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4)
“요즘 여송연이 유행인데, 그걸 좀 많이 하면 감각이 과민해진다고들 이야기하는 정도였어요.”
“아, 그래서 시끄럽다느니 뭐라느니 그랬구나.”
미라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단도를 날렸어야 했는데, 그치가 제정신으로는 보이진 않아 멈칫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작게 이를 가는 걸 보며 루시엔이 말을 이었다.
“유행이다 보니 하루에 여러 대를 피는 자들도 있다더라고요.”
“부작용이 이제야 알려진 건가요? 유행한 지 몇 달 된 것 같은데.”
클로에가 한밤중에 찾아온 에티엔에게서 그 냄새를 맡았던 때를 떠올리며 끼어들었다. 그게 벌써 한 달은 훌쩍 지난 일이었다.
“처음에야 귀했으니까 귀족들 위주로 소비되다 말았는데, 요즘엔 아주 본격적으로 수입돼서 말이죠.”
“서대륙에서 그렇게 빨리요?”
해외 무역에 대해 직접 겪은 바는 없어도, 서대륙까지의 뱃길이 몇 주는 걸리는 걸 상식으로 알았으니까.
“이제는 원산지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생긴 건 다 들여오는 중인가 보더라고요.”
조만간 그 유행이 오리포네에까지 퍼지게 생겼어요, 루시엔이 그리 덧붙였다.
이는 모두 한들룽 지구에서 그녀를 싹싹한 소년 종자로 생각하는 상인들이 무방비하게 노출한 정보들일 터였다.
‘이 정도로 유행했었는데도 나는 전혀 몰랐네.’
제가 기억하는 일들이라 해 봐야 직접 겪은 것을 빼고는 신문에 실린 일, 또는 에티엔이 물어다 주는 이야기가 다였다. 그러니까, 사교계의 낮에 유통되는 것이 허용된 이야기들뿐.
하지만 이건 정말 뒷골목에서 떠돌다 그친 이야기였다.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공간에 제가 발 들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기분도 나빠질 건데 그런 건 뭐하러 하는지.”
체력이 최우선인 무인으로서 미라벨이 툴툴대듯 말했다. 그녀는 이따금 에티엔을 두고서도 골초라고 비난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에티엔은 저 정도는 축에도 못 낀다며 투덜댔지만.
“한두 번 하는 정도로도 중독되기도 하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태우고, 그러다 보니 과민 반응이 오는 자들이 늘어나고. 주먹다짐도 종종 일어나고.”
루시엔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마침 어디선가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났다.
우당탕, 집기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성이 울렸다. 그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던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에서였다.
“시끄러워! 꺼져, 이 돌팔이야!”
“개나 소나, 육시랄!”
반사적으로 일행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친교 클럽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시는 오지 마! 기분 ×같으니까.”
“××, 무슨 같잖은 게.”
“주말에 술이나 처마시고 있대서 교리도 모를 줄 아나.”
문가에 나타난 덩치들이 한 사내를 건물 밖으로 떠밀며 침을 퉤 뱉었다. 그렇게 떠밀려 나와 거의 넘어질 듯 비틀대다 간신히 일어선 사내는 사제들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설마 루카 아니겠지?”
“설마.”
미라벨의 합리적인 의심이 귀에 들러붙었지만……. 루카와 키가 비슷하긴 해도 그 몸놀림에서 느껴지는 나이가 그들보다 훨씬 연배가 있어 보였다.
“이히히, 으흐흐흐…….”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친교 클럽에서 쫓겨난 그 사제는 혼이 나간 듯한 웃음소리를 자꾸만 흘려내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써서 그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웃음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루카가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미라벨이 짓씹듯 내뱉었다.
“루카 놈이 사교클럽 드나드는 사제 새끼는 저 하나라더니.”
“비공인 사교클럽까지 치면 루카 말고도 다니는 사제분들이 좀 있으신가 보지.”
나름대로는 기부금 얻으려고 친목 쌓는다는 거잖아, 클로에가 미라벨의 빈정거림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할 때였다.
“사제 루카미오노 말씀하시는 거죠?”
헉, 미라벨이 깜짝 놀라 가면의 입이 뚫린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아쉽게도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없었지만.
루카 놈이 어쨌건 루카미오노는 에르드의 사제로서 꽤나 이름 높은 자였는데, 그의 이미지도 문제거니와, 너무 격의 없이 말해 버린 것도 민망했다.
그 반응을 본 루시엔이 후후 웃었다.
“제가 보고 듣는 게 다 있는 걸 아시면서, 새삼스럽게요.”
“루카 놈이 그 명망치고 방탕한 게, 다들 아는 사실이겠죠……?”
헤헤, 미라벨이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을 때였다.
“정말로 두 분은 크레벨 소공작과 가까우신가 봐요.”
“앗.”
일종의 동문서답에, 미라벨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로이가 대공녀랑 데미 공자에 대해 이야기를 좀 했었나?’
그간 루시엔이 클로에와 단둘이 주고받은 말들을 세세히 알 기회가 없었던 미라벨은, 그녀가 크레벨과의 혼약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또한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로이랑 처음 만났을 때 알은체를 했던 걸 보면 아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러고도 호의를 베푼 걸 보면…….’
알아서 호의를 베푼 것일 수도 있고, 몰라서 베푼 것일 수도 있겠지.
가면을 쓰고 있는 채여서 클로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그것이 루시엔에게 비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두 여인의 침묵을 잠시 살핀 루시엔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면의 벌어진 틈으로 그 입꼬리가 어슴푸레 드러났다.
“어린 저와 그 혼약을 지키시려면 3년은 더 기다리셔야 할 텐데, 그분도 참 고루하셔라. 안 그런가요?”
그 말을 하는 루시엔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이 가면 너머의 클로에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 * *
“아가씨!”
우당탕탕, 집사의 부름을 받고 나갔던 폼폼이 평소답지 않게 거친 손길로 파우더룸의 문을 열었다.
화장대 앞에 있던 클로에도, 그녀의 머리 손질에 심기일전하고 있던 쥘도 눈동자를 굴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왜 말씀 안 하신 거예요?”
클로에는 또 그 소리구나 싶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 표정에 궁금증이 더해진 쥘이 클로에의 머리를 땋던 손을 늦추며 물었다.
“뭘?”
“스칸다르의 왕자님하고 살롱 같이 가시는 거라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뭐라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깜짝 놀란 쥘의 말소리 너머로 클로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걸 들은 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안 중요해요?”
하하……. 지난번에 제 하녀들의 반응에서도 눈치챘지만, 뷔욘과의 이야기가 이 소녀들 사이에는 즐거운 가십거리인 듯했다.
‘얘들은 왕자님 한 번 못 봤으면서 왜 이렇게 좋아하지?’
제 사용인들이 크레벨 소공작파와 스칸다르 왕자파로 나뉘어 갑론을박 중임을 꿈에도 모르는 클로에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스칸다르 왕자님의 미모가 고티유의 사용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것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살롱에 같이 가는 것뿐이야. 무도회 파트너,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살롱이라고.”
“그래도 모시러 오신 게 어디에요?”
“모시러 오셨다고?”
“응, 직접 오셨다니까? 지금 마님이랑 응접실에 계셔.”
쥘은 땋은 머리카락을 당장에라도 내팽개치고 뛰쳐나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런 정도면, 혹여 스칸다르에 가게 되더라도 이 아이들이 덜 슬퍼하려나.
‘아가씨, 우리 아가씨. 꼭 행복하셔야 해요…….’
‘같이 가서 챙겨드려야 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아가씨. 거기서도 사랑받으실 거예요.’
제가 스칸다르로 떠나는 날까지도 그녀의 단장을 도왔던 두 하녀의 마지막 눈물범벅 얼굴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땐 정말 스칸다르의 왕자가 클로에와 이렇다 할 연이 없는 인물이어서 가족도, 사용인들도, 사교계의 모든 지인들도 그녀를 걱정했으니까.
‘그나저나 혹여……라니.’
그 확실한 미래를 두고 자꾸만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게 되는 마음을, 클로에는 아직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제가 기억하는 이날 그대로 단장을 마친 클로에가 1층의 응접실로 내려갔을 때였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궁정백부인과 응접탁자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뷔욘은, 그녀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더없이 감격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모국보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그는 오늘도 목덜미 위에서 머리를 묶은 채였다. 제국식의 셔츠와 팬츠를 입었지만 차마 재킷까지 걸칠 수는 없었던지, 스칸다르에서 여름에 긴소매 옷 위로 덧입는 얇은 로브를 걸친 채였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는데…….”
클로에가 짤막한 몸짓으로 인사해 보이고는 궁정백부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께 귀띔이라도 해드렸어야 하는 건데.’
크레벨 공작부인처럼 집으로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취미는 없으셔도, 갑작스런 손님을 태연히 맞이하는 정도야 별일 아니시지만……. 그가 평범한 손님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궁정백부인께 저희 나라의 차를 소개해 드리게 되었으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전하께서 이런 귀한 선물을 다 해 주시니 제가 영광이죠.”
그들의 찻잔에 담긴 찻물에 풀빛이 도는 것을 보니, 뷔욘이 스칸다르의 특산품인 호펜차를 선물한 듯했다. 이국의 특산물이라면 다 겪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께 좋은 선물이었으리라.
‘선물까지 챙겨 오신 걸 보면, 일부러 일찍 오신 거구나.’
혹여 그때에도 기왕이면 이런 기회를 얻기를 바라셨던 걸까.
그땐 윈제르 살롱에 도착해서야 그가 참석한 것을 알았고, 지금처럼 가깝지도 않았는데. 그 차이가 조금 설레면서도…….
클로에는 뷔욘과 대화를 나누는 제 어머니의 낯을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혹시 왕자님께서 모피 케이프 이야기를 하셨으면 어쩌지?’
스칸다르산 모피를 구하겠답시고 어머니를 팔아 놓고서,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라 언급조차 않았던 것이었다.
‘보석 정화 일까지는 말씀 드렸지만 모피 얘기는 아직 못 드리기도 했고, 어머니 핑계 대고 선물 받았다고 말하기도 좀 그랬고.’
다만 인자한 미소를 걸어 둔 어머니의 얼굴에 딱히 특이한 기색이 떠올라 있지 않아 클로에는 그것만으로 안도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셋이 있는 것도 느낌이 묘하네. 배경만 바뀐 셈이지만…….’
여름마다 어머니가 여름휴가차 셰비크에 올 때면, 일주일에 한 번쯤은 제 부군이 짬을 내어 클로에의 가족과 차를 즐기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 티타임이 셰비크의 별궁이나 정원의 가제보에서가 아니라 제 고향 제집의 응접실에서라니.
클로에는 그 익숙하고도 생경한 느낌에 조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로이, 이 어미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지.”
클로에가 감상에 빠져들세라, 궁정백부인이 핀잔주듯 웃음기를 섞어 말을 건넸다. 이는 마치 자식의 연애사에 흥미로움을 못 감추는 어미의 목소리처럼 울렸다.
하지만 그녀가 뷔욘의 방문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