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8)
셰비크의 궁인들은 모두 제국에서 온 귀비와 그 측근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았고, 그래 봐야 스물셋에 불과했던 미라벨은 요령 없이 맞서 싸우는 편을 택했다가 큰 코가 다쳤다. 그러고선 스칸다르 촌것들에게 책잡히지 않겠다며 궁중 예법을 필사적으로 익혔더랬다.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있자, 라비.’
‘그럴 수 없습니다, 전하.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차분한 눈빛에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던가.
시녀 한둘 있는 걸 모른 체하고 같이 반말하며 놀았다가 미라벨이 한동안 시녀장의 지독한 빈정거림에 시달렸던 걸 아니, 저만 좋자고 조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분명히 미라벨로서도 무슨 계산이 서서 그랬던 거였을 텐데, 그걸 끝내 모른 채 스무 살 때로 돌아왔다.
그래서 클로에는 내심 지금의 이 기묘한 체험이 좋았다. 미라벨에게 미안해질 일을 만들기 전에,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그 미안해질 일이 없도록 할 수 있으니까.
스위트 와인 한 병을 결국 다 해치우고 주방에서 또 몰래 가져왔던 중저가 스파클링 와인을 한 병 다 비우면서, 클로에와 미라벨은 한참을 떠들었다. 취기가 빚어낸 말들은 밑도 끝도 없이 대범해져만 갔다.
“아니, 결국 데미 공자가 끝내 약혼을 안 했다고?”
“뭐, 더 나중엔 하지 않겠어? 그냥 소식만 없었던 건데.”
“휴…… 그 뺀질한 애송이.”
미라벨이 데메트리안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드물다는 것은, 종종 있기는 있던 일이라는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정혼자 만들 생각 안 하고 지낸 게 다 데미 공자 때문 아냐? 계속 근처에서 맴돌면서 사람이 정을 못 떼게 굴잖아.”
백작님 부부께서 네가 청도 않는데 정혼자 붙이실 분들도 아닌데 말야, 미라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르투젠에서 딸들은 기본적으로 정략혼을 통해 가문에 이바지하는 존재인데 말이다.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는 황자와 혼인할 수도 있어서 그랬던 거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미라벨이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가끔 데메트리안을 웃음거리로 삼는 적은 있었지만 늘 ‘데미 공자’라며 친하게 굴어 몰랐더랬다.
“그래도 결국 나 비전하 됐잖아.”
“그게 뭐야, 정실도 아니고. 난 네가 리도테 수석 놓친 것도 얼마나 아까웠는데.”
“너뿐이야, 정말.”
클로에는 팔을 뻗어 미라벨의 허리에 안겼다. 의자에 앉은 채여서 옆자리에 허리를 누인 불편한 모양새였지만, 미라벨의 품이어서 좋기만 했다.
“그래서, 왕자님이랑은 행복했어?”
“음…… 그랬던 것 같아.”
클로에는 이제는 꿈만 같은 셰비크의 별궁 시절의 생활을 떠올렸다. 가끔씩 꾸는 그 호화로운 시절에 대한 꿈과, 얼마 전 황궁의 중정에서 뷔욘을 마주쳤을 때 떨리던 마음까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손을 꼭 잡고 클로에의 침대에 함께 누웠다. 어렸을 때엔 스스럼없던 일들이 나이 먹고서는 큰맘 먹어야만 하는 것이 되곤 했다.
스칸다르에 가서도 클로에는 자주 이 손을 그리워했었다. 그때마다 미라벨은 난처하게 웃으며 거절했지만.
“라비, 그러니까…… 내후년에 내가 스칸다르로 가게 되더라도, 같이 갈 필요는 없어. 미리 그렇게 말해 두는 거야.”
그때 가서 내가 말을 바꿔도 넘어가지 마. 그 말에, 자려고 눈을 감고 있던 미라벨이 한쪽 입꼬리를 늘였다.
“혹시 모르지. 네가 모르는 더 나중에 내가 별궁 실세가 되고, 왕자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예쁜 남자 만나서 사랑도 하고 그랬을지 어떻게 알아?”
미라벨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에가 몇 년 뒤의 제 모습이라며 말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어딘가 낯선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지는 마음에, 클로에는 미라벨의 팔을 끌어안았다.
* * *
‘사과해야 하는데.’
클로에로서는 날벼락 같았을 것이다. 제가 갑자기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구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려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지만, 다시금 클로에를 곤란하게 만들 게 뻔했다.
‘선물이라도 보내면…… 역효과일 텐데. 어쩐다.’
생각이 짧았다. 클로에가 늘 제게 졸업 연회 파트너며 첫 다과회 참석 같은 것들을 요구해 왔기에, 남들의 이목이며 책무를 생각하는 것은 저 혼자뿐인 줄 알았으니까. 사실 그게 모두 일종의 오기였던 것도 모르고.
데메트리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클로에의 동반자가 되는 일에 관해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제가 통제할 수 있도록 상황을 가져오고 싶었기에 아직 내놓고 말할 수 없는 소망이었지만. 하지만 그 상상의 끝에는 결국…… 황제의 불허가 있었다.
황제에게 라크루아 영애는 아주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카드였다. 제 딸도 아니건만. 황제는 제게 고위 귀족의 결혼을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을 알차게도 써먹었다. 근 천 년 제국의 역사에서 이런 군주란 없었을 정도로.
그리고 지금, 데메트리안은 라크루아 영애의 혼처 후보 중 하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황실의 후계자 구도가 좀 일찍 잡혔다면 클로에와 정혼했을지도 모를 상대.
“여어, 소공작.”
제국의 2황자 대니얼이 오늘은 정말로 비번이어서, 함께 오찬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니얼은 후계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황성 기사단 중 최하위인 제3기사단에 들어가고도, 단장이 아닌 부단장을 맡고 있었다. 한데 1황자와 연년생인 데다 어려서부터 문으로든 무로든 우등한 기량을 선보이고 인품 또한 좋았기에, 그를 따르는 이가 많아 그 노력이 무색한 게 문제였다.
“무슨 일 있었어? 왜 얼굴이 죽상이야?”
데메트리안을 보자마자 걱정하는 낯으로 건네는 다정한 말.
무사답게 잘 다져진 몸과 두툼한 손을 갖고도 그는 이토록 섬세한 눈길로 제 친우를 돌보곤 했다. 그래, 바로 이런 인품이 그를 후계자 경쟁 구도에서 멀어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왜 죽상이냐면, 어제 섣부른 짓을 했어서랄까.
이를 입 밖에 낼 수 없는 데메트리안은 둘러대며 그의 악수를 받을 뿐이었다.
“어제 잠을 좀 못 잤거든.”
온전히 틀린 것도 아닌 그 말에 대니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프레더릭이 대검 같은 인물이라면, 대니얼은 잘 벼려진 레이피어 같았다. 정작 그가 쓰는 무기는 대검이었지만. 희고 미끈한 낯에 고동색 머리칼을 늘 깔끔하게 넘기고, 근무가 없는 날에는 늘 칼같이 다린 정복을 입고 다녔다. 정통 무가인 외가 캔달우드의 피를 진하게 받아 천부적인 무사였지만,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과 함께 이런 세심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갈수록 인기가 많아지시더라?”
화제를 돌리고자, 데메트리안은 착석하자마자 시종이 가져다준 삶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두 살 차이의 두 사내는 어려서부터 교류한 데다 제국 아카데미마저 함께 다닌 덕에 친분이 깊었다.
“우리 어르신들께서 어전 회의에 왜 등청 않으시냐고 맨날 성화야.”
“진짜, 나는 황자의 의무도 간신히 수행하는데 곤란해 죽겠다. 네 미래의 장인어른께 은퇴 좀 해 주시라고 좀 전해 주라.”
그 ‘간신히’의 기준이 남들보다 높은 덕에 2황자에게 거는 원로원 노귀족들의 기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대니얼은 제 큰아버지 캄포 대공을 만날 때면 얼른 작위를 넘겨주시라 앓는 소리를 내었고.
“캄포 대공위가 네게로 넘어가면 내 정혼도 깨지려나.”
“내가 널 좋아하지만, 상상에서라도 날 이용하진 마. 네 연애사는 네가 정리해.”
비웃는 기색을 띠고서 대니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는 캄포 대공녀 루시엔도 예쁜 사촌동생이었고, 클로에도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 온 영애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니얼뿐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저의 마음을 알지 못했을 때에도 처신 똑바로 하라며 단호히 말해 온 것은.
‘너는 네가 다 잘 숨긴다고 생각하지? 다 보여.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보면.’
잘도 그런 느끼한 말을 덧붙이는 게 문제였지만.
사람을 기민하게 살피는 그의 성정 덕에, 제3기사단은 그가 부임하고서 창단 이래 가장 우수한 기량과 끈끈한 조직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런 면이 원로원 어르신들께 매력으로 여겨지는 거겠지.’
데메트리안은 어느새 시종들이 전채로 날라 온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피식 웃었다.
대니얼은, 끝의 끝까지 그의 비겁함을 힐난한 인물이었다.
‘제 마음을 살필 용기도 없는 놈이 어떻게 공작가를 책임지겠다는 거냐? 너처럼 감정도 모르는 자에게 생계가 휘둘릴 크레벨 영지민들이 불쌍하다.’
‘원할 때 잡아. 잡을 수 있을 때 잡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말들은 데메트리안에게 마치 저주처럼 느껴졌었다. 그러고서는 제 허망한 낯을 마주할 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는 듯이 이죽대던 그 얼굴…….
그땐 가문에 대한 책임감을 일순위로 삼는 저를 모욕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지만, 지금에는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이해득실과 관계없이 사람의 감정을 돌본다는 것을, 데메트리안은 이제야 시도하기 시작했으니까.
무엇이든 쉽게 잘해 내는 데메트리안이라도 그것만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의 취미에 대해 알은체를 한다거나 1황자의 꽁한 마음을 푸는 정도까진 할 만했지만, 정작 서로의 감정이 더 중요한 관계에 있어서는 헛발질만 계속 하는 것 같았다.
‘결국 클로에를 화나게 했고……’
제 침울해지는 마음만큼 느려지는 포크질. 또, 클로에 생각이다. 데메트리안은 제게 조소하며 짐짓 무심한 척 물었다.
“근데 1황자 전하께서 책봉을 받으시면…… 너는 어떻게 될까?”
에두른 질문이었지만 대니얼은 데메트리안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곧바로 알았다.
“흠, 글쎄.”
무얼 곰곰 생각하는 듯, 부러 한참을 끌던 그의 얼굴엔 이내 의뭉스런 미소가 피어났다.
“궁정백 영애랑 혼인할 일 없으니 심려치 마.”
“……왜 그렇게 얘기가 되는데.”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데메트리안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던 대니얼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뭐가 문젠데?”
“문제는 무슨.”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얼굴에 써 있구먼.”
그래, 이렇게…… 그는 어려서부터 데메트리안이 말하지 않아도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곧잘 짚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존경스럽달까.’
그리 생각하며 데메트리안은 한숨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네 사랑과 관심으로 좀 해결해 주면 좋겠어서.”
“내 사랑과 관심은 너한테만이지 네 교우 관계까지는…… 근데 네가 웬일이냐?”
대니얼이 놀란 듯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