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4)
제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은, 너무나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얻게 된 기회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데메트리안은 모든 상황을 그 어떤 흠도 없이 가져오고 싶었다. 제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기만 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잃은 적 없는 이가 될 것이었다.
‘숨겨 둔 정인이 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인데……’
진하게 빛나던 클로에의 녹색 눈동자. 그 눈빛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 그때의 저는 까맣게 몰랐다. 그것이 그리도 절박해질 것도……
그때까지 클로에가 제게 바라 온 것은 수많았지만, 그렇게까지 간절히 바란 것은 없었다. 그녀가 바랐던 것은 모두 데메트리안이 줄 수 있는 것, 동시에 굳이 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이었다. 첫 다과회의 깜짝 손님은 메리앤이 될 수도, 제러미가 될 수도 있었고, 데뷔탕트의 파트너야 허우대만은 멀쩡한 제 오라비가 있지 않던가.
데메트리안은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믿었다.
아버지께 당당히 말씀드리기 위해 공을 세우고, 그때와 어느 비슷한 상황도 만들지 않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레더릭을 주시하고, 대니얼을 살피고, 분리 독립파를 회유하고, 신전을 경계하고……
그때마다 데메트리안은 어떤 열망을 담아 진하게 빛나던 클로에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캄포의 미래 사위께서는 조신히 집안사람들과만 계시지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그래, 너답잖게. 왜 자꾸 추근대는 사람처럼 굴어?’
언제부터였을까, 그 눈동자가 멀어지고 있었던 것은.
데메트리안은 그저 제가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제가 뭔가 달리 행동하기 때문이었을까. 클로에는 제가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자꾸만 튀어 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클로에가 자리를 떠난 그날, 데메트리안은 처음으로 다시 클로에를 잃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제가 기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에게 아르투젠을 떠나지 않는 삶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옆자리는 자연히 제가 얻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제가 클로에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때부터 클로에는 제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있었다. 클로에뿐 아니라 에티엔도, 미라벨도, 대니얼도…… 무책임은 단 한 번도 저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사실 그날 아버지에게 그 말을 꺼내고야 만 것은 어떤 충동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충동적이었어도, 결정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정혼이 ‘맹세’인 걸 잊은 게냐? 거기에 크레벨이 무엇을 걸었는지도?‘
그래, 맹세. 어찌 제가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아버지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데메트리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당황했다.
‘크레벨이 거기에 건 것은 그란펠트의 장원과 원로원 의장으로서의 명예…….’
신전에서 하는 ‘맹세’는 주신께 바치기에 모자람이 없는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크레벨이 건 것은 크레벨이 소유한 영지 중 가장 비옥한 그란펠트의 장원, 그리고 근 천년 아르투젠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후계자에게 치명적인 결함만 없으면 크레벨에서 대대로 맡아 온 그 원로원 의장직이었다.
그 ‘맹세’는 당사자와 주신 간의 일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아무도 몰랐으나…… 이를 어긴다면 그란펠트의 장원은 캄포나 교단에 귀속되고, 원로원 의장직은 그의 대에, 어쩌면 이후에도 크레벨의 것이 되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제가 캄포와의 정혼을 하늘이 내린 의무처럼 여겨 온 단 하나의 이유였고…… 그리고 데메트리안은 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잊었던 덕분에 더욱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로이를 잃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쯤이야.’
데메트리안은 낡은 창틀을 슬쩍 쓸었다. 손끝에 먼지가 묻어났다.
‘노출되지 않도록 암막 커튼을 치고, 창은 방범이 될 수 있는 걸로 달면 되겠군.’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에게 제가 모르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황했지만, 이윽고 그것을 반갑게 여기게 되었다.
제가 지금 클로에에게 줄 수 있는 건 이 10평짜리 이 작은 공간이지만, 이 공간이 클로에가 가질 수 있는 저만의 첫 공간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클로에가 아르투젠에서의 생활을 간단히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꾸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패하여 클로에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오더라도, 이곳이 단 하나의 정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물론 그럴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클로에의 마음을 사는 것을 빼고는, 그는 모든 것을 제가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확신했다.
* * *
신전에서 돌아온 클로에는 저녁도 방으로 가져다 달라 하고는 틀어박혀서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루카의 응접실에서 실없는 소리를 깔깔대던 순간에도 마음 한끝에서 대롱이고 있던 상념이었다.
‘제이크 콜린스가 생활고가 심했다 했으니 도움이 되긴 했을 텐데.’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균형추를 건드려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원숭이 가면들의 수입이 줄었을까? 광대탈이랑 분리 독립파는 나 때문에 체포되긴 했지…….’
클로에는 제가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지난 두 달간 행한 일들을 떠올렸다. 진짜로 스무 살이었던 그때에 하지 않았던 일들, 그때의 저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
제가 살았던 미래에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일들을 꾸리고 있었고, 그건 그 지식이 있었대도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었으며, 모두 클로에가 내후년의 미래를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업을 할 생각도 한 거야? 책잡히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던 네가.’
‘응. 어차피 스칸다르에 낼 패는 나밖에 없어. 이 정도는 흠도 아니고…….’
불법 도박을 즐긴 것도 아니고, 추문을 흘린 것도 아니고, 그냥 귀족 영애의 소양으로 정해지지 않은 이윤 추구를 조금 해 본 것뿐이었다.
그래서 내년에 성배가 도난되고, 내후년에 스칸다르에서 발견될 성배를 놓고 황실이 협상 테이블을 벌이면 클로에는 무탈히, 정해진 대로 황실의 은인이 될 거였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 셰비크로 돌아갈 거니까……’
그것은 지금의 클로에에게 거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온 대륙의 진귀한 것들을 다 가질 수 있었던 셰비크의 별궁, 저를 금이야 옥이야 보살피시던 부군의 총애,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읽고 보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사들일 수 있으며, 적적할 때면 언제든 음악가들과 예인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시절.
그래서 클로에는 뷔욘의 호감을 사려 노력했다. 후일 그가 제게 베풀 호의를 위해.
하지만 제이크 콜린스의 일처럼 미래가 바뀌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클로에의 생각은 꼭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성배가 보관된 보물고, 몇 년 뒤 셰비크의 왕성을 오가게 될 보물고 담당 신관 안톤미오노…… 클로에가 그리고 있던 그 확실한 미래에 자그마한 균열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서 느껴지는 께름칙한 느낌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클로에는 논리적으로 따질 수 없었다.
* * *
“로이, 오늘도 외출 안 하니?”
“네, 쉬려고요.”
“그러면 오늘 오후에 이 어미랑 테라스에서 차 마실까?”
“좋아요! 마카롱을 종류별로 구우라고 해야겠어요.”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거의 매일같이 외출하던 클로에는, 신전에서의 일들을 계기로 며칠간 집에 머물렀다. 라이언에게도 이번 주에는 오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다행히 반드시 외출해야 할 일은 없었다. 시중에 나온 오염된 보석을 대충 다 사들인 모양인지 최근 얼마간에는 보석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마침 스칸다르산 모피를 활용한 시제품이 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기도 했던 것이다.
‘보석 정화만 바라봤다가는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접을 뻔했네. 이래서 캄포 대공녀가 그렇게 다양한 품목들을 다루나 봐.’
클로에가 요 얼마간과 달리 외출을 별로 않는 것을 보고 누아제트 남작부인의 수업이 조금 더 혹독해지기는 했으나, 오히려 몸을 쓰니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재밌는 일을 꾸리느라 왠지 소홀했던 어머니와의 시간도 챙길 수 있었고.
“요즘 그 아이는 보이지 않는구나? 그 키만 큰 남자애.”
“……큽.”
어린 시절의 과일 차까지 치면 다도 경력 20년에 달하는데, 클로에는 갑작스런 궁정백부인의 말에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이제 하던 일은 끝났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그 아이, 네 심부름꾼 아니었어? 사용인은 우리 저택에도 충분한데 굳이 바깥 아이가 드나드는 걸 보니, 네가 밖에서 재밌는 일을 꾸리는가 보다 생각했지.”
클로에는 맞은편에 앉은 제 어머니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진한 갈색의 머리칼 아래서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아 빛나고 있었다.
‘눈치채실 줄은 알았는데, 정말 눈치채셨구나.’
클로에는 방긋 웃어 보이는 한편으로, 어떤 문장으로 이실직고할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사실, 제가 지난달부터 조금 사업…… 비슷한 걸 하고 있어요.”
“무얼 갖고?”
“제가 우연히 망가진 장신구를 보게 돼서 한번 알레지오에 찾아가 봤거든요. 거기서 소개해 준 마법사가 말하길……”
아무리 어머니 앞이라지만, 제가 스칸다르로 간 것은 분명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었던 일. 미라벨에게처럼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클로에는 진실과 거짓을 살짝 섞어 어머니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대니얼과 데메트리안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얼추 비슷했다.
다만 그걸로 ‘사업’을 꾸린다는 것만은 어머니 앞에서야 처음 실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해 본 일이에요.”
“그렇게 된 거구나.”
아아, 과연. 고개를 끄덕이는 궁정백부인의 낯을, 클로에는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폈다.
“……혼 안 내세요?”
“내가?”
궁정백부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낯에 띄웠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