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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29화 (29/189)

29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2)

물론, 그런 것들을 들어 봤자 클로에나 미라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요량은 없었다. 의상실에서 흘려들은 설명과는 얼추 맞는 것 같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떤 배경지식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판단하고 말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말이 없는 것을 어찌 여겼는지, 라이언은 당황해서는 뭐라도 말을 더 해 보려고 애썼다.

“아, 그, 그리고, 모자는 다른 의상실에서 맞추셨나 봐요. 이번 겨울 유행 스타일인데, 그런 디자인이 출시된 의상실은 없었으니…… 맞춤 제작을 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안드레아는 소품 맞춤 제작을 안 해 주니까…….”

그리고 장갑은…… 라이언이 말을 어떻게든 이어가 보려고 더듬대던 그때, 클로에가 말을 끊었다.

“됐어, 그 정도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제가 정장집 아들이거든요. 아, 물론 이미 아시겠지만…….”

“세상의 모든 정장집 아들들이 너처럼 안목이 좋진 못하잖아?”

“아, 헤헤, 제가 눈이 좀 밝다고는 하더라고요. 제가 여성복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잡지식도 좀 많고요.”

라이언의 답하는 양을 살피며 듣고 있던 클로에가 불쑥 물었다.

“용돈이 필요해서 그런 일을 했던 거니?”

갑작스런 물음에, 칭찬을 들어 나불대던 라이언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에 대해 물어보실 줄은 알고 왔건만 막상 질문을 들으니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저도 떳떳한 일이 아닌 것쯤은 아는지라…….

“넌 모르겠지만, 너 전과 생길 뻔한 거 내가 구해 준 거야.”

참말이었다. 어떤 영애의 신고로 경비대에 끌려갈 운명이었으니까. 그 말에, 아닌 척하려는 듯해도 입이 댓 발 나오는 걸 보니 노숙해 보여도 소년은 소년이었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그래. 네 안목이 흥미로웠거든.”

반쯤은 진실. 클로에는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고파서 꼬드기는 거였지만, 그런 기색을 잘 감추어 두었다.

“저, 사실은……”

라이언은 한참을 머뭇대다가, 더 이상 얼굴 팔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속내를 내뱉었다. 실제로 그에게도 정말 기회일 거였으니까. 어디의 영애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명문가의 귀족께서 제 사정에 관심 가져 주실 일이 평생에 다시 없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저희 집이 남성복만 하는데, 저는 여성복에 더 관심이 많거든요. 근데 집에서 배우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 다른 데서 배우고 싶어서……”

라이언은 미리 준비해 온 대로 저의 사정을 읍소했다. 동정심을 사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인지 그 말이 술술이었다.

요는, 제가 이 정장집을 물려받으면 여성복도 같이 하는 의상실으로 바꾸고 싶어서, 그 기술을 의상실 디자이너에게서 배우기 위해 수업료를 모으는 중이라는 거였다.

“수업을 받겠다고? 견습생이나 조수로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아? 급료를 못 받더라도 강습료를 낼 필요는 없으니까.”

“저는 평일에 부모님 가게에서 일해야 하거든요. 이제는 저만큼 하는 재단사를 새로 구하기도 어려우셔서…….”

“그래서 한몫 잡으려고 그때……?”

“아,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주말에 선술집이나 용병 거리 여관에서 급사 일을 도우면서 따로 돈을 모으고도 있었어요.”

라이언은 억울하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황당한 사기극을 벌인 것치고는, 의외로 성실한 대답이었다. 그 아련한 듯 떨리는 목소리에 동정심 자극 한 스푼이 섞여 있긴 했지만.

클로에는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어떤 것 같느냐는 눈빛을 담아서.

클로에가 라이언과 이야기하는 내내 말이 없던 미라벨은 클로에의 시선을 느끼고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협조적이시지, 이 아가씨가.’

그 막돼먹은 애를 기다리기까지 하면서 포섭하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양, 예가체프에 도착한 이후로 팔짱도 표정도 풀지 않은 미라벨이었다.

클로에는 하릴없이 혼자 머리를 굴렸다. 타인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데에 딱히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믿음직하게 들렸다.

‘보석상 주인이 소개하는 걸 꺼리는 기색도 아니었고, 미라벨도 별말 없으니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면 한마디 했을 텐데.’

저 아이를 회유하려는 것이 탐탁찮은 것과 별개로 말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도 느꼈지만 의외로 담이 작으니, 내가 라크루아인 것만 알게 되면……’

이미 혼자서 정해 두었던 답을 재확인하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마음을 굳힌 클로에는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아주 작은 사업을 해 볼까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제가 어쩌다 여기서 이런 말을 털어놓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에 속절없이 떨리던 라이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네가 짐작하다시피 내가 어디 가서 얼굴 팔고 다닐 사람은 못 되거든. 그래서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

찾고 있었다기보다, 그날 라이언의 하는 양을 봤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식을 구상할 수도 있었던 거지만. 클로에가 무슨 꿍꿍이인지 설명해 주지 않아 꽁해 있던 미라벨도 이내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저평가된 보석을 사다가, 제값에 파는 일을 할 거야. 그런데 골동품점 같은 델 다니면서 물건 사들이는 건 취미생활이라고 둘러댈 수 있지만, 팔 때 흥정하고 새로운 거래처를 물색하는 일에는 대리인이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가 마정석 벨을 울리자, 커피와 코코아 음료, 다양한 빵과 케이크 등이 들어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라이언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시켜 놓은 것들이었다. 미라벨이 도대체 그 애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냐고 할 정도로.

‘있어 봐. 이상한 애면 보내고 우리끼리 먹으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걸 먹이면서 회유할 만큼 쓸모 있어 보이는 애여서 다행이었다. 사람을 꼬드기는 데엔 달달한 게 좋댔으니까.

“난 그 도와줄 사람으로 너를 생각했어. 아티장 지구나 제도의 지리에도 밝고, 안목도 있는.”

클로에가 코코아 음료와 초코 크루아상, 치즈 케이크, 에클레어 같은 것들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먹으면서 생각해 보렴.”

제 눈앞에 벌어진 다과의 향연에 침을 흘릴 듯 굴던 라이언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충성을 맹세했다.

“아가씨께서 제가 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게 구해주셨으니 따르겠습니다! 주, 주인님!”

어쩌면 클로에보다도 클로에가 두르고 있는 울실크, 클로에가 옷을 지어 입은 안드레아 의상실, 고티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페를 예약하고 다과들을 맘껏 시킬 수 있는 재력을 더 믿는 것 같긴 했지만…….

“그런데 주인님, 저어…… 존함을 제가 어찌 불러야 할까요?”

“주인님?”

“그, 그래도 저를 믿고 써 주실 분인데요. 아니면 사……장님?”

라이언이 재깍 갖다 붙이는 말이 클로에의 마음을 꽤나 흡족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주인님’은 제 아버지나 들을 수 있는 말로, 클로에로서는 이번이 아니라면 평생 들을 일 없을 호칭일 것이었다.

클로에는 들뜨는 마음을 사교계 3년 차, 아니 8년 차의 무표정으로 싹 가리운 채 새침하게 말했다.

“같이 일해 보고, 마음에 들면 그때 알려줄게.”

클로에는 곧바로 라이언을 데리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 설명하려면 마력에 오염된 보석을 정화하는 과정을 보여 줘야 하니, 마법사 라구와 약속을 잡아 놓은 것이었다. 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거였으니까.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는 앙헬라타 대로 가장 끝, 알레지오에서도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멈춰 섰다. 라이언에게 정체를 숨길 겸 마차 벽면의 문장을 가려 놓았지만, 혹시 몰라 더 조심하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마법사는 고용이 금지되어 있어서, 귀족가에서 접근하는 것이 곱게 보일 게 못 되었으니까.

로브를 꿰어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 쓰면서 내리는 클로에와 미라벨을 보며, 먼저 내린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분을 숨기시려고 이런 로브를 입으신 건가요? 이거 누가 봐도 캐시미어인데…….”

모두가 라이언처럼 눈썰미가 좋지는 못하겠지만, 평민들이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클로에는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바에 자못 놀랐다.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구나.’

어디서든 영리하단 소릴 빼놓지 않고 듣던 저인데. 클로에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서 거만한 낯을 꾸몄다.

“일단 따라오기나 하렴.”

일이 잘 풀린다면 앞으로 제가 몸소 여기까지 올 일은 없을 것이니 스스로 합리화할 거리도 있었다.

마법사 길드에 귀족가의 사용인도 아닌 아녀자가 친히 방문하는 것은 꽤나 이질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조심하는 것과 별개로, 클로에는 이제 이런 것들이 제 평판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마법사 길드라고 알려진 장소는 알레지오 상점 뒤편에 붙은 창고처럼 생긴 가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어제 클로에의 서신을 갖고 궁정백저를 나선 전령이 묻고 물어서야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을 정도로, 한눈에 무슨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장소였다.

‘내가 마법사 길드에까지 와 보게 되다니, 이것도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다시금 미라벨을 흘끗 보았다. 평소였으면 ‘와, 내가 마법사 길드에도 다 와 보고’ 식으로 클로에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 주었을 미라벨인데, 꽁함이 가시지 않은 건지 뭔가 불만스런 표정을 고수할 뿐이었다.

클로에의 턱짓에 라이언이 녹슨 철문을 당겨서 열자, 마치 잡화점처럼 꾸며 놓은 어둠침침한 매장이 나타났다. 그 가건물의 천장이 어찌나 낮고 내부 면적이 좁은지, 세 사람이 들어서자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매대 안에 앉아 있던 노파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얼른 문 닫으시오. 무슨 일로 오셨소?

“라구 경과 약속이 되어 있소.”

클로에는 괜히 라이언이 듣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여 귀엣말로 말했다.

“라크루아의 클로에요.”

노파가 클로에의 눈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마도구에 입을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잠시만 기다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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