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6)
함께 궁정백저를 나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이 그에게는 감동이었다. 어쩌면 여느 때처럼 둘만의 독서회를 펼쳤던 그 순간까지도…… 벅차오르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의 낯을 살폈다.
제 앞에 놓인 대구살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입에 넣는 우아한 손짓, 그걸 또 오물거리는 도톰한 입술, 그 맛을 가늠하려는 듯 살짝 실금이 가는 미간 같은 것들.
데메트리안은 정작 저는 요리에 손도 못 대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조심스레 물었다.
“입에 맞아?”
“응, 해산물 요리가 고티유에서 이렇게 괜찮기 힘든데.”
전채였던 상큼하게 간을 한 농어 카르파초에 이어 메인 디시인 대구살 스테이크까지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는지, 클로에의 얼굴에 꾸밈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곁들여 나온 화이트와인도 풍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긍정적이기 그지없는 클로에의 반응을 확인한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안도한 듯 풀어졌다.
“다행이다.”
데메트리안은 이 레스토랑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클로에와 함께 오고 싶었었다. 라쥐르의 주인인 라쥐르 공작가가 클로에의 외가였으니까. 어렸을 때 클로에로부터 라쥐르령으로 여름휴가 다녀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데메트리안은 어느새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라쥐르령의 햇볕 쏟아지는 백사장에서 클로에와 뛰노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거 봐, 바다에서 매일 놀다 보니까 이렇게 타 버렸어. 남쪽 지방 사람들은 다 전생에 뱀이었을 거야. 이렇게 껍질이 벗겨지잖아.’
‘밤에는 바닷가 별장 정원에서 해산물 바베큐 파티를 했어! 새우랑 랍스터를 그릴에 구워서 먹었는데, 바다 맛이 나지 뭐야. 라쥐르에서는 밤하늘에서도 바다 냄새가 나.’
‘나 신 요리 안 좋아했잖아? 근데 라쥐르에서는 문어랑 한치랑 새우랑, 아무튼 다 새콤하게 먹는 거야. 그게 너무 맛있었어. 근데 고티유의 신 음식은 또 다 맛없어.’
라쥐르의 자랑인 해산물 요리들은 데메트리안에게 클로에의 휴가철 음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티유나 크레벨 영지의 그 어느 실력 좋은 요리사의 손에서 나온 해산물 요리를 맛볼지라도, 그건 그에게 진정한 해산물 요리가 아니었다.
내륙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해산물 요리는 데메트리안에게 그런 것이었다. 제가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것, 클로에와 함께가 아니라면 평생을 가도 먹지 못할 것.
그래서 데메트리안은 오래간 이 레스토랑에 클로에와 함께 오는 것을 상상해 왔다. 아무리 마정석 냉동고가 발달했어도 포털을 이용하지 않고는 ‘산지 직송’이 불가능했기에, 이곳에서처럼 괜찮은 ‘클로에의 외할머니 댁 음식’을 시도해 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로에와 함께 오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왔었지만, 이제야 같이 오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라쥐르에서 먹는 것만큼 괜찮아?”
“응, 세련되게 잘했네. 비리지도 않고. 라쥐르 음식은 라쥐르 주방이 최고긴 하지만.”
“나도 가 보고 싶네, 라쥐르.”
데메트리안이 막연한 희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언제 놀러 가 봐. 할아버지가 너 온다면 좋아하실 거야.”
젊은이들하고 어울리는 거 얼마나 좋아하신다고. 클로에는 그가 내뱉은 말이 어떤 희망으로 이어지는지 상상도 못한 채 대꾸했다.
폐쇄적인 타국으로 시집갔던 귀비 전하께는 제 부군께 어머니 고향의 음식을 소개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니.
그 사연을 클로에로부터 직접 들어 알 기회는 없었지만, 클로에가 후에 그리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진땀을 흘렸다.
‘……다시는 없을 일이야.’
그런 데메트리안의 심사를 알 리가 전혀 없는 클로에는, 오래간 못 먹었던 라쥐르의 음식을 제대로 구현한 음식들에 마음이 노곤노곤 풀어져서는 살갑게 재잘대기 시작했다.
“라쥐르령에서 먹는 건 진짜 차원이 달라. 여기 음식도 충분히 좋지만, 갓 잡은 해산물들로 바로 요리하니까 정말 비린내 걱정도 없고, 소스가 달리 필요 없다니까. 소금이랑 후추로만 간해도 기가 막혀. 에티엔도 약혼자가 생기면 꼭 라쥐르로 여행 가서 진짜 라쥐르 음식을 맛보여 줄 거래.”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기 좋은 노랫소리 듣듯 감상하고 있던 데메트리안은, 갑작스레 울린 에티엔의 이름에 제 동료에게 갚아야 할 것이 떠올랐다.
“혹시 누구 소개받을 생각 없을까?”
“엥?”
웬 소개? 황당하다는 듯이 토끼 눈을 뜨는 클로에의 모습에 데메트리안은 또 한 번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긴장한 마음이 이상한 말을 만들 줄도 모르고, 큰 고민 없이 내뱉은 말이 정말로 이상했던 것이다.
“아, 아니, 에티엔 말야. 선 자리를 원하는 영애가 있어서.”
“아…… 난 또 뭐라고.”
제게 누구를 소개하려는 건 줄 알고 너무나도 놀랐던 클로에의 마음이 반대급부로 한껏 가라앉았다.
“딱히 들은 건 없는데…… 걔도 고심하는 중 아닐까? 우리가 우리 마음만으로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
정혼자 있는 누구처럼 말야. 풍미 좋은 라쥐르 음식을 먹어 누그러졌던 클로에의 마음이 다시 박정 모드로 돌아섰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데메트리안과 재회한 것이 못내 반가웠지만, 그리웠던 만큼 설렜지만,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클로에는 매일같이 제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그의 낯선 다정함에 별 기대를 걸지 않으려고.
‘무엇보다 데미의 정혼은 맹세로 이뤄진 거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소개해 주겠다는 듯한 말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을 때, 클로에는 그런 감정을 겪는 저 스스로에게 놀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망했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리고 제가 스스로 실망하게 되는 건, 그러니까 자꾸 다짐과 다른 감정을 갖게 되는 건…… 모두 전에 없는 행동을 하는 데메트리안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다정히 굴던 인간이었던가?
그가 저와 만날 때 꽃을 챙기던 인간이었던가?
그가 제 말을 다 옳다는 태도로 듣는 인간이었던가?
그가 입가에 미소를 계속 걸고 있던 인간이었던가?
그가 제 모습에 심장이 떨려 못내 말도 못 이을 정도로 저를 아낌없이 연모하는 인간이었던가?
오늘 하루 동안 같이 있으면서 치솟는 이 의문들 중, 클로에는 그 무엇 하나에도 긍정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걸까. 어차피 우리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그리도 맹신하는 후계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릴 것도 아니면서.’
클로에는 어느 날, 제국의 첫 황후에 대해 ‘책임감이 없었다’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왜, 물려? 역시 라쥐르령에서 먹는 거에 비하면 별로야?”
갑작스레 가라앉은 클로에의 낯에, 데메트리안이 초조함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그의 기색에마저 씁쓸함을 느끼며, 클로에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침울해진 마음으로 묵묵히 메인 디시를 다 해치웠을 때였다.
“다 드셨으면 디저트 준비해도 괜찮을까요?”
“그, 따로 부탁한 것까지.”
“예.”
데메트리안과 눈빛을 주고받던 웨이터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을 보자 클로에의 심란함은 더 깊어지고 말았다.
“디저트인 사과 절임 타르트와 초콜릿 케이크, 그리고 따로 주문하신 데쎄르의 치즈케이크입니다.”
데쎄르의 치즈케이크. 클로에가 살면서 맛본 중에 가장 맛 좋은 치즈케이크라고 단언하고 다니던 앙헬라타 대로 고급 제과점의 것이었다. 식문화가 사뭇 다른 스칸다르에서 지내던 동안 이따금씩 그리워했고,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도 여태껏 맛보지 못한 거였다.
그리고, 미리 웃돈을 주고 의뢰해서 레스토랑의 직원이 앙헬라타 대로 한복판까지 가서 사 오도록 해야만 했을 별식.
그걸 보는 심정은……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책망하듯 말했다.
“데이트도 아닌데 뭘 이런 것까지 했어?”
그래, 이건 너무나도 데이트 같았다. 그와의 밤 외출을 위해 야회복을 차려입고 치장할 때부터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래서 자꾸만 제 마음을 번잡하게 만들던 그 생각.
처음 치장할 때만 해도 좀 놀려 주고픈 심정이었는데, 오히려 데메트리안이 저를 놀리는 것 같아 말에 가시가 서고 말았다.
분명 사교계에 소문 날 거리다. 아무리 방처럼 벽으로 구분되어 있고 입구마저 커튼으로 가리워진 VIP석에 앉았대도, 오며가며 마주친 누군가나 크레벨 소공작의 특이한 주문을 받아든 직원들 사이에서 분명 말이 만들어질 일이었다.
‘그걸 가장 두려워했던 게 누군데.’
클로에의 원망 섞인 눈초리에 당황한 데메트리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데이트면 뭐 어때.”
“너랑 내가 단둘이 있는 게 데이트면, 넌 진즉에 소박맞았어.”
그런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를 갈듯이 내뱉은 그 말에는 언짢은 기색마저 담겨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그런 클로에의 낯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예전 어느 순간들에서처럼 가라앉은 눈빛으로.
“……안 돼?”
“뭐?”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어느새 데메트리안은 탁자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고서 클로에 쪽을 향해 몸을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어떤 간절함, 절박함, 그런 것들이 피어올라 있었다. 클로에는 그의 낯에 그런 류의 감정도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되었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고, 또……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그런 무책임한 말도 할 줄은 몰랐네.”
낮게 틀어서 묶은 머리칼에 얹어진 작은 모자의 깃털과 망사 장식이 클로에의 얼굴에 묘한 그늘을 만들어냈다. 고개를 살포시 떨구어 드리워진 음영 속에서 클로에의 녹색 눈이 낯설게 빛났다.
오늘 궁정백저의 현관에서 새로이 반했던 그 차림새의 클로에를 앞에 두고서, 데메트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