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마차에서 내려선 아가씨들 (1)
탁, 탁, 탁…….
홀로 제 방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클로에의 손끝에서 브로치 하나가 탁자를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것 말고도 짝을 잃은 귀걸이, 투박한 알반지 같은 것들이 탁자 위에 어지러이 올라와 있었다. 아티장 지구의 보석상에 다이아몬드를 판 날, 그 돈을 갖고 그대로 마르코네로 가서 새로이 찾아낸 것들이었다.
루비처럼 보이는 것, 라피스라줄리처럼 보이는 것, 사파이어처럼 보이는 것 등등…… 스칸다르에서의 삶이 없었더라면 눈길도 가지 않았을 것들.
앞으로 다시 겪게 될 5년간의 기억들은 클로에의 오늘을 착실하게 바꾸고 있었다. 축제 장터거리의 경범죄자들을 혼쭐내고, 분리 독립파의 테러를 막고,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제힘으로 돈을 벌어 보고…… 이는 모두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오기 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인 동시에, 돌아오게 되어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들이랄까…….’
언젠가는 허망하게 멀어질 누군가의 마음보다야 더 확실한 것이었다. 2년 뒤 제가 스칸다르로 다시 떠나게 되더라도 유효할 경험이니까.
‘나만의 일을 가져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메트리안이나 오라비 에티엔이 착실히 후계자의 길을 걸어갈 때에, 클로에는 정략혼의 상대가 정해지길 기다리며 사교계에서 인맥을 쌓았다. 그러고서 새로이 적을 두게 된 스칸다르 왕실에서는 어떠한 책무도 질 기회가 없었다.
‘그 삶이 평온하기야 했지만……’
지금 고티유에서의 삶을 다시 누리며 생각해 보면 조금 무료했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저만이 알아본 그 낡은 장신구들이 애틋하게 여겨졌다.
‘지금 안목을 길러 놓으면 나중에 스칸다르로 갔을 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클로에는 제가 마르코네서 헐값에 사 온 장신구들이 라구의 손길을 거치면 어엿하게 거래될 수 있는 상태의 보석이 될 것을 알았다.
마르코네에서는 모두 균일가로 5실버나 10실버에 팔리고 있었고, 다이아몬드를 팔 때에 50실버를 받았으니 최소 다섯 배의 이윤은 보장되는 셈이었다. 보석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거기에 라구 경에게 치를 비용을 빼야지. 저번에는 장부에 달아 놓고 나왔는데, 집사가 마정석 충전하는 데에 많아야 5실버라고 했으니 그쯤 하지 않을까…….’
보석상에서 50실버가 담긴 주머니를 받아 나왔을 때, 클로에는 제가 처음으로 번 돈의 무게와 그때의 느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값졌다.
제 지식을 바탕으로 투자를 해서 이윤을 남긴 경험. 그 이윤이 귀족 영애의 씀씀이에 대자면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발품을 팔아 시세를 알면 이윤을 좀 더 낼 수 있을 것도 같았고……
“라비, 내가 이런 보석을 찾아낼 때마다 정화해서 팔면 사업이 되지 않을까?”
그날, 돌아오는 마차에서 클로에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흠 잡히는 거 아냐? 뭐 하나 해 보자고 해도 다 흠 잡힌다고 싫어하더니.”
“그러기야 했었지…….”
황제의 의도에 따라, 혹은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젠가 정략혼으로 시집가게 될 운명을 타고난 클로에는 ‘최고급 상품’으로서의 몸가짐을 늘 우선순위에 두었었다. 그래서 리도테의 친구들이 물담배 바에 가 보재도, 미라벨이 뒷골목 경매장에 가 보재도 다 거절이었다. 뭔가 일탈로 보일 만한 것들이었으니까.
미라벨을 위해 마르코네에 다니면서도 꺼림칙한 마음이 있었다. 귀족 영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있는 것이 보였다간 소문이 안 좋게 날 것 같아서. 그런 마음에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그녀들이 맘 상하지 않도록 반쯤 진심을 담아 이렇게 너스레를 떨곤 했더랬다.
‘나 비싼 상품이야, 흠집 나게 하지 마.’
하지만 클로에는 2년 뒤에 스칸다르에 가게 될 거였고, 이는 클로에가 어떤 ‘흠 잡힐 일’을 한다고 해서 무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스칸다르에 가게 될 딱 적당한 카드가 저뿐이었으니까.
제 또래의 고위 귀족 영애라고 해 봤자 준황녀인 메리앤뿐이었고, 메리앤은 제국 연방 내의 제후국과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략혼에 쓰일 것이었다.
‘제국 연방에서 벗어날 북방의 소국으로 보낼 영애는 아르투젠에 나 하나지.’
클로에는 씁쓸한 마음을 숨기려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어때,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나.”
두 번째 살고 있어서 마음먹을 수도 있었던 것을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충동이었지만, 며칠 동안 생각을 거듭하면서 그 구상은 구체적으로 거듭났다. 그 연유 역시 그날의 보석상에서 있었던 일에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 청년은 누구인가?”
다이아몬드를 판 값을 건네받고 가게를 나서려다가, 클로에는 갑자기 떠오른 듯 주인장에게 물었다.
첫인상이야 괘씸한 사기꾼이었는데 제 옷을 보고 소재며 의상실을 맞히는 것이 신기했다. 그 정도로 안목이 있는 사람이 사기꾼 행세라니, 무슨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선민의식이 들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인장은 영 모르겠다는 낯을 지어 보였다.
“청년 말입니까?”
“왜, 아까 그 주인장하고 실랑이하다가 갑자기 나간……”
“아아, 라이언 녀석? 청년이라뇨, 아직 열다섯이나 됐을까 싶은 앤데요. 키만 훌쩍 커서.”
“뭐라고?”
미라벨이 혀를 내두르며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그를 마주 보는 클로에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는…… 물론 키가 큰 편이어서도 그랬지만, 얼굴로 봐서도…… 흠흠.
그런 영애들의 반응을 보고 무슨 마음인지 잘 알겠다는 듯, 주인장이 킬킬대며 덧붙였다.
“저기, 한 블록 더 가서 있는 정장집 아들이외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부모님 일 열심히 배우던 놈이 요즘 무슨 헛바람이 불었는지……”
이건 어쩌면 기회였다.
‘신원도 보증되고, 눈썰미도 좋고, 부모님 밑에서 장사 수완도 좀 배웠을 테고, 무엇보다 약점도 잡았다면.’
그 청…… 아니, 소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좋은 기회가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던 ‘장사’ 이야기에 차근차근 계획을 덧붙여 나갔다.
다이아몬드를 팔아 첫 수익을 내고 일주일쯤 뒤, 클로에는 프란츠 광장에서 가장 북적이는 카페 ‘예가체프’의 4층에 앉아 있었다.
귀족들에게야 차 문화가 독보적이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커피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귀족들도 격의 없이 어울릴 때면 카페를 찾곤 했다. 칸막이식으로 운영되는 예가체프의 4층은 그런 귀족 손님들에게 제격이었다.
클로에는 여기서 제복남, 그러니까 라이언이라는 이름의 소년……이라 언급되었던 그를 만나기 위해 와 있었다. 보석상 주인장이 그의 부모가 운영하는 정장집 이름을 알려주었기에, 거기로 전령을 보내 만남을 청한 것이었다.
「내일 15시 프란츠 광장 예가체프 4층. 네 이름으로 예약해 놓을게. 실크 손수건의 주인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청이 아니고 강요였을 수도.
예가체프의 분위기도 익힐 겸 먼저 도착해 기다리자니 미라벨이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풍겼다.
“그 녀석,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벌벌 떨던 걸 보니 소심한 것 같던데. 후환이 무서워서라도 올 거야.”
말은 그리 자신만만하게 하지만서도, 막상 15시가 가까워 오자 조금 더 강경하게 말할 걸 그랬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경시청 관료의 여동생으로부터’ 같은 문구를 떠올렸다가, 그의 부모가 대신 뜯어보면 곤란해질까 봐서 배려해 준 것이었는데.
‘아직 시간 안 됐으니까. 시간 되면 오겠지.’
클로에는 약속 시간인 15시의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를 흘끗 보았다.
귀족가에나 있을 법한 고풍스러운 벽시계가 칸막이로 나뉜 자리에마다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친김에 클로에는 간이 문 너머로 매장의 풍경을 살폈다.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뭔가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려는 것이 처음이라 떨리는 마음에, 왠지 침착하게 기다리기가 힘들어 자꾸만 두리번대게 되는 것이었다.
리도테의 동기들이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다며 여러 번 동행을 제안했었지만,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가 발걸음을 않았으니 미라벨 역시 매한가지였고.
‘가벽이 설치돼 있으니까 방음도 잘 되겠고, 문도 제대로 달려 있어서 보안도 잘 되겠어.’
괜한 조심스러움에 옛 동기들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을 놓쳤던 걸까.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자주 이는 씁쓸함이 떠오르던 그때였다.
“저어…….”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쯤 삐쭉한 소년……이 들어왔다. 보석상에서 봤을 때와 비슷하게 무명 셔츠에 가죽조끼를 입고서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들어온 그는, 고위 귀족으로 인식한 분들을 눈앞에 두자 몸 둘 바를 모르는 듯 쩔쩔매며 한참을 서 있었다.
“계속 서 있을 거니?”
“네, 네?”
“들어와서 문 닫고 앉아. 목 아파.”
“네, 네에…….”
아련한 척하면서 장신구를 탐내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어쩌면 그때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지금의 떨며 더듬는 목소리가 비슷한 맥락인 듯도 했다.
“이름이 라이언이라고?”
“네.”
“몇 살?”
“열다섯 살입니다아…….”
그것도 무려 생일이 이번 달 초에 지난 파릇파릇한 열다섯이었다. 클로에와 미라벨이 이미 제 나이에 충격을 받은 것을 모르는 그는, 그 사족을 붙이지 않은 것이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의 심장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꿈에도 몰랐다.
“오늘 내가 입고 온 옷 평가해 봐.”
“네, 네? 제가 어떻게 감히…….”
“아니, 저번에 했던 것처럼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맞혀 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는 소맷자락을 앞으로 불쑥 내밀어, 라이언이 그 옷감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조금 머뭇대는 듯하던 라이언은 이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옷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 오늘도 안드레아에서 맞추신 드레스인가 보네요. 뜨개 레이스가 독특한데…… 스체르바뇰에서 쓰는 패턴이고, 은은한 빛이 도는 게 염색으로 나오는 건 아니고…… 곰베르 산맥 산자락에 이런 색의 털을 가진 희귀종 양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울실크는 편직된 방식을 보니 마레 지방의 공방에서 짠 거고요.”
한참 코를 박고 옷감을 살피던 라이언이 바들거리는 눈빛으로 두 아가씨들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