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90화
검황대장 카일은 피사트 가문 내 작은 오두막을 찾았다.
오동나무로 만든 문을 밀자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별다른 장식 없이 단출하게 꾸며진 이 공간은 피사트 가문의 가주이자 검의 현인 그리들이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찾는 그만의 아지트였다.
‘명상을 꽤 오래하시는군.’
카일은 그리들이 명상을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래 기다리게해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오늘 비번이라서.”
“차를 우려줄까?”
“좋습니다.”
그리들은 손수 둥글레차를 우려 카일에게 건네주었다.
둘은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차를 다 마신 카일이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러니까, 김철수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특혜를 주지 않았단 말씀이신 겁니까?”
“그래.”
본래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 수련하러 들어가는 검황전의 우승자에게는 반드시 가르쳐줄 것들이 있었다.
“검령과 관련된 것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네.”
검령.
검이 노래하는 절벽은 단순히 검들이 소리를 내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특별한 공간의 검들은 사람과 깊이 소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사람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피사트 가문에서는 그것을 일킬어 검령이라고 불렀다.
검령을 불러내어 수련하면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궁금하네. 김철수가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상태로 과연 검령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어렸을 때 말씀하셨죠. 인간의 몸으로 그건 불가능하다고요. 하물며 4주라니. 아무리 김철수라도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인간의 몸으로는 그게 불가능하지.”
그런데 김철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혹시 정말로 신의 강림체가 맞는 거라면.
그렇다면 김철수는 기어이 검령을 불러내 성공적인 수련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자네도 알다시피 샘물이 강이 될 수는 있지만 모래가 샘물이 되기는 어렵네. 1에서 100까지 가는 것은 쉬워도, 0에서 1을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렵지.”
김철수에게는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만약 김철수가 정말 신의 강림체라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랜 시간, 피사트 가문의 핵심인력들은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서 수련해 왔다.
검이 노래하는 절벽에 대한 정보 없이 그곳에서 수련한 수련자들은 검령과 만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통계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다.
카일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저는 김철수가 더욱더 강해지면 좋겠습니다.”
“어째서?”
“그래야 패는 맛이 있죠.”
“오히려 자네가 당할 수도 있을 텐데.”
“검객이 그걸 두려워하면 됩니까?”
김철수의 강함을 익히 알고 있는 카일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김철수와 제대로 싸우고 싶었다.
그런 카일의 성향을 잘 아는 그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깨져 버린다면. 그 오랜세월 역사적으로, 통계적으로 증명된 불가능이 결국 가능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김철수에게 완전히 협력해야 할 걸세. 그자는 신의 강림체일 테니까.”
“그런데 문제가 약간 있습니다.”
“문제?”
“김철수는 본인의 무구인 미리와 엄청나게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무구와 그 정도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죠. 그런 상태라면…… 절벽의 검들에게서 검령을 불러내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것입니다. 미리가 전력을 다하여 방해할 테니까.”
그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령을 불러내는 기적을 보여준다면…… 김철수. 그 자는 신이 틀림없네.”
“같이 간 항문검이라는 자가 불러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개념 자체가 없어서 그렇지, 일단 개념만 생기면 김철수는 쉬이 검령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의 실력으로 그건 어렵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들이 파악한 이현성의 현재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차진혁은 기이한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저기 바닥에 널브러진 검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먹어치우고 말 테다.
저 검의 시선은 이현성의 엉덩이 부근을 향해 있었다.
‘미리랑 비슷한 녀석이네.’
미리가 상대의 관자놀이나 뒤통수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차진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사내로서 별로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으니까.
어느덧 정신을 차린 이현성은 저 검과 계속하여 소통하려는 듯 보였다.
-검이랑 소통도 못하는 놈이 무슨 검객이냐?
라든가,
-너무 약해서 하품이 난다.
라든가,
-그래가지고 무슨 항문검이라고. 별호가 아깝다.
라든가.
차진혁은 끊임없이 이현성을 도발했고 그것이 이현성을 세차게 채찍질했다.
극한의 잠재력을 일깨우며 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렇게 약 3일이 흘렀고, 일렁거리던 아지랑이는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오,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런 것도 가능하군요?”
또 습관적으로 방송용 멘트를 날렸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꼭 송출하지 않아도 방송 멘트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말하자면 일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으로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방송에 내보내려면 혼을 담아 연출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정말로 취미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카트리나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큼지막한 어깨. 거대한 대흉근. 대포알 같은 복근이 박혀 있습니다. 상의는 탈의한 상태인데…… 검이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다니.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마는…….”
저 형상이 바로 카일과 그리들이 말한 ‘검령’이었다.
차진혁은 중계자의 통찰을 사용하여 검령을 살펴보았다.
[#Boy_♡ #등짝을 보자]
검령과 차진혁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미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 더러운 놈이 감히!
이현성이 저 검에게 잠식당했듯, 차진혁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검이 노래하는 절벽’의 노래는 무구들의 의지를 한껏 증폭하는 공간.
미리의 의지와 생각이 차진혁의 정신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진혁은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져들었다.
‘부수고 싶다.’
차진혁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미리의 충동이라는 것을.
어느덧 본래의 모습인 망치로 돌아온 미리는 저 검을 부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 상태.
그리고 차진혁 또한 그 욕망에 몸이 달아올랐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차진혁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검령이 자신의 본체인 검을 주워 들고서 차진혁을 향해 휘둘렀다.
콰광!
미리와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검의 노랫소리로 가득하던 이 공간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충격파가 소리를 모조리 밀어내버린 것이었다.
-깨부숴주마, 이 등짝 변태새끼야!
차진혁의 눈이 충혈되었다.
미리의 충동에 몸을 맡기니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가끔은 미리에게 몸을 내어주고 욕구를 마음껏 분출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광!
콰과광!
콰광!
검령의 검과 미리가 수십 차례 맞부딪쳤다.
-검고 크고 단단하지도 않은 녀석 주제에!
미리가 마지막 일갈을 내뱉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검을 보호했다.
검 주변에 녹색의 옅은 막이 생겨나는가 미리를 막아냈다.
검령은 사라졌고 검 스스로가 두둥실 떠올라 원래 꽂혀 있던 방향으로 상승했다.
“도망쳤습니다. 아무래도 이 절벽이 검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마법도 아닌 것 같고. 신비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보호의 의지였는데…… 이 비슷한 느낌을 민지와 만났을 때 느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재 해커가 설정해놓은 특별한 공간인 건가?
신의 입김이 닿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차진혁은 상식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약간 버그성 공간인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그 정도 수준의 해커쯤 되면 이런 버그성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나중에 민지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미리에게 육신을 내어준 탓에 차진혁은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었다.
그래서 이현성이 자신과 함께 협공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아, 나랑 같이 싸웠었다고?”
“그래.”
이현성은 몹시 억울해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미지의 괴물(검령)에 맞서 협력하여 멋진 결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사자인 차진혁은 이현성이 함께 했는지 안 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차진혁이 이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 너무 약해서 잘 안 보였다.”
“…….”
“존재감이 너무 약했어.”
“……내가 그렇게 약하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라. 언젠가는 강해지겠지.”
“그래. 난 강해질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현성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는 다시금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소공포증은 완벽하게 극복해 버린 상태.
또다시 아까 그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현성이 정신을 잃고 떨어져 내리고, 차진혁이 검을 막아낸 뒤, 검령이 생성되어 싸웠다.
미리는 이를 악물고 검을 부수려고 했으나 마지막 순간 미지의 힘이 검을 보호하여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이 과정들의 반복이 점점 빨라지고 효율적으로 변했다.
그 가운데 이현성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이었다.
‘좋아. 이제 더 이상 잠식당하지 않는다.’
검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살 달래가며 검의 의지를 끌어내는지 배울 수 있었다.
‘됐다.’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그는 검을 손에 쥐고 땅에 내려오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검령을 불러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차진혁과의 합도 좋아졌고, 검령과 싸우면서 이현성은 자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이 검은 나와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때문에 이현성의 생각을 미리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공격이 전개되었고, 방심하는 순간 검날이 이현성의 엉덩이를 노렸던 것이다.
만약 엉덩이가 아니라 복부나 목 등을 노렸다면 수백 번은 찔렸을 터.
어쨌든 이러한 경험들 덕택에 이현성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중이었다.
‘나는 강해지고 있다!’
바로 옆에서 이현성의 성장을 체감한 차진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빨리 강해지네?’
확실히, 2주 만에 심검의 경지에 이른 녀석다웠다.
잠재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봤자 나보다 약하지만.”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와봐라.”
차진혁이 이현성 뒤에 섰고 이현성은 그런 차진혁을 한껏 경계했다.
지난 며칠, 검령에게 뒤가 계속 노려지다 보니 생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뭘 하려는 거냐?”
“너를 조금은 더 인정하려는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인정하는 의식?”
이현성이 보기에 차진혁은 굉장히 진중한 모양새였다.
‘뭘 하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