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8화
"처음은 아닌 거 같은데요."
중계자의 시선이 새로운 정보들을 전달해 주었다.
[LV202/마리아/스킬/신념의 수호자/당혹스러움]
'와, 보인다고?'
차진혁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역시 이곳을 접선장소로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제왕의 격과 중계자의 시선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거기에 올 클리어 효과로 적용한 정도의 중계자의 시선이면, 레벨 200대의 상대까지 읽어낼 수 있다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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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능력에 대한 객관화는 무척 중요한 요소다.
물론 내가 '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욱 잘 읽어낸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레벨 200이 넘는 마리아를 읽어냈다는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와씨, 개설렌다. 어떡하지? 내가 초고수의 정보를 읽었다고.'
각 국가마다 분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레벨 200부터는 초고수의 영역이다.
참고로 차진혁의 회귀 전 레벨은 240이었다.
"그렇네요. 처음이 아니죠. 아까의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시네요."
"그럴 수밖에 없게 돼서요."
"최갑수 영감님 때문에?"
"그런 셈이죠."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계자의 시선으로 날 보니 어때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감당할 수 없을 건 또 뭡니까?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패기가 좋군요."
마리아는 빙그레 웃고서 차진혁을 바라보았다.
차진혁은 마리아에게 좋은 기억이 아주 많다.
'마리아가 없었다면 나는 많이 엇나갔을지도 모르지.'
그저 강해지는 것에 미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차진혁이 가진 힘을 비교적 올바른 일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줬었다.
차진혁은 궁금했다.
'그럼, 지금 내가 느끼는 건 배신감인가?'
믿었던 마리아가 납치같이 비인륜적인 짓을 벌여서?
혹은 플레이어를 세뇌하여 키울 것 같아서?
나도 그런 짓을 당했을까 봐?
근데 덕분에 강해졌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데?
아니, 나쁜 건가?
차진혁은 차진혁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졌고,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지구 서버의 인류는 플레이에 최적화되지 못했어요."
차진혁도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몽마만 하더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레벨 70으로 책정된다.
그러나 지구의 인간들은 어떻게 각성하더라도 레벨 1부터 시작한다.
초보 구간이 거의 100레벨까지 이어지는, 성장이 매우 느린 서버다.
"우리는 지구 서버의 경쟁력이 지나치게 약하다고 판단. 그에 따라 인위적인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자질이 있는 플레이어들을 납치하고 세뇌해서요?"
"세뇌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제가 이현성을 좀 압니다. 제정신으로는 공무원이 될 녀석이 아닌데요."
"그렇다면 이현성 플레이어와 대화를 나눠보세요. 세뇌는 하지 않았어요. 관리자의 직을 걸고 맹세하죠. 그리고 이현성 플레이어를 납치한 적도 없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가 납치시도를 했던 건 '목왕'과 '장강철의 후계자', 그리고 '혈사제'뿐입니다."
차진혁은 그제야 왜 기분이 나쁜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겨우 배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아, 나 자존심 상한 거네.'
목재현, 김정현, 차진솔은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오고 싶은 섭외대상 1순위였다.
그러나 차진혁 자신은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차진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그만큼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는 거잖아?'
1순위가 아니게 된 것은 사실 엄청 좋은 일이다.
애초에 목표가 3등이니까.
너무 잘된 일이 틀림 없었다.
'근데 왜 기분이 더럽지?'
참고로 차진혁이 제외된 것은 그저 '랭킹보드'에 각성명을 등록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마리아의 행위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서, 불법에 조금 더 가까웠다.
"관리자의 지나친 개입으로 볼 것인가, 보다 나은 생태계 구축을 위한 밑작업으로 해석할 것이냐의 차이겠군요."
나는 오늘도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섭외대상 1순위가 아니었다는 점이 기뻐야 하는데 기분이 나쁘다.
철들려면 멀었다.
열은 받지만 말은 어른처럼 했다.
"의도가 정의롭다고 해서 수단이 정당화되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우리에게 늘 가르쳐줬던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그 방법이 옳지 않다면 옳지 않은 것이라고.
"납치나 세뇌 등의 불법적인 강제력이 없었다면, 좋은 밑작업으로 볼 수도 있겠죠. 세뇌는 없었다 말했지만 사실 그걸 확인할 방법도 없고. 납치는 이미 경험할 뻔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
"게다가 그쪽과 저는 레벨 차이가 너무도 현격해서, 그쪽이 저희한테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면 감당해 낼 자신이 별로 없네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의 안전을 위해, 나의 안전을 위해, 청원 시스템을 이용할 겁니다."
참고로 기분 나빠서 이러는 거 아니다.
"……어떤 청원이죠?"
"지구 서버 관리자들의, 잘못된 방법을 통한 지나친 개입을 막아달라는 청원."
마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플레이어의 권리이죠."
초보 구간.
시스템 청원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소 5,000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최소 동의 숫자를 채우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현재 SSF를 이용할 수 있는 지구인은 단 한 명(죠셉)뿐이다.
지구인들의 도움 없이, 레벨 40밖에 안 되는 초짜 스트리머가 타 서버 시청자 5,000명의 동의를 받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힘껏 해봐요."
최갑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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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초대 목록]
1. 돈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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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 덕택에 1분간 채팅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돈벼락 : 돈쭐, 봤냐?]
'돈벼락'과 '돈쭐'은 네임드 시청자였다.
어디서든 큰손으로 통했으며 둘 다 트리니티 클럽의 가입자였다.
돈벼락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했던 기성이었고, 돈쭐은 최근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신인이었다.
둘은 사소한 걸로도 티격태격하며 자존심 싸움을 했는데, 이번에는 개썅마이웨이 방송으로 유명한 '김철수 방송'에서 누가 더 먼저 영향력을 발휘하느냐가 내기였다.
[돈벼락 : 돈쭐, 넌 이미 패배해 있다.]
1분에 불과한 메시지였으나 최갑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의 비서인 몽마 릴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물론이지. 돈쭐 그 녀석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지 않았는가?"
그런데 김철수가 갑자기 청원을 한단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놈이 또 하나 있군. 상대의 레벨을 확인했는데도 저따위 비협조적인 태도라니?"
"돈벼락, 아니, 최갑수 대표님을 영감님이라 부르는 배짱도 가졌는걸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거지."
'돈벼락'은 지구에서 최갑수라 불리길 원했다.
그리고 영감님이란 호칭을 꽤 마음에 들어 했는데, 릴리아는 차마 그런 호칭으로 최갑수를 부를 수는 없었다.
"정말로 청원을 올릴 생각이군."
실제로 청원이 올라왔다.
참고로 플레이에 참여하는 플레이어와 시청자 전원을 통틀어 '유저'라고 칭하는데, 유저들의 많은 동의를 얻으면 시스템이 즉각적으로 검토하게 되어 있었다.
"오픈 베타 서비스에서는 몇 명의 동의를 얻어야 즉시 검토 단계로 넘어가지?"
"5,000명으로 알고 있어요."
"그거 청원 동의, 돈으로 살 수 있었던가?"
"네. 청원 하나당 100만 다이아로 설정되어 있어요."
"싸군."
"……."
"5,000명 어치 청원해. 청원자 이름 공개하는 거 잊지 말고."
릴리아는 잠깐이지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들의 세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릴리아는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 시스템의 청원 페이지에 접속했다.
"대표님. 그런데……."
"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이미 5,000명 달성한 상태네요."
"뭐?"
최갑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청자들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데 벌써 5,000명을 찍어? 귀찮다고 좋아요도 안 누르는 것들인데. 지구 서버가 그렇게 핫한 서버도 아니고."
"그게……."
릴리아가 단말기를 들어 올려 화면을 보여주었다.
[청원 동의자(공개) : 4,200명]
[공개 명단: 돈쭐/돈쭐2/돈쭐3 …… 돈쭐 3912/바람 나그네1/바람 나그네2/바람 나그네3 …… 바람나그네102/사랑,추억,그리고오롯한그리움★]
돈쭐과 바람 나그네 둘이서 4,000개가 넘는 동의를 눌렀다.
둘뿐만 아니라 몇몇 시청자들도 닉네임을 공개하고 동의했다.
[청원 동의자(비공개) : 3,123명]
[청원 동의자 합계 : 7,323명]
참고로 닉네임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로그인도 해야 하고, 생체 인증 등의 귀찮은 작업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공개보다는 비공개로 동의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돈쭐과 바람 나그네 때문에 비공개 동의자보다 공개 동의자가 훨씬 많은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릴리아는 눈을 의심했다.
'돈쭐 님과 바람나그네 님은 그렇다 치고…….'
오픈 베타 서버에서 청원 동의 시스템이 등장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돈쭐과 바람나그네의 동의 숫자를 제외하고서도 무려 3,000명이 넘는 시청자가 동의 버튼을 눌렀다.
이는 전 우주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청원보다 훨씬 쉬운, 터치 한 번이면 되는 '좋아요' 3,000개도 달성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오픈 베타의 스트리머 영향력이 이 정도란 말이야?'
오픈 베타 서버에서 청원 시스템이 활성화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그마저도 동의 숫자는 모두 두 자릿수 미만이었다.
그런데 김철수는 무려 7천이 넘었다.
결국 김철수가 제기한 청원을 통해 시스템의 즉각적인 검토가 들어갔고, 청원자인 차진혁에게 결과가 전송되었다.
[해당 프로젝트의 위법성에 대하여 검증하였습니다.]
[청원인의 요구는 해당 프로젝트의 중지입니까, 개선입니까?]
차진혁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개선.'
[청원인의 요구를 수용하여 해당 프로젝트의 개선을 지시합니다.]
납치 및 세뇌 등, 불법적인 행위 일체가 금지되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시스템이 직접 감시하게 되었다는 알림이 이어졌다.
'아 이제야 속이 후련……. 아니, 이제 확실히 안전해졌네.'
차진혁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 저런 프로젝트에 강제로 납치당하거나 할 일은 없었다.
'굳이 이현성을 만날 필요도 없겠군.'
이현성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면 시스템이 알아서 검토하고 정정할 테니까.
"잠시 방송이 샛길로 빠졌는데요. 저는 제 주력 콘텐츠 진행해 보겠습니다. 목적지는 일산 호수 공원, 황금 두꺼비 던전입니다."
제목을 수정했다.
[황금 두꺼비 던전, 도전합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깔끔하고 예쁜 제목이었다.
역시 제목은 이렇게 지어야 한다.
아무래도 제목 짓는 것에는 꽤 솜씨가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일산 호수공원에 차진혁의 파티 전원이 모였다.
'근데 저건 또 뭐냐?'
'황금 두꺼비 던전'은 이미 유명한 던전이었고, 꽤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호숫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왜 다들 안 들어가고 대기를 하고 있어? 무슨 놀이공원처럼.'
차진혁 기준에서는 같잖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 다음 고객님, 금액은 10만 원입니다."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들 몇몇이 이곳을 통솔 중이었다.
"자 다음 고객님, 금액은 10만 원입니다."
대부분 덩치가 컸고 머리가 짧았다.
네모인간들 같았다.
네모인간들과 플레이어들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아까 앞에 여자는 5만원 받지 않았습니까?"
"저런, 금액이 인상됐다는 소식 못 들었습니까?"
황금 두꺼비 던전은 호수 가운데에 있었고, 거기까지는 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수심이 깊지 않으니 거창한 배는 아니었고 그냥 조각배 같은 형태였다.
저걸 한 번씩 빌려주면서 10만원을 받아내고 있었다.
와 씨, 날강도들이네.
차진솔이 속없는 소리를 해댔다.
"우리 차례 오려면 한참 걸리겠다."
"우리 차례?"
"어. 저기 대기표 주나 봐. 대기표 받아올까?"
진짜 이해 안 되는 소리만 하고 있네.
"저걸 왜 받아?"
"받아야 배를 타고 이동하지?"
보니까 이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인정받은 모양이었다.
"저거 불법이야."
"요즘 세상에 불법이 어디 있어? 막말로 살인을 저질러도 플레이 중에 일어난 일이라면 넘어가는데."
플레이의 빠른 정착을 위해 GM들이 상당한 자유를 허락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플레이어에 한해 그렇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말해주었다.
"세상에, 간도 크네요."
혹시 몰라 중계자의 시선으로 살펴봤는데 쟤들은 비각성자들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니면서 플레이어 행세를 하고 있다.
"비 플레이어들이 플레이어인 척하면서 저런 불법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고 있습니다. 저건 일종의 사기죠. 저런 사기 행위는 근절되어야만 합니다."
선량한 플레이어들 뒤통수를 쳐서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건 빌런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 참고로 나는 빌런들을 매우 혐오한다.
내 주 임무 중 하나가 빌런들을 처치하는 거였고, 내 목숨을 노리던 수많은 애들도 다 빌런들이었다.
내 목소리가 꽤 컸는지 덩치 중 하나가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중계자의 시선으로 이름을 살펴볼 수는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니 그냥 네모라고 부르겠다.
"어이, 방금 뭐라고 지껄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