 있었다.
“중요한 자리 아닙니까.”
클로에는 그 제안을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뷔욘과 저 사이에 대해 과장된 소문이 났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물론 그도 조금은 영향을 끼쳤지만, 데메트리안이 저를 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아주 영향을 안 끼친 건 아니지만…….
“그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래도 콜린스 선생의 날 아니겠나요. 저야 들러리인 것을요.”
제가 한 일이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서까지 주목받아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십니까.”
뷔욘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영애께서 그러시다면. 그리 말하며 상체를 들어 올리는 그의 뒷모습에, 데메트리안은 고소하다는 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살롱은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스칸다르의 왕자의 명성대로 흥행이야 예견된 바였지만, 그 분위기가 굉장히 뜨거웠던 것이었다.
크레벨 공작부인이 직접 발굴한 화가의 데뷔 자리를 축하한답시고 소공작까지 대동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편의를 이유로 후작가 미만의 초청은 일률적으로 거절해 온 탓에 데메트리안은 성인이 된 이후 정말로 초행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공작부인이나 크레벨의 이름, 혹은 둘 다를 따르는 모든 가문에서 평소보다 더 호의적으로 반응하여 제이크 콜린스는 전에 없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그림이 전시된 후작저의 1층과 정원 곳곳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윈제르 백작부인은 그 분위기에 취해 전시해 놓은 그의 그림을 제가 모두 다시 사들일 기세였다.
“놀랐어, 클로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나도 놀랐어, 정말.”
“대단한 명예긴 한데, 고생도 고생이다.”
그녀가 자유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멜라니가 미리 클로에의 몫까지 받아 두었던 스파클링 와인을 한 잔 쥐여주었다.
제이크 콜린스의 그림을 직접 미술상에서 구입한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그 사연을 사람들 앞에서 읊었어야 했던 데다가, 미술품 소장을 취미로 삼은 귀족들과 미술상들이 말을 묻겠다고 한참을 괴롭힌 것이었다.
‘내가 무슨 안목이 있어서 그를 알아본 거라면 덜 고역이었을 텐데.’
클로에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가 그 그림을 살 생각을 한 거야? 너, 미술품에는 큰 관심 없었잖아.”
“말했잖아. 그냥 지나가다가 미술상에서 봤는데 그 그림이 눈에 너무나도 환하게 들어오더라니까?”
클로에는 시치미를 떼고, 앞서 제이크 콜린스를 소개할 때 인사하며 말했던 것을 그대로 읊었다.
‘뭐, 한눈에 들어오기야 했지. 아는 거였으니까…….’
더 이상의 의구심을 살세라, 클로에는 옆의 테이블에 차려져 있던 카나페를 하나 집어 멜라니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한치 카르파초가 토핑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우, 상큼해.”
“그렇지? 콜드디시는 역시 테오와 테오도라가 최고야.”
“맞아, 맞아.”
멜라니는 그리 대꾸하며 저 또한 옆에 차려져 있던, 생새우가 들어간 스프링롤을 클로에의 입에 넣어주었다.
고티유 시내의 유명 레스토랑 중 하나인 테오와 테오도라는 오리포네식 이름을 내건 만큼 남부 해안 지방의 요리들로 유명했다. 특히 뱃사람들의 절임음식을 활용한 차가운 요리들이 일품이었다.
음식 상하기 쉬운 초여름에 그런 요리를 제 이름을 내건 살롱에서 대접하는 것은, 윈제르 백작부인의 자신감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제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이처럼 많은 인원이 매번 그녀의 살롱을 찾았다. 그 콧대 높은 유명 요리사들을 저들의 주방 밖으로 끌어내는 그녀의 통 큰 씀씀이도 한몫했다.
‘조금 이르긴 해도, 콜린스 씨가 원래대로 여기서 소개돼서 다행이야.’
신진 예술가가 주목받기에는 이만한 무대가 없으니까.
아마 다른 살롱에서 소개되었더라면 죄책감에 더 오래간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클로에가 멜라니와 스파클링 와인 잔을 부딪힐 때였다.
“아까 말씀하시는 것, 잘 들었습니다.”
“어머나.”
멜라니가 새된 탄성을 내뱉었다.
어느새 곁에는 뷔욘이 다가와 있었다. 제 추종자의 무리와 대화를 나누다 떠나온 것인지, 이편을 질색하며 바라보는 영애들의 무리가 그의 어깨너머로 보였다.
“아, 왕자님. 어떠신가요, 재밌게 즐기고 계신가요? 아무래도 제 안내는 필요하지 않아 보이세요.”
클로에는 우선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멜라니가 귀띔해주었음에도, 저들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파다하게 퍼져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가 제게 보이는 관심을, 미래의 부군에게 잘 보이려는 제 노력에 대한 일종의 성과로 판단하면 거기엔 뿌듯함만이 남았으니까.
“영애께서는 참, 재치 있게도 말씀하시더군요.”
“과찬을 다 하세요. 아, 아까는 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염려 마십시오. 제가 살롱이란 것에 익숙하지 못한 탓 아니겠습니까.”
끄응, 그리 느끼시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클로에는 그저, 그 작은 성과를 오롯이 제 것으로 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등장한다면 어떻게든 그와의 관계에 대한 흥미가 영향을 끼칠 게 뻔했으니까.
제이크 콜린스에게 피해를 끼칠까 두려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전과 달리 괜스레 제가 낀 덕에, 그는 그냥 제이크 콜린스가 아니라 크레벨 공작부인과 라크루아 영애의 간택을 받은 제이크 콜린스가 되었으니까.
‘게다가 어찌나 긴장했던지, 내가 같이 입장하지 않았다면 기절했을지도 몰라.’
그중 그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 클로에는 재빨리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음식은 좀 입에 맞으시던가요? 이 한치 카르파초 카나페가 제일 맛있는데.”
클로에가 제가 먹으려고 집어 든 카나페를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야 첫 메뉴를 시식한 차였지만, 차려진 음식들의 구색이 제가 아는 때와 동일했기에 자신 있었다.
“아, 카르파초……군요.”
뷔욘이 조금 난처한 낯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차, 생해산물은 조금 부담스러우시려나.’
스칸다르는 면해 있는 바다라고 해 봐야 동해 최북단의 얼지 않는 바다가 다여서, 해산물 요리가 다양하게 발달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클로에는 작게 자책하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스칸다르에서는 가열하지 않은 해산물은 안 먹긴 하지만요.”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 클로에의 낯을, 뷔욘은 얼마간 대꾸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입꼬리를 가느스름하게 들어 올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조금 다른 결을 띠었다.
‘한치를 싫어하시진 않았는데…….’
그가 어떤 마음으로 대꾸를 늦추는 것일지…… 클로에는 조마조마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밀빛 눈동자에 햇빛이 비쳐, 일순 금갈색으로 보일 즈음이었다.
한동안 멎어 있던 뷔욘은 이내 무엇을 결심한 양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숨을 내뱉듯 웃었다.
“영애께선 제 모국에 대해 꽤 박식하시군요.”
“아, 그게 그리 되나요.”
하하, 괜한 소릴 했나. 클로에가 어색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추스르며 빙긋 미소지을 때였다.
“영애께서 그러시다면, 어디 한번.”
그가 설핏, 허리를 숙였다. 클로에의 얼굴과 비슷한 높이로 낮아진 그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
의도를 알 수 없는, 아니 그런 의도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그의 행동에 클로에는 얼마간 멎었다.
그를 지켜보던 그의 추종자 무리도, 옆에서 바라보던 멜라니도 얼어붙었다.
클로에의 당황한 낯에, 뷔욘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가를 슬며시 접어 웃었다.
“생해산물을 절인 걸 먹는 건 처음인데, 영애께서 권하시니.”
그가 너무나도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바에, 놀라서 꼼짝도 못하고 있던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제 손에 들려 있던 것을 그의 입에 넣었다.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연속 판화처럼 흘러갔다.
“어머머머…….”
클로에와, 그녀 자신과, 뷔욘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영애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똑같은 소리만 내뱉는 멜라니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떨렸다.
그 이색적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뷔욘이 클로에에게로 다가설 때부터 이미 모든 이들이, 심지어 안쪽에서 윈제르 백작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크레벨의 모자마저도 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으리만치, 모든 공기가 그쪽으로 쏠렸으니까.
데메트리안의 턱이 어슴푸레 불거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 곁을 맴돌며 왕자가 근처에도 못 오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죄 많은 제 처지를 생각하며, 그는 애꿎은 와인 잔을 쥔 손에만 힘을 줄 뿐이었다.
공작부인은 제 아들의 얼굴을 흘끗 살피며 흥미로움을 감추느라 애써야만 했다.
‘정말, 좀 투덕댄 정도는 아니었나 봐. 이 애들이 그렇게 어색해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땡땡땡.
“신사 숙녀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쯤, 연회장의 가장 큰 테라스로 나온 윈제르 백작부인이 청동 막대로 와인 잔을 울렸다. 연회장 안과 정원 곳곳에 삼삼오오 몰려 있던 사람들이 그편을 주목했다.
날씨도 기온도 딱 적당한 유월이어서, 창문과 문을 모두 여니 마치 연회장 안과 정원이 하나의 공간처럼 통해 있던 것이었다.
“오늘 살롱을 위해 제작한 콜린스 선생의 최신작 특별 경매를 시작합니다!”
그 안내를 들은 정원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들 반색하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윈제르 살롱의 특별 경매는 살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흥이었다.
이 자리를 위해 특별 제작된 작품이 공개된다는 점에서도 그랬지만, 소소한 경매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더욱 인기였다.
살롱에서 소개되는 예술가의 작품들은 살롱이 열리기 전부터 저택 곳곳에 전시되어 선착순으로 주인을 찾아갔다. 선착순이어도 무명 예술가들은 꿈에도 못 보던 금화가 오갔기에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컸다. 게다가 올 시즌 사교계의 화젯거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 작품을 하나라도 소장하려는 이들이 있어 작품은 남김없이 팔렸다.
하지만 그 금액을 모두 다 합쳐도 특별 경매의 낙찰액에는 미치기 어려웠다.
이때 귀족들이 입찰하는 금액은 윈제르 백작부인에 대한 경애의 증명인 동시에, 신진 예술가에 대한 투자와 재력 과시 등등 다양한 의미를 띠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콜린스 씨의 그림이 그대로 여기서 소개돼서 다행이야.’
클로에는 즐거운 생각을 하며 멜라니와 함께 연회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편에는 제이크 콜린스의 신작을 소개하기 위한 준비가 끝나 있었다.
“어머, 클로에. 콜린스 선생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