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3)
“아무래도 그런 셈이겠죠?”
한참 연장자의 미덕으로, 라구는 열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라이언은 괜히 멋쩍어져서 헤헤 웃었다.
며칠 전 보석 정화를 맡기러 만났을 때, 대뜸 다음에는 알레지오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오라며 여기 주소를 주기에 라이언은 라구가 독립이라도 한 줄 알았다.
‘제가 영애님의 부탁으로 크레벨 소공작에게 도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소공작께서 우리를 보자고 하십니다.’
‘혹시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지신 분이신가요? 키는 저랑 비슷하고……?’
‘……마침 그렇네요.’
‘와, 정말 그분이 크레벨 소공작이었다니…….’
그러니까, 일전에 제가 주인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보고서 질투에 불타시던 분이 아닌가. 주인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는데 방법이 잘못되었는지 주인님의 불쾌함만 돋우신 그 양반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느 고티유의 사내아이들처럼 크레벨 소공작의 위명을 동경하던 것도 잊고, 라이언은 전지적 주인님 시점으로 그때를 회상했다.
“혹시 저희를 문초하실까요?”
그때 제가 받았던 그 이글이글한 시선을 돌이키며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두고 사내 녀석들끼리 적대하는 것은 평민 지구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시진 않을 것 같았어요. 아마 영애님을 도우시려는 것 같은데.”
“아, 역시.”
라이언의 낯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니, 일전에 저와 같이 있는 걸 보고 분노하시는데, 저는 경을 칠 줄 알았다니까요.”
“그럴 양반은 아니신 것 같더라고요. 다만……”
다물린 입술이 쫑긋, 위로 올라갔다.
‘후계자를 꼬맹이 대공녀에게 코 꿰여 놓은 가문 아닌가.’
요 몇 주 사이 갑자기 제도의 명문가 자제들을 만나게 되니 뭐라도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라구는 며칠 전 같은 숙소를 이용하는 동료들에게 아는 바가 있는지 넌지시 물었더랬다. 그때 알레지오 후작의 일을 돕곤 하는 알프레다가 코웃음 치며 했던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귀족들은 역시 살기가 피곤한 것 같다.’
라구는 한 문장으로 마음을 정리하고는 말을 삼켰다. 그런 판단은 저들의 영역이 아니니, 라이언과 저는 보이는 대로만 움직이면 될 것이렷다.
그때쯤 계단 아래에서 미약한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 검기를 발현시키지 못한 듯했던 크레벨 소공작의 호위 기사를 떠올리며, 라구는 라이언에게 눈짓했다.
“먼저들 와 계셨군.”
파이겐이 문을 열었을 때에 데메트리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느릿느릿 일어나는 라구와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넙죽 숙이고 있는 일전의 그 어리숙한 인상의 사내였다.
데메트리안이 상석에 앉자 그 사내, 라이언이 재빨리 외치듯 말을 붙였다.
“나리, 제대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라크루아 영애님의 종자인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라크루아의 사용인 중에 자네 같은 이를 본 적은 없는데.”
데메트리안은 지난번 라구를 통해 대강 사정을 들었으면서도, 괜히 꽁한 마음에 엄하게 대꾸했다. 꽁한 것은 창피하게 굴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지만.
예가체프 앞에서의 일을 멀리서나마 관전했던 파이겐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영애님께서 바깥에서 꾸리시는 일을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애님같이 귀한 분께서 다니시자면 너무 주목을 받으시니, 제가 손발이 되어 드리고 있지요.”
“그래, 구면이지 우리.”
라이언의 입바른 소리에 괜히 겸연쩍어진 데메트리안은, 라구와 라이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도 양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치고서 낀 손깍지 너머로 라이언을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이 날카로웠다.
“아티장 지구의 정장집 아들이라고.”
그걸 알아내겠다며 제 공자님이 사람까지 쓴 걸 알고 있는 파이겐의 입꼬리가 또 늘어졌다.
“네? 아, 네. 앙헬라타 대로 의상실에서 수업을 받고 싶은데 부모님께 손 벌리기엔 너무 큰 금액이어서요. 영애님께서 제 사정을 딱히 여기셔서…… 제가 아직 열다섯이라 큰 벌이가 힘들고요.”
소파에 등을 기댄 데메트리안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저편에 앉은 소년이 제게 최대한 살갑게 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알겠다. 그런 식으로 구는 귀족이나 관료들이야 많이 봤다만, 저 소년이야말로 제게 무슨 콩고물이나 선의를 바랄 게 없을 텐데 왜 그러는 것일까.
‘아무에게나 살갑게 구는 가벼운 녀석이면 안 되는데.’
라이언이 그의 짝사랑을 연민하는 동시에 경계심을 사고 싶지 않아 납작 엎드려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데메트리안은, 괜히 어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로이에게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흠, 일단 걱정을 털어낸 데메트리안이 파이겐 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때까지 바로 옆에 서 있던 파이겐이 문을 열 때 쓴 열쇠를 그의 손에 올려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 공간을 그대들이 쓸 수 있도록 하겠네.”
데메트리안이 응접탁자 위에 열쇠를 내려놓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열쇠와 데메트리안을 번갈아 쳐다보는 라이언과 달리, 라구는 팔짱을 낀 채 소공작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계속 쳐다보았다.
“로이가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하든 그러지 않든, 가문 밖에서 저만의 일을 하고 싶어졌으니 별도의 공간이 있는 편이 좋겠지. 그랬다면 지난번에 경과 내가 다른 식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일세. 그래, 그날 경과 만나기 위해 이 건물을 사들였으나 쓸모가 없어 경에게 사례차 임대했다는 설정이 괜찮겠군.”
그 말에, 제가 라구와 만날 때는 알레지오의 방을 빌리고, 주인님을 뵐 때엔 궁정백저로 가서 소응접실에서 뵙는 것을 떠올리며 라이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면 제가 주인님을 뵐 때면 늘 정찰이라도 하는 듯이 집사 나리가 소응접실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
‘주인님의 일이 비밀은 아니겠지만, 원치 않으시는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알려지는 건 싫으실 테니까…….’
집사 나리의 정찰 덕에 이미 무언가 들통났으리란 생각은 못하고, 라이언은 지레 그렇게 생각했다.
궁정백저의 티푸드를 못 먹게 되는 건 안타까웠지만, 몸 둘 바 모를 곳에 출입하며 마음 졸이는 것보다 마음은 더 편할 거였다. 그 배려심에 감동하여 라이언은 밝은 낯으로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왜 나리께서 직접 주인님께 말씀하시지 않고요?”
“그건……”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아스라한 아픔이 번졌다.
아차, 뭔지 몰라도 아직 용서받지 못하셨구나. 라이언의 마음속에서 연민이 더욱 깊어졌다.
“때로는 출처 모르는 선물이 더 기꺼울 때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라이언은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말이 없으신 마법사를 슬쩍 쳐다보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열쇠를 조심스레 예의 그 파우치에 넣었다.
“혹시 내가 더 도울 일이 없겠나? 아직 일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다구가 필요할까? 책상?”
“제가 말씀드린 주제에 이런 말씀 드리면 우습겠지만……”
여태 말이 없던 라구가 데메트리안의 살가운 말을 잘라내듯 입을 열었다.
“직접 들으신 것도 아닌데 이러시면 영애님을 기만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 말이 전에 없이 뾰족한 것에, 라이언이 깜짝 놀라 제 곁을 쳐다보았다. 구태여 무슨 말을 보탤 것이 없다는 듯 그의 입은 삐죽 올라가 다물려 있을 뿐이었다.
‘라구 경이 의외로 담이 세셨나……? 아무리 주인님을 좋아하셔도 크레벨 소공작이신데…….’
라이언은 경을 칠까 두려운 마음으로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라구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이 그의 낯을 얼마간 쳐다본 데메트리안은, 이내 여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로이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고, 마침 내가 경에게 빚을 졌잖은가. 우리가 나름으로 교분을 다졌으니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영애님의 수족들에게 크레벨의 이름으로 대금을 치르는 것은 괜찮으시고요?”
“내겐 봉록도 있고 크레벨령 바깥에서 오는 수입도 있지. 그리고 자네들에게 내는 선물이라면야. 자, 말들 해 보게.”
“마차요!”
께적지근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라구 옆에서, 라이언이 천진한 낯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마차?”
“예. 요즘 주인님께서 사입 다니실 때에 가끔 뵙는 지인분이 있으신데, 아무런 표식 없는 마차를 타고 다니시거든요. 가끔 마차에 초대받으신다던데. 그 안에 간단히 손님을 대접할 수도 있게 되어 있다 하고요. 그걸 부러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지인?”
“네, 저보다 더 어린 소녀 같던데……”
데메트리안에게 가장 궁금할 것이 그 ‘지인’의 성별일 것이 자명하여, 라이언은 납죽 그것을 갖다 바쳤다.
그 외에 실상 라이언이 아는 것이 없기도 했다. 미라벨이 아무리 라이언을 격의 없이 대한다 해도, 그 아가씨가 클로에와 이렇고 저런 관계인 남자의 정혼자라는 등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해 줄 것도 아니었으니.
“재밌는 인연을 만들었네.”
하긴, 클로에는 어딜 가나 사람의 마음을 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까. 데메트리안이 씨익 웃으며 제 턱을 어루만졌다. 그 ‘재밌는 인연’이 제 정혼자인지도 모르고.
라이언과 라구가 돌아가고서,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그 방에 더 머물러 있었다.
창문이며 허름한 선반 같은 것들을 살피니 손봐야 할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비단 벽지를 바르고 마레령의 깊은 숲에서 난다는 질 좋은 주목들로 만든 책장이며 책상을 다 짜 주고 싶었지만…… 그런 것들을 클로에가 바라지는 않을 거였다.
지금의 제가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저의 그 큰 허물을 들키지 않고서야 그녀에게 그 무엇도 납득시킬 수 없는 이때에. 그러니 상황을 완벽하게 제 것으로 가져오는 것 외에는 수가 없는 이때에.
클로에의 수족이라는 그 사내들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애초에 클로에의 사람인 그들에게 잘 보일 작정으로 자리를 만든 거였으니 무슨 상관일까. 예전 같았으면 알고 지내기나 했으리라 상상도 못할 마법사와 평민 소년에게 호감을 사겠다고…… 데메트리안은 슬며시 웃었다.
‘나리께서 직접 짜잔, 선물하시면 주인님께 점수 따실 수 있으시지 않으실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소년은 꽤나 천진하게 클로에와 저의 관계를 짐작하여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었다. 그래, 주변의 모든 상황을 다 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캄포의 대공과 맺으신 정혼을, 제게서 물려 주십시오.’
지난주, 클로에의 눈물을 보고 말았던 그날. 초조한 마음을 담아 데메트리안은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지난 몇 주간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고 있었나. 이 말을 아버지 앞에서 입에 올리는 순간을.
다만 이보다는 상황이 더 무르익고서 말씀드릴 심산이었지만……
그러니까 데메트리안은,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