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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98화 (98/189)

98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3)

루시엔의 날카로운 지적에, 클로에는 민망함을 얼버무리기 위해 덩달아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가면을 썼기에 그 미소가 보일 일은 없었지만.

지난번에 루시엔이 2년 뒤에 리도테에 입학하는 것을 두고서 은근슬쩍 떠보았다가, 그녀가 고티유 사교계 활동을 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받고서 더는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다.

늘 크레벨과의 정혼을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말해 온 그녀가, 혹여라도 예정된 불화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제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그녀는 결국 리도테에 들어갔고, 고티유 사교계 활동을 위해 결국 크레벨 저택에 들어가 생활했다고 했다.

비록 약혼은 안 했을지언정.

그리고 그 행보는 제가 한들룽 지구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상상하던 캄포 대공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녀를 보면 둘이 안 맞아서 약혼을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데미랑 아직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꺼리는 걸 보면…….’

그렇다면, 어쩌면 그녀도 어떤 확신이 있는 것 아닐까.

클로에가 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을 지어냈다.

“5년 뒤에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를 알면 지금 이 경험도 더 유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때 제국 연방 정세 같은 것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칠 테고…….”

적당히 아무 데나 끼워 맞출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의 진의를 가늠이라도 하는 듯이, 루시엔은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클로에의 눈동자를 얼마간 바라보았다. 눈을 여러 번 꿈쩍이는 동안에도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클로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와 똑같은 무늬의 가면을 쓰고 있으니 얼굴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너머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이리라.

“앰버는 꿈이 있으세요?”

“꿈요?”

“5년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런 것 말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요.”

“…….”

그녀의 답을 얻어내기 위해 가면 안쪽에서나마 살가운 낯을 꾸며내고 있던 클로에는 제 표정이 점차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영애는 5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나?’

기실 루시엔에게 던진 질문은, 일전에 프레더릭으로부터 받은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때에도, 지금도 클로에는 정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제가 살게 될 5년 뒤는 정해져 있었고, 그것이 정해지건 정해지지 않건 그녀가 꿈꾸던 삶이란 것은 지금껏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배경이 스칸다르일 수도, 그란디시일 수도, 말레카일 수도 있는…… 알지 못하는 이의 아내로 살아가는 삶.

그 상상의 한계가 아쉽다는 생각은 프레더릭에게 대충 꾸며서 대꾸할 때엔 묻어둘 수 있었지만……. 루시엔을 앞에 두고서는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루시엔을 대할 때면 드는 껄끄러운 감정은, 결국 일종의 열패감이었으리라.

그녀가 제가 한때나마 간절하게 원하던 이와 약속된 사이여서가 아니라,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하는 이여서.

왜, 그런 것만을 바랐을까. 아니, 왜 그런 것밖에 바라지 못했을까.

침울함이 고개를 들 때였다.

“제 꿈은 말이죠. 운하가 건설되면 그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상단을 꾸려서 전 대륙적인 유통망을 장악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루시엔의 까만 눈동자가 오닉스처럼 빛났다.

제국 연방이 창설되고 천 년이 지나도록 이뤄지지 못한 운하가 건설된다느니, 착공되더라도 그리 빨리 완성될 것도 아니거니와, 또 크레벨의 공작부인이 되어야 할 그녀가 상단을 꾸린다느니……. 그 말에는 지적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눈빛에는 조금의 농담도, 거짓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5년 뒤 결국 리도테를 졸업하여 크레벨 공작저에서 지내며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캄포 대공녀란 일말의 가능성으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정말 그녀의 꿈인지, 그렇다면 그 꿈을 꾸는 이는 5년 뒤의 미래를 살았던 이일지, 온전히 현재만을 또박또박 살아온 이일지…….

순간, 클로에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비하면 제가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에.

“저는……”

그 앞에서 제가 스칸다르의 비가 될 거라느니, 프레더릭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황자의 후보에 올라 있다느니 하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것은 기실 제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삶은…….’

데메트리안이 그때 행복했을지, 루시엔과 잘 맞지 않았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가슴 아팠던 그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제가 스칸다르로 가게 된다면 결국 평생을 살아온 나라와 도시를 등지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멀어져서 살아갈 제 처지에 비교하면 너무 작은…… 슬픔이었으니까.

자꾸만 그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은 양 구는 데메트리안의 모습에, 발밑이 흔들리는 것만 같아서 도망치고 말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클로에는 목이 메어오는 것 같아 억지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나는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루시엔은 오늘도 괴상한 장식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낙찰받았다.

왕국 시대에 곰베르 산맥에 살던 소수 민족이 만들었다는 그 벽걸이는, 토속적인 무늬가 손뜨개로 장식된 원반 아래로 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것이었다. 오늘도 왕국 시대의 궁정복을 입고 나타난 그 사회자는 이를 두고 우주신의 가호를 모으는 기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천 년도 더 전에 멸족한 그 민족의 토속신앙에서 우주신을 믿는다나 뭐라나.

“루비 대공녀님도 주일에 신전 잘 안 가시죠?”

“어머, 들켰네요.”

미라벨의 장난스런 물음에 루시엔이 과장스레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우주신의 가호라니, 신전 또박또박 다니시는 분이면 이런 거에 1골드도 안 쓸 거예요.”

“신전 또박또박 다니시는 분이면 이 시간에 여기에 와 계시지도 않겠죠, 내일이 주일인데.”

클로에는 여섯 살 차이의 두 사람이 대거리하는 것을 들으며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루시엔이 조숙하기 때문일지, 미라벨이 격의 없이 굴기 때문일지, 두 사람이 나름대로 독특한 인물들이어서 그러할지.

‘지난번의 토템도, 이번의 벽걸이도…… 소원을 들어준다는 공통점이 있네.’

그리고 클로에는 경매가 시작되기 전 루시엔이 말했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대공녀는 그걸 정말로 바라는 걸까. 그래서 이런 장난 같은 토템이며 벽걸이 장식 같은 것들을 큰돈을 주고 모으는 걸까.

‘원래’에도 그녀는 이런 것들을 모았을까, 그리고 그녀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못한 걸까.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꿈을 지닌 그녀가…… 결국 데메트리안과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경매장을 나섰을 때,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와우.”

미라벨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보통 여성들보다 반 뼘은 더 큰 키가 작아 보이기를 바라는 몸짓이었다.

경매장 맞은편, 목 좋은 자리에 있는 것치고는 허름하게 꾸려진 선술집 앞에 크레벨의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지난주처럼.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역시 지난주처럼 그들과 한 세트인 프록코트를 차려입은 데메트리안이 있었다.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쉬며 철렁 내려앉은 마음을 다독였다.

‘주신께서 내 마음을 읽으시는 건지, 요즘 들어 동선이 겹치는 건지……. 데미랑 이렇게 자주 마주친 적도 없었는데.’

바로 어제 본 얼굴인데 조금 더 거칠해 보이는 것도 같고, 어제도 저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쳐다보지 않아서 몰랐지만.

클로에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움직여 미라벨의 뒤로 갔다.

미라벨도 숨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았으면 제가 뭘 어찌 차려입은지도 모르고서 발랄하게 알은체를 했겠지만 자리도, 상황도, 같이 있는 이도, 클로에의 마음도 그 무엇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 혹시.’

클로에는 고개를 돌려 루시엔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5년 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혹시 모르는 거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한 반사적인 방편이었다. 가면과 스체르바뇰식 모자로 꽁꽁 싸맨 걸 생각하면 그가 저를 알아볼 리가 없음에도, 저로부터 떨어지지 않던 그날의 시선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와 달리 데메트리안이 이편을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제 기사들과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경매장의 맞은편에 자리한 4층짜리 비공인 사교클럽인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루시엔은 덩달아 우뚝 멈춰서서는, 그가 사라진 쪽을 오래간 바라보았다.

루시엔의 마차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지난주와 꼭 같은 냄새가 났다. 비공인 사교클럽에서 나오는 다양한 여송연 연기 사이로 물담배의 달달한 냄새가 섞여든 것이었다.

‘다음엔 정말 물담배 바에 가 볼까? 대공녀는 나이가 안 돼서 못 가 봤겠지? 이번 태양절에 미아가 놀러 오기로 했으니 그때 꼬셔서…….’

최근 들어 일탈에 대한 역치가 낮아진 클로에는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리도테 영애들도 쉽게 다니곤 했으니 뭔가 노하우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클로에가 제게 물담배 바 방문을 제안했던 온실 속 화초 같은 영애들의 얼굴을 돌이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요즘 아주 별 담배가 다 유행이네요.”

루시엔이 코앞에서 작게 부채질하며 투덜대듯 말했다. 그런 말을 이 일행 중 유일한 미성년인 루시엔이 입에 올리니 조금 어색하게 울렸다.

“기억나세요? 지난주에 저 골목에서 헛소리하던 사람.”

“네, 기억나다마다요.”

클로에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살면서 받은 충격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일이었는데.

클로에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자꾸만 시비를 걸던, 골목 구석에 반쯤 누워 있던 그 평민 부호를 떠올렸다. 미치기라도 했는지 자꾸 헛소리를 해 대던 그 남자.

“그자를 보고 난 뒤라 유독 눈에 띈 건지는 모르겠는데, 밤만 되면 한들룽 지구에 그런 자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런 자라면……?”

“환각제를 먹은 것 같진 않은데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굴며 시끄럽다느니, 머리가 울린다느니 하는 자들요.”

귀를 쫑긋하며 ‘그 미친 놈들요?’ 끼어들려던 미라벨이 멈칫했다. 캄포 대공녀는 참 재밌는 소녀였지만 그 뱉는 단어 하나조차 속된 것이 없어 이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제 젖자매 또한 마찬가지이긴 했으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애와 대공녀는 달랐으니까.

그 아쉬움을 내던지고서 미라벨이 재빠르게 물었다.

“그게 뭐래요? 한들룽 지구에선 좀 이야기가 돌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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