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모르는 만큼 수상하게 보인다 (2)
거칠한 낯이나마 순식간에 환해지는 낯에, 클로에는 제가 그를 어디서 봤을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아티장 지구에서였을까, 한들룽 지구에서였을까? 이전의 스무 살 때였다면 평민이 알은체하는 순간 곧바로 사기꾼이라고 의심했을 것인데……
‘상점 주인이나 오며 가며 말을 섞었던 이라면 기억에 있을 텐데……’
클로에의 얼굴에 의문이 깊어질 때였다.
“저는 제이크 콜린스라고 합니다.”
제이크 콜린스. 낯익은 이름에, 클로에가 입을 살짝 뻐끔거릴 무렵 남자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 화가입죠. ‘정원에 비치는 햇살’ 연작을 그린……”
“아!”
클로에는 대번에, 제가 루시엔을 처음 만나고서는 홧김에 그림을 사들였던 일을 떠올렸다. 클로에의 얼굴에서 물음표가 가시자 제이크 콜린스가 환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영애님께서 제 졸작을 크레벨 공작부인께 소개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제 다른 그림들도 팔리기 시작했고…… 생애 처음으로 살롱에 초청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고마운 마음을 어찌 표현할 줄을 모르는 양, 제이크 콜린스는 가슴 언저리에서 양 손가락들을 마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무명 시절이 꽤 긴 인사라 했었지.’
“살롱에 초청도 받으셨소?”
“예, 다음 달에 윈제르 백작부인께서 여시는 살롱에서 제 그림들을 소개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답니다.”
“……축하할 일이오.”
윈제르 백작부인. 크레벨 공작부인과 절친한 귀부인 중 하나로, 사교 시즌 중에 매달 살롱을 열어 신진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예술 애호가였다. 마담 에투알의 살롱이 예술을 심도 있게 즐기는 사람들에게 장르를 넘나드는 지적 유희를 선사하는 자리라면,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은 신진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팔거나 후원자를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장소였다.
실제로 제이크 콜린스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소개된 살롱 역시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이었다.
“마침 오늘 주신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영애님까지 뵙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제가 언제 한번 영애님께 제 그림으로나마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한 예술가의 장래에 이바지했다니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일이오.”
“아닙니다, 어떻게든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이크 콜린스는 뒤이어서도 연신 감사의 말을 내뱉으며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그의 낯에는 고단한 생활의 피로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의 거뭇한 안색과, 제가 아는 것처럼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될 그의 미래를 대조하며 클로에는 미묘한 혼란을 느꼈다.
“정말, 영애께서 제 은인이십니다. 저희 가족에게도……”
“아니오, 그대는 내가 아니어도 언제든 성공했을 것이오.”
“영애께서는 정말 사려 깊게도 말씀하십니다.”
제이크 콜린스는 제 공로를 과시하지 않는 귀족 아가씨에게 더욱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진짠데.’
그의 성공은 예견된 것이었고, 그래서 클로에도 부담 없이 그의 그림을 크레벨 공작부인에게 선물했었다. 하지만……
‘2년이나 빨라.’
제이크 콜린스가 유명해지면서 그의 그림들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떠난 해의 일이었다.
‘내가 살았던 미래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건가?’
소소하나마 돈벌이를 시작했고, 예전처럼 사교계 활동을 자주 하지 않는 대신 루시엔과 알게 되었지만, 그건 클로에에게 사소한 일에 가까웠다. 어쨌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제 신변과 관련된 변화였으니까.
하지만 한 예술가의 인생을, 그러니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클로에는 그때까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대륙에서 가장 호화로운 앙헬라타 대로에서 고작 한 블록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알레지오 뒤편의 마법사 길드에서와 같은 회색빛 스산함이 그 일대를 지배하니까. 의상실 직공들의 숙소나 의상실에서 하청을 받는 업체들, 혹은 원단을 거래하는 행상들의 창고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구역의 별다를 것 없이 허름한 건물 3층에, 라구는 ‘출장’ 명목으로 도착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방 한가운데에는 건물의 허름함에 맞추려는 건지 단출한 디자인의 응접탁자와 소파 세트가 있었는데, 디자인이 투박해도 소재가 고급이고 갓 제작한 티가 나 공간과는 사뭇 이질적이었다.
라구는 그 소파에 몸을 묻으며 2주 전, 제 의뢰인의 소개로 또 다른 의뢰인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라크루아 영애님 소개로 온 라구라고 합니다.”
“어서 오게. 일단 잠깐 앉으시게. 이것만 좀 처리하고.”
요즘 라구는 제 삶에 예기치 못했던 순간이 참 많이 닥친다고 생각했다.
오리포네 상점가 한 모퉁이서 자라난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일이라면, 오로지 마력을 타고나서 마법사가 된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의무 복무 기간을 제국 아르투젠의 수도에서 보내게 된 것도 조금 특별한 일이긴 했겠지만.
그런데 그냥 한번 보고 말 줄 알았던 제국의 고위 귀족 영애가 지속적인 거래를 제안하시지를 않나. 그것까지야 부업이라고 치면 되는 거였는데, 그분이 심지어 대대로 원로원의 의장을 지내고 있는 크레벨 공작가의 후계자를 소개해 주시는 게 아닌가.
거기서 그쳤다면 그냥 제도 생활이란 참 스케일이 크구나 했을 텐데, 심지어 그 콧대 높은 황실 마법사들을 귀찮게 하는 일에 한몫 단단히 하게 생겼다!
뭔가 엇나간 기쁨을 숨긴 채 라구는 소공작이 안내하는 대로 소파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제가 순간이동하여 그 서재에 들이닥쳤을 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크레벨 소공작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보던 서류에 다시 시선을 묻었다.
‘영애님께서 요즘 원로원이 이 문제 때문에 위기라 하셨으니, 바쁠 만도 하지.’
그동안 라구는 겁 없이 눈동자를 굴려 크레벨 후계자의 장서를 훑었다.
문 옆에 시립해 있는, 호위 기사인 듯한 이의 시선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것이 불쾌할 법도 했지만, 라구는 그냥 눈인사를 해 보이고 시선을 비꼈다.
‘내 무력을 가늠하는 거겠지? 아직 검기를 온전히 발현한 자는 아닌 것 같은데.’
파이겐이 저를 제 주군의 심기를 어지럽힌 ‘연모하는 이의 이성 지인’으로 살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라구는 이 방에서 제 목숨이 위협당할 경우를 대비해 어떤 마법을 펼칠지 한 다섯 가지 정도의 포메이션을 짰다.
그럴 즈음에 만년필 뚜껑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나며 데메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무늬 없는 셔츠에 별 장식 없는 정장 바지만 입고 있는 소공작은, 슬리퍼 바람으로나마 품위 있는 걸음걸이를 선보이며 금세 라구의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면 사교계에서도 이름 높은 양반일 테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둘러싸고 있는 진한 눈썹과 각진 턱선이 그의 딱딱한 성정과 남성미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순수하게 학자의 시선으로 그의 진중한 이목구비 비율에 감탄하며, 라구는 상대가 제 맞은편 소파에 자리하는 그 잠깐의 간극도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제가 무엇으로 시연해 보이면 되는 걸까요?”
라구 특유의 그 단도직입적인 화법에 데메트리안이 살며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차, 형식적인 화법을 무시하면 귀족 나리들이 불쾌해할 수도 있다고 영애님께서 그러셨지.’
미미하게나마 걱정을 한 것이 무색하게도, 크레벨 소공작은 별말씀 없이 넘어가실 따름이었다.
‘평민들조차 허례허식을 차리길 바라는 고매하신 치는 아니신가 보군?’
제가 클로에의 지인이기에 큰 혜택을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라구는 소공작의 인품을 후하게 평했다.
“경, 내 방에서 아무 커프스 버튼이나 하나 가져다줘. 보석 달린 걸로.”
“예.”
오늘 라구의 방문은 크레벨의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었기에, 따로 하인을 시키지 않고 파이겐이 직접 움직였다.
제가 로이와 관련해서 감정적으로 굴 때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요상한 표정을 짓곤 하는 그의 걸음 소리가 적당히 멀어졌을 때.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라구를 만나기로 했을 때부터 만들어 둔 문장을 뱉었다.
“로이와 아는 사이라고?”
“네?”
‘지인’으로 분류될 이 마법사가 클로에의 어린 시절 애칭을 알 리가 만무한데도, 데메트리안은 음절 하나하나를 강조하듯이 또박또박 내뱉었다. 마치 너는 이거 모르지, 하는 듯한 말투…….
알아듣지 못했다는 라구의 표정이, 데메트리안은 자못 흡족했다.
“아, 라크루아 영애 말일세. 그녀에게 자네 같은 지인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네, 어쩌다 보니……”
그 몇 마디의 대화와 거기에 묻어나는 기색만으로도 라구는 이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야 말았다. 그는 눈치를 안 보는 거였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어쩌다 보니 영애님의 일을 도와드리게 되어서, 그러니까 저희는 업무 관계로 엮인 사이입니다, 예. 영애님께서 제 능력을 좋게 봐 주신 덕택이죠.”
라구는 진심을 다해 저의 무해함을 피력했다.
향학심 충만한 마법사 라구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꽤나 박식했다. 평민 출신에다가 마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마도구 전공이었기에 처세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제 문제는 나 몰라라 해도 남의 일은 잘 본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영애님께서 단순히 친우라 소개하셨던 것과 달리, 소공작께서 품은 감정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수로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용주와 저의 관계를 변명하려면 소상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클로에의 사업 이야기를.
“로이의…… 일?”
제게 대꾸하는 그의 안색이 일견 파리할 정도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크레벨 소공작은 며칠 뒤 마법사 길드를 통해 라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한 장의 의뢰서와 함께, 며칠 뒤 만나자는 말까지.
거기에는 지금 라구가 앉아 있는 빈방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영애님께 비밀로 하고 만난다라…….’
이 비밀 회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차, 라구의 귀에 조심스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는 들어올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경께서 먼저 와 계셨군요?”
“예. 영애께는 따로 말씀 안 드리셨지요?”
“헤헤, 제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라이언이 어설프게 웃으며 조끼 안주머니에서 납작한 파우치를 꺼내 든 것을 쏟아냈다.
안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진 그 가죽 파우치는 역시 라구의 실험작으로, 부피 있는 물건을 넣어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석이 마력에 다시 오염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포털에 비하면 개입하는 마력이 현격히 적기에 혹여 오염되더라도 육안상 차이가 없을 거라는 계산이 반영된 마도구였다.
덕분에 라이언은 겉으로 티 내지 않고도 보석을 품에 지니고 다닐 수 있었다. 아무래도 손가방을 따로 들고 다니는 건 무서웠는데.
라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그 보석들을 정화하는 것을 보며 라이언은 여기에 오는 동안 입을 근질거리게 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크레벨 소공작 나리께서 아무래도 저희 주인님을…… 그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