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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34화 (34/189)

34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7)

데메트리안은 제가 분위기에 취해 내뱉은 말들에 스스로 당황해 있었다. 그리고 낯설게 빛나는 클로에의 초록색 눈동자에, 조금 전까지 낯설게 뛰던 심장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아직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을 때니까, 너무 섣불렀어.’

클로에를 잃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종종 충동을 못 이기는 자신의 모습에 낯설어질 때가 많았다.

오늘처럼 클로에가 너무 사랑스러울 때면, 그러다가도 그 낯에 저에 대한 실망감이라도 깃들라치면, 그 기색을 지워내기 위해 다급히 아무 말이라도 던지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껏 제 감정을 담은 말이나 타인의 감정을 돌보기 위한 말을 할 필요 없이 자라 온 데메트리안 크레벨에게는 그건 매번 헛발질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이유 모를 침울함이 깃드는 것을 지켜보던 클로에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정말 울고 싶은 건 누군데.’

파우더룸에 걸린 거울에 낯설도록 아름답게 꾸며진 제 얼굴을 비추며,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참담한 마음을, 그럼에도 두근대는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어차피 2년 뒤면 별도리가 없는 일이잖아.’

서로가 어떤 일을 겪었고, 서로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축제의 장터거리에 제가 기억하는 유형의 불한당들이 설치고 분리 독립파가 테러를 일으키려 했다면, 내년 대축일이 돌아오기 전에 성배가 도난당할 거였다.

데메트리안이 혹여 정말로 그 맹세를 깰지라도, 그 미래가 온다면 황제는 크레벨 공작가가 아닌 스칸다르의 왕실에 라크루아의 영애를 내어줄 거였다. 물론, 그가 후계자로서의 책임감은 나 몰라라 하고 정혼을 깬다는 것부터가 그릇된 전제였지만.

‘……그러니 흔들리면 안 되는 거야.’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 클로에는 코스요리에 포함된 디저트들을 조금씩 깨작대며 함께 나온 스위트 와인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했다. 데메트리안이 공수해 온 데쎄르의 치즈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데메트리안도 덩달아 맛을 별로 즐기지도 못한 채 클로에의 눈치만 살폈다.

다시금 크레벨의 마차로 궁정백저까지 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각자 창밖에 시선을 둘 뿐.

클로에는 어쩌면 제 마음의 궁금증들을 쏟아낼 수 있던 기회였을 것을 놓쳐서 할 말이 없었고, 데메트리안은 데메트리안대로 클로에의 마음을 가늠하느라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감정을 돌보는 것이란…… 제 마음을 내어줘 버린 쪽에는 더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근처 선술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돌아온 파이겐은, 나란히 앉은 그들 맞은편에 자리해서는 그 적막을 오롯이 저 혼자의 민망함으로 안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들 이러시네.’

“라비? 왜 나와 있어?”

클로에가 데메트리안과 헤어져 현관으로 들어왔을 때, 늘 맞아 주는 집사 대신 미라벨이 나와 있었다. 응접실에서 홀로 기다린 모양이었다. 파이겐이 있기에 미라벨은 대동하지 않았었는데, 혼자만 맛있는 걸 먹었다는 생각에 클로에가 데쎄르의 치즈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같이 먹을래? 데쎄르 치즈케익 포장해 왔어.”

레스토랑의 직원에게 심부름을 보내면서 한 조각만 사오라 할 수 없었던 탓에 홀케익의 남은 부분들은 포장된 그대로 클로에에게 보내는 선물이 된 것이었다.

“와, 이게 다 뭐야? 그래, 오랜만에 얘기도 좀 하고.”

덩달아 신난 듯 대꾸하는 미라벨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요 얼마간 제가 갖고 있었던 마음의 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젠 슬슬 얘기해야겠지.’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다 되었고, 그동안의 일들엔 늘 미라벨이 함께였다. 원래라면 집에서 책을 읽거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제 단조로운 일상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아티장 지구를 헤매고 사업을 한다고 난리를 피우니 이상해 보이기도 했을 거였다.

그런 때마다 미라벨은 무슨 연유인지 궁금한 낯을 띄우다가도, 이내 두말 않고 따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제 라이언과 라구를 만났을 때, 미라벨이 소외되었단 느낌을 받아 쓸쓸해했던 것이 클로에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이야기했었는데. 역시 고용 관계라 어쩔 수 없나 싶은 느낌도 받았을 거야.’

엄밀히 말해 고용 관계는 맞았지만, 저들끼리는 그냥 친자매 같은 소꿉친구라 생각하고 지내 왔으니까. 분리 독립파를 급습하려다 제가 다칠 뻔한 것에 미라벨이 징계를 받았을 때와 같은 류의 미안함이었다.

‘이제는 털어놓아도 괜찮겠지? ……갑자기 셰비크의 별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언젠가 말해야지, 언젠가 이 기묘한 감각에 대해 상의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속내를 털어놓느라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또는 제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 자꾸 미뤄 왔던 것이다.

“라비, 오늘 내 방에서 같이 잘래? 치즈 케이크도 있고, 와인 한잔하자.”

“백작님 컬렉션 슬쩍하는 거 맛 들인 거야?”

“공범 돼 줄 거지?”

“……내일 일정 뭔데.”

“집에서 회복? 너 움직일 일 없게 할게, 응? 나 오늘 너무 힘들었단 말야.”

“왜, 데미 공자가 또 괴롭혔어?”

“말도 마.”

클로에가 과장된 한숨을 지어 보이자, 미라벨은 키득대며 클로에의 꼬심에 넘어가 주었다.

녹진함이 일품인 치즈케이크에, 아버지의 술장에서 슬쩍한 과실 향이 진하게 풍기는 라쥐르 지방의 스위트 와인까지. 착잡한 마음에 별로 즐기지 못한 마레와 라쥐르에서의 디저트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흥이 오른 미라벨과 클로에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깔깔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장터거리에서 본 웃겼던 일이나, 어리바리한 라이언의 말투, 라구의 손버릇과 같이 최근 새로이 쌓아 가고 있는 그녀들의 추억이 주된 소재거리였다.

“아니 근데, 데미 공자가 이걸 선물했다고?”

크레벨 소공작에게 유명 제과점의 케이크 한 판이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 데미 공자’가 이런 걸 샀다는 점에서 미라벨은 놀랐다.

시간과 돈을 들여 클로에의 취향을 맞춘다라. 그녀가 보기에 데미 공자는 클로에를 아꼈지만, 그 표현은 손에 쥐이지 않는 것에 그치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꽃다발 보낸 것도 그렇고…… 데미 공자 요즘 왜 저답잖게 굴지? 철들었나?”

미라벨의 말에 클로에가 푸핫,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작가 후계자’ 딱 그대로 자라 온 크레벨 공자님께 철이 안 들었다는 평가를 하는 건 세상에 미라벨 하나일 거였다. 왜냐고 물어보기가 새삼스러울 만큼 아주 어렸을 적부터 미라벨은 데메트리안을 같잖게 평가해 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가 미라벨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도.

“아니지, 철든 사람은 아침 댓바람부터 다짜고짜 레이디를 찾아오지 않지. 그럼 사춘기?”

“하하, 그게 뭐야.”

또 웃음이 터져서, 클로에는 한참 배를 잡다가 눈물을 콕콕 찍어냈다.

“그러게 말야. 오늘도 좀 이상했는데…….”

“그러니까 말야. 왜 갑자기 외출을 하재? 데이트도 아니고.”

미라벨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옆구리를 은근한 팔짓으로 찔러 왔다.

“그래서, 요 아가씨야. 설렜어? 그래서 그렇게 차려입고 나갔던 거야?”

“아하하.”

클로에는 괜히 또 한 번 과장해서 웃어 보이고는, 천천히 만들어 둔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가 낯설게 구는 것을 논하기 전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꼭꼭 담아 둔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려니, 그렇게라도 자꾸만 미루게 되었던 것이다.

“라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에 미라벨이 얼굴에 가득 채웠던 웃음기를 지웠다.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직감해서였다.

클로에의 녹색 눈동자와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어스름한 마정석 램프의 빛에 잠겨 들어갔다.

“긴 꿈을 꿨어.”

“또 꿈?”

“응, 또 꿈.”

얼마 전 ‘꿈’이라고 둘러댔던 것이 예사 꿈만은 아님을 감지했었던 미라벨이 진지한 낯을 띄웠다.

“그 꿈에서 나는 25살까지 살았는데……”

클로에는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그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젠가 말해야지 싶었기에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고쳐 담았던 이야기라 간결히 정리돼 있었지만, 막상 내뱉는 건 처음이어서인지 아주 조금씩, 조금씩 풀어내었다.

내후년에 자기는 제국을 위해 스칸다르의 왕자와 결혼할 거고, 그때 너도 함께 갔었다고. 그런데…… 네가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고.

“믿어지겠어?”

“네가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

그녀는, 클로에의 미라벨은 클로에의 진지한 말을 허투루 듣는 일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미라벨은, 제가 요즘 들어 궁금해 했던 것들을 몇 가지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분리 독립파를 찾아 나서게 된 거야?”

“응, 정말로 퍼레이드 때에 그들이 테러를 일으켰었거든.”

“그럼 네가 스칸다르산 마정석에 대해 잘 알게 된 것도?”

“그치, 그 나라에서 몇 해를 살았으니까.”

“……그러면 황자궁 도서관에서 웬 애들 책을 빌린 것도……”

그 모든 물음들은 지근거리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는 그녀가 품기에 합당한 의문이어서, 클로에는 털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저를 이토록 잘 아는 건 미라벨뿐이어서.

“그럼…… 네가 기억하는 일들이 다 미래에 일어날 거라는 거지?”

“지금까지 일어난 것들을 보면…… 응.”

“그랬구나.” 미라벨이 제 와인 잔을 흔들어 그 찰랑이는 양을 눈에 담으며 입을 삐죽댔다.

“……아무리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야.”

“미안. 근데 네가 혹시 못 믿을까 봐 걱정됐단 말야.”

사실 클로에가 꿈이라 생각하는 건 그때가 아닌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깰까 봐, 너에게 다 털어놓느라 너의 해맑은 모습을 다 누리지 못하고 다시 엄숙한 셰비크의 별궁으로 돌아갈까 봐 말하지 못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셰비크에서 멀어져 버린 미라벨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가슴을 콕콕 아프게 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널 왜 못 믿어?”

“미이아안.”

클로에는 제 잔을 미라벨의 잔에 부딪쳤다.

챙, 맑은 소리가 먹먹히 울렸다.

클로에는 미라벨이 느꼈을 그 괴로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셰비크의 별궁에서 점점 저와 거리를 두는 미라벨을 볼 때 제가 느낀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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