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5)
‘스칸다르의 왕자를 좀 눈여겨봐야 할 것 같아.’
궁정백부인이 지병인 편두통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지난번 마담 에투알의 살롱으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궁정백저를 찾아온 마담 에투알, 아니 그녀의 친우인 마고 프래즈가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로이에게 접근하려는 것 같아. 그게 이성으로서 호감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세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숨은 의미를 궁정백부인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왕자의 개인적인 호감일 수야 있겠지만, 그 왕실이 워낙에 폐쇄적이다 보니 공식적인 제스처는 아닐 거야.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걸 보면 상당히 본격적으로 구는 모양새인데…….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이러는 걸까.’
궁정백부인은 그대로 누아제트 남작부인에게 스칸다르 왕자의 신변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그의 최근 활동, 그의 인간관계, 왕실과의 관계 같은 것들…….
그래서 그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상단을 통해 클로에에게 어떤 선물을 한 것까지 알고 있던 차였다. 그게 상단이라기엔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선물을 포장한 박스의 위용부터가 남달라서 라크루아 사용인들 사이에 스칸다르 왕자의 선물이 크나큰 화제이기까지 했다.
‘지난번에 영애를 통해 드린 것은 잘 받아보셨는지요? 부인께서 궁금해하신다는 말을 듣기야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영애께 드릴 것으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도 참 잘 꾸며냈지.
궁정백부인은 뷔욘의 매끈한 혀를 높게 평가했지만, 그것은 제 딸의 교제 상대로서 매기는 점수와는 무관했다.
스칸다르의 왕자인 그는 보일 수 있는 청사진이 없었고, 그 점 하나만은 데메트리안 그 녀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면서 지금 사교계에 소문이 다 났다지. 우리 저택 애들이 소문을 냈대도 그 정도로 파다하진 못했을 텐데.’
게다가 클로에가 그로부터 받았다는 선물이, 그 애가 원한 바가 아님 또한 확실했다.
‘그런 건 로이의 방식이 아니니까……. 상인이나 좀 소개받으려 했겠지.’
제 사랑하는 남편의 기질을 본받아 가끔 미욱하리만치 고지식한 제 딸을 어찌 모를까.
‘돈으로밖에 무언가를 할 줄 모르는 이가 마침 잘됐다 싶어 제 부를 과시한 거지. 문제는 왜 로이한테 그런 짓을 하냐는 건데…….’
머릿속에서는 그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팽팽 돌아갔지만, 그런 내색은 조금도 않은 채 궁정백부인은 얼굴에 띄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지난번 영애께서 마담 에투알의 살롱 초대장을 구해주셔서, 정말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살롱도 영애께 소개받고자 이렇게.”
다리를 우아하게 꼬았음에도 꼿꼿이 세우고 있는 허리, 공손히 모은 두 손, 말소리, 미소 그 무엇도 예법에서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정중했고, 잘 보이려 하는 눈치였다.
‘방식은 조금 잘못됐어도 호감은 호감인 걸까. 그러기엔…….’
흐음. 잘 꾸며 둔 그의 표정이며 태도에서는 도무지 다른 의도를 간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윈제르 살롱에도 파트너로 모시고 가는 거니?”
“그럴 리가요, 윈제르 백작부인께서 초대장을 계속 보내셨었다고 하더라고요.”
“예, 마침 계속 거절하기도 죄송한 차이기도 했습니다.”
“그랬군요.”
일단은 지켜봐도 괜찮을까……. 다만 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어쩌다 났는지 좀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궁정백부인은 판단을 보류하는 쪽을 택했다.
“그 덕에 로이가 오랜만에 모임에 나가는구나? 요즘에는 나다닌다고 영 관심을 안 뒀으면서. 오늘이 그 화가가 소개되는 날이라 했나?”
궁정백부인이 클로에 쪽으로 몸을 돌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다정스레 말했다. 그 말과 손짓에 애정이 담겨 있어 기쁘면서도,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뷔욘의 낯을 살피게 되었다.
영애는 퍽 부지런하십니다, 바깥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런 말을 꺼내던 그의 말소리가 떠오르는 한편으로, 모후와도 누이와도 살뜰하지 못한 그가 괜스레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같이 산 세월보다 떨어져 산 세월이 더 기실 테니까…….’
저야 고티유의 가족이 늘 애틋했다지만 열 살에 생이별했다면, 글쎄.
저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라고 클로에는 늘 생각해 왔었다.
그가 즉위하고서 지방의 별궁으로 두 사람이 내려가 버린 이후로, 클로에는 그가 제 어머니나 누이와 함께 자리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클로에가 가족들과 있을 때면, 그녀의 부군은 매번…….
‘그래, 저런 눈빛으로.’
뷔욘의 입가에는 미소가 여전했지만, 그의 금갈색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이.
윈제르 백작가의 저택은 타운하우스 밀집 지역에서 벗어나, 황궁의 북쪽 숲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에델타뉴산의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도 안에서도 너른 부지를 누리고 싶은 재력깨나 되는 세도가들이 터를 잡는 지역이었다.
오늘처럼 그 지역의 어느 저택에서 모임이 열리는 날이면, 제도에서 사교계 시즌을 보내는 가문의 마차들이 모두 북쪽으로 향하곤 했다.
스칸다르 왕실저의 마차가 뷔욘과 클로에를 싣고서 그쪽으로 향하고 있듯이.
일전에 클로에를 초대할 때에 보낸 마차와 달리 평범한 외관의 그 마차는, 그 크기도, 내부의 장식도 그 무엇도 평범 그 자체였다. 다행히 그의 호위인 디에크도, 미라벨 대신 나온 디도 무인치고 덩치가 큰 편이 아닌지라 넷이 앉아 가기에 빠듯하지 않았다.
그리 부유함에도 스스로 평범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볼모의 처지…… 같은 걸 생각하며 클로에는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제가 미리 일러뒀을 텐데요. 아무래도 대접이 변변찮았을 듯해서요.”
“아닙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발길이 일찍 닿은지라.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뷔욘이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그 살가운 말이 한편으론 어떤 설렘을 담고 있는 듯도 하여, 클로에는 조금 수줍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처음, 그와 마차를 탔다는 사실이 크나큰 어색함을 돋우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살롱에는 어떤 핑거푸드가 나올지 기대되네요. 윈제르 백작부인께서 살롱 때마다 유명한 레스토랑 요리사를 초빙하시는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아, 저도 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가라는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들이셨나요?”
“뭐, 다들 그냥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클로에는 적당히 예의 바른 이야기를 짜내느라 고심했다. 그에 대해 잘 알면서도 그런 티를 내면 안 되고, 또 그의 관심사에서 아주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클로에의 마음속 어색함이 더욱 진해질 따름이었다.
‘원래는 단둘이 만날 일조차 없는 사이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면, 그와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부터가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셰비크 사교계의 귀족들과 친숙해질 기회가 부족했던 터라 궁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 함께 휴가를 떠나거나 나들이 갈 때에는, 그가 즉위하고서 가장 먼저 이룬 업적이라는 이동 포털을 애용했었고.
‘그러고 보면 스칸다르에서 포털을 타고 다녀도 보석이 상한 걸 한 번도 못 봤는데. 에르드교 신전 하나 없는데 어떻게 승인을…….’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클로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래, 그분이 있었지.’
그를 볼 때면 뷔욘에 대해 묻고 싶었던, 뷔욘을 볼 때면 그에 대해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신관, 안톤미오노의 얼굴.
“스칸다르는.”
무심코 내뱉은 말에 뷔욘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사실 그에 대해 묻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톤미오노의 얼굴을 처음 알아보았던 그날부터.
“……에르드교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는데, 그러면 전하께서는 지금껏 대신전에 가 보신 일이 없으신가요?”
클로에는 제 질문에 별 의도가 없어 보이기를 바라며 생긋 웃었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간 그대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릴 때는, 대축일 예식에 꼬박꼬박 참석하곤 했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뷔욘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무기질적으로 빛났다. 거기에는 클로에의 의도를 추측하려는 듯한 날카로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혹시 대신전 지하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쉽게도.”
뷔욘은 고개를 살짝 모로 틀며 답했다.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이야기……. 문득 제 답이 너무 짧았던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지 않게끔 말을 덧붙였다.
“많은 괴담이 들려오는 곳이어서 어린 시절에 참 궁금하긴 했었습니다. 그, 악마의 발자국 같은 것들 말이죠.”
그리 말하는 그의 눈가가 사르르 접혔다.
어쩐 일로 그런 것을 묻는지 궁금하면서도, 그는 연유를 묻는 법이 없었다.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 시절에도 말이다.
온 시절을 통틀어 늘 그랬듯이 클로에는 발랄하게 제 말을 이어갔다.
“몰랐는데, 보물고 견학이 가능하지 뭐예요? 얼마 전에야 알고서 견학하러 갔더니 대신전 지하에도 들어가 볼 수 있더라고요.”
“보물고…… 말씀이십니까.”
“네. 캄포의 성배가 보관된 그곳 말이에요. 말씀하신 악마의 발자국도 봤어요. 혹시 그라온다의 초상 들어 보셨어요? 보는 위치에 따라서 눈동자의 방향이 달라 보인다는 그 그림요.”
“귀신 들린 그림으로 유명한 그 그림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착시 효과가 있어서 그런 소문이 도나 보더라고요.”
클로에가 재잘대는 것을 들으며, 뷔욘은 뭔가 안심한 듯 조금 평온해진 기색을 띠었다. 영문을 모를 질문이 실은 그저 대화를 이끌어 가기 첫마디였구나, 싶어서.
“참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보물고를 담당하시는…….”
클로에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제 말이 작위적으로 울리지 않길 바라며.
“안톤미오노라……는 신관께서 참 재담가셔서 재밌더라고요.”
클로에는 뷔욘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혹시 그 온화한 낯에 어떤 잔잔한 파문이라도 일지 않을까 싶어서.
세 해를 그의 귀비로 살며 그의 다양한 감정을 지켜보았으니,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괜히 시간을 끌어 보았지만.
“혹시 괴담의 출처를 확인하시고 싶으시면, 추천해 드리고 싶어서요.”
“그러셨군요.”
곱게 미소 지어 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미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미소는 그가 모든 것을 가장 간편하게 감추는 방법임을,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