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7화
오전 9시.
강남구 1번 GM인 오무르는 오늘도 청담동의 연금술사 공방을 찾았다.
VIP중 VIP, 트리니티 클럽의 최갑수(돈벼락)를 찾아 간단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최갑수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건 비단 최갑수뿐만 아니라 트리니티 클럽 VIP들이 대부분 그랬다.
이루어놓은 것은 너무 많고, 시간도 많으니 오히려 심심해지는 것이었다.
'오늘도 가볍게 말상대나 해드려야겠군.'
최갑수는 그래도 상대하기 편한 VIP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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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진상을 부린다거나 히스테리를 부리지는 않으니까.
잡담만 잘 나누면 관리자들을 그리 괴롭히지 않는 타입이었다.
수다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말만 잘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내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지 뭔가?"
"어떤 자랑을 하셨습니까?"
VIP를 응대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했던 말을 반복해서 되물어주고 간간이 감탄해 주거나 웃어주면 되었다.
거기에 세 가지 추임새만 탑재하면 아주 쉬웠다.
정말입니까?
놀랍군요!
대단하십니다!
이 세 개면 완벽했다.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그 있잖나, 신규 서버의 애송이. 숱한 VIP들의 대화요청도 모조리 무시하고 소통도 아예 안 하는 그 배짱 있는 친구."
"아, 김철수 말입니까?"
신규 서버, 그중에서도 오픈 베타에 진입한 서버는 주목을 받기 어렵다.
아직 콘텐츠의 내용이 너무 초보적이고 한정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례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다.
"그래. 김철수. 뭐라더라. 뭐라고 부르던데?"
"개썅마이웨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래. 아무튼 그거. 그놈이 내게 초대장을 발송했네."
"오, 정말입니까?"
"그렇지."
오무르는 깜짝 놀란 척했지만 사실 놀라지 않았다.
초대장 발송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제 내 이름이 상단에 떡하니 박히지 않겠는가?"
"대단한 일이군요."
"그렇지. 트리니티 클럽의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약 올라 하겠는가? 흐흐흐."
오무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까짓 것이 뭐라고.
트리니티 클럽의 VIP들이 약이 오른단 말인가.
"놀랍습니다!"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불가사의조차 이해하고 동의하게 만드는 신비한 재주가 있었다.
"에이. 자네는 별로 안 놀란 거 같은데?"
"트리니티 클럽의 VIP들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서로의 것을 탐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고만고만하다는 얘기를 고상하게 할 필요 없네."
최갑수의 표현이 정확했다.
트리니티 클럽은 전 서버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자들의 모임이었으나, 이너써클(Inner Circle) 안에서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다들 똑같이 대단한 자들이었으니까.
"거창하고 대단한 것보다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도 상당한 경쟁을 하신다는 풍문을 들어보았습니다. 그것이 삶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소소한 방법이라……."
"유치한 짓을 일삼다고 그냥 말해도 되네."
오무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최갑수에게 유치하다고 말을 한단 말인가.
"아무튼 몇몇 녀석들과 크게 내기를 했어. 누가 가장 먼저, 김철수의 방송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느냐.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릴 수 있느냐. 메시지를 누가 먼저 띄우느냐."
"오,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결국은 내가 이겼네. 후후.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단 말이지."
최갑수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무르는 최갑수의 말을 여전히 머리로만 이해했다.
저들의 세계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겨우 그딴 걸 위해서 수억, 수십억을 때려 박는 천외천의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냥 닥치고 이해하자.'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상의 이야기다.
"곧 시작하겠구만.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이때가 기회였다.
"저도 제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십시오."
[돈벼락 : 드디어 시작인가!]
첫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내가 이겼다, 이놈들아!'
참고로 이걸로 100억 다이아 내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평소 어울리는 5명과 내기했으니, 무려 400억을 벌었다.
그러나 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깟 400억보다는 자존심 승부가 훨씬 중요한 거였으니까.
내기 조건은 30초 이상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기껏 켠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꺼버리는 것이었다.
SSF 단말기를 통해 친우들에게 연락이 왔다.
[내기는 끝나지 않았다.]
[성공이라 인정할 수 없겠군.]
[무승부.]
미리보기로만 봤지만 무슨 내용인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최갑수는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릴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테이블에 따뜻한 차를 올려 놓았다.
"김철수가 직접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인지 얘기나 들어보지."
그는 무척 불쾌한 상태로 김철수와 만남을 가졌다.
김철수(차진혁)가 찾아온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비록 사고이기는 했지만 이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초대장을 다시 드리려고 왔습니다."
"일단 앉게.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제 플레이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어떤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저도 모릅니다. 제 능력으로는 레벨이 보이지도 않더군요. 아마 저보다 훨씬 초월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오픈베타 서버에 그런 놈이 있다고?"
최갑수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초월적이면 얼마나 초월적이길래, 자신의 소중한 유희시간과 자존심을 짓밟는단 말인가.
"오무르!"
최갑수는 곧장 GM콜을 사용했다.
3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오무르가 워프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차진혁은 황당한 듯 오무르를 쳐다봤다.
'허? 3초도 안 됐는데?'
GM들은 늘 과로와 야근에 시달린다.
아주 바쁘다.
그 바쁜 GM이, 그리고 연차가 꽤 쌓였을 거라 짐작되는 GM이 3초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처음 본다.
'진짜 어마어마하구나.'
최갑수가 말했다.
"아는 거 없나?"
"그것이……."
최갑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해봐."
"기밀사항이라 제 권한으로 말씀드리기가 조금……."
최갑수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고 오무르는 잔뜩 긴장했다.
원래 평소에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서운 법이다.
"자네 권한으로 어렵다?"
최갑수의 목소리가 좀 커졌다.
"그럼 맵 단위 관리자, 아니, 서버 단위 관리자 불러와!"
말하자면 사장 나와! 인 거 같다.
시스템에서 사장 나와는 또 처음 보네.
"그, 그게……."
오무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말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서버 단위 관리자, 이름이 뭔가?"
"체, 체르시 전무님입니다."
"아, 그 꼬맹이가 벌써 전무야?"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곧바로 확인 후 안내드리겠습니다."
"5분 주겠네!"
오무르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한 사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김철수 플레이어에게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이제는 안 그럴 테니까 입 닥치고 조용히 해라? 체르시가 그렇게 말하라고 알려주던?"
차진혁은 릴리아가 타준 감귤차를 마셨다.
몽마들이 내주는 차는 그 향이 일품이었다.
'영감님 진심으로 화났네.'
화는 잘 안 내지만 일단 내면 끝까지 낸다.
이미 일이 저렇게 벌어졌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고 납작 엎드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또 금방 화가 풀리는 스타일인데, 아직 파악을 못했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지막이야. 내 시간은 귀하네."
결국 오무르는 죽상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실은……."
나한테는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었다.
'시스템 차원에서 플레이어들을 선별하여 육성한다?'
국가 차원이 아니라 시스템 차원이었다.
그럼 과거의 차진혁은 시스템 차원에서 지원을 받아서 육성된 검왕이라는 뜻이었다.
'아, 어쩐지 내가 좀 세더라.'
얘기를 듣다 보니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아하. 우리 애들을 납치하려고 했나 보네.'
김정현이나 목재현처럼 9성 직업을 가진 애들을 납치해서 키우려고 한 것 같았다.
시스템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니 애들의 신원도 특정할 수 있었을 거고.
'그렇게 된 거군!'
이제야 좀 명쾌해졌네.
저레벨의 유망주를 납치해서 키워내는 건 아주 효율적이고 훌륭한 육성 방법이다.
회귀 전의 나는 자원했었지만 납치당했어도 괜찮았을 거 같다.
"……하여 김철수를 비롯한 김철수의 파티원들은 제외 대상으로 설정하여, 해당 프로젝트에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도록 하는……."
"또 내 유희를 망치기만 해보게. 다음은 체르시, 그놈을 직접 부를 것이야."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현성도 납치된 것이 틀림없었다.
공무원 하기 싫다고 뻗대던 애가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세뇌 같은 걸 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럼 이현성이 예전의 내 역할을 대신하면?'
다시 말하지만 내가 더 강했다.
내가 압도적이었고 다른 애들이 고만고만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한두 번 정도는 랭킹 1위를 빼앗긴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거의 올 타임으로 내가 랭킹 1위였다.
아니, 한 서너 번 뺏긴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이현성이 시스템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관리받고 성장하면?'
그러면 나보다 세지는 거 아냐?
'그건 좀 싫은데.'
지가 제일 세다고 또 얼마나 으스대고 다닐지 벌써 좀 짜증이…… 아니, 이거 아니지.
스트리머보다 검술가가 센 게 당연하다.
내가 기분 나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정신 차리자, 차진혁.'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봐."
나는 분명 혼자 택시를 탔는데, 내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을 하던 택시 기사님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서대문구 지역 3번 GM 키하엘이었다.
"잠깐 나랑 얘기를 좀 해야겠는데."
표정이 꽤 험악했다.
"얘기는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방송 켰다."
방송을 켜자 갑자기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무게를 잡나 몰라.
이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신입이다.
노련함이 떨어진다.
"서대문구 지역의 관리자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눌까 하는데."
"잠시만. 제목 설정 좀 하고."
[공익광고에 등장한 신성 검술가가 사실은 프로젝트의 결과물?! 그 충격적인 전말을 찾아서.]
아, 심플한 게 최고인데.
키하엘이 신경 쓰여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막 지었다.
제목을 이렇게 지으면 안 좋을 텐데.
"네가 봤던 그 관리자 기억나지?"
"관리자라면……."
"그래. 마리아 팀장님."
내가 기억하기로 마리아를 일컬어 팀장이라 부른 관리자는 없었다.
"그분이 너를 잠깐 보고 싶어 하시는데."
기껏 미래 지식을 다 알고서 회귀했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지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아 또 설레네, 짜증 나게.
"나는 방송하느라 바쁜데. 그리고 이런 내용 기밀이라며? 나 방송 중인데 괜찮나?"
"시크릿에서 해제돼서 괜찮아."
"음. 시간과 장소는?"
"네 편한 대로 맞춰주신다고 해."
"그럼 사러가 던전에서 보자."
"언제?"
"지금."
마리아와 만나보기로 했다.
이내 나는 사러가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러가 던전에 입장합니다.]
들어가자마자 업적을 적용시켰다.
[업적, '올 클리어(사러가 던전)'를 적용하였습니다.]
[사러가 던전의 마물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오른 손목에 '올 클리어 각인'이 한 줄 돋아났다.
올 클리어 업적 효과 덕택에 사러가 던전의 주먹 원숭이들은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이내 바닥에 마법진 하나가 생성되었다.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얼굴.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처음 뵙네요. 김철수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