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6화
강남구 1번 관리자, '오무르'는 정년퇴임을 앞둔 관리자였다.
지구의 인간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그는, 최근 신설 서버인 지구로 발령받았다.
오픈베타 서비스까지만 성공적으로 관리 하면 두둑한 퇴직금과 함께 쉴 수 있었다.
이제 6개월 남았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자.'
사고만 안 치면 된다.
6개월 뒤면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
젊은 날의 패기는 이제 없었다.
그냥 사건사고만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관리자 알림이 매섭게 울렸다.
'아이씨, 이건 뭐야?'
시스템에는 VIP 제도가 존재한다.
VIP패키지를 구매하면 VIP 획득 자격이 주어진다.
이후, 1년에 1억 다이아 이상을 사용하면 화이트 등급.
5억 다이아 이상을 사용하면 옐로우 등급.
10억 다이아 이상을 사용하면 블루 등급.
20억 다이아 이상을 사용하면 레드 등급.
이런 식이었다.
레드 등급부터는 원하는 서버에 플레이어로서 직접 플레이어로 뛸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VIP들의 최정상에는 '트리니티 클럽'이 존재했다.
'트리니티 클럽의 VIP가 온다고? 지구에?'
다른 등급의 VIP들과는 달리, 트리니티에게는 VIP 금액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 우주를 통틀어 상위 99명에게만 주어지는, 그야말로 천외천의 집단.
'왜 이런 보잘것없는 오픈베타 서버에서 플레이를 하겠다는 거야?'
지구를 방문하겠다 밝힌 자는 바로 코드 네임 '돈벼락'이었다.
참고로 트리니티 자격은 1년에 한 번씩 갱신된다.
재작년에 아무리 많은 다이아를 지불했어도, 작년에 상위 99명에 들지 못하면 트리니티 자격은 박탈된다.
'돈벼락'은 10년 동안 무려 7번이나 트리니티 명단에 이름을 올린 명실공히 최고의 네임드였다.
'이제 겨우 시작인 이런 불모지에서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강남구 1번 관리자 오무르는 '돈벼락'의 지구 방문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VIP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주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VIP의 작은 클레임 하나에, 관리자의 목이 날아가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말년에 일이 꼬여 버렸으나 얼굴에는 직장용 미소를 가득 담았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성함과 신분은 어떻게 설정할까요?"
"오, 그게 바로 되나?"
"예. 서울 필드에서는 '두 번째 신분'을 바로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군. 근데 그건 '신비' 아닌가?"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GM으로서 몇몇 번거로운 작업들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돈벼락의 비위를 맞추는 게 최선이었다.
나이 68세, 연금술사 최갑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내게 알림이 들려왔다.
[SVIP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와, 이게 바로 자본주의구나.
내 롤모델은 '비밀상자'였고, 비밀상자의 스트리밍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비밀상자는 철저하게 소통을 거부했고 그것이 하나의 컨셉으로 먹혀서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었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이놈의 SVIP 메시지는 거절 자체가 안 되는 자본주의 끝판왕 메시지였다.
[자네와 만나고 싶은데,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나? 생각이 있으면 이곳으로 찾아오게.]
아래에는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XX-XXX]
'청담동?'
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도 최갑수 할아범은 청담동에 연금술사 공방을 열어서 많은 포션과 아티팩트들을 제작하곤 했다.
'와, 그 사람 좋은 영감님이 사실은 오픈 베타부터 내 방송을 보고 SVIP 메시지를 보내는 큰손이었다고?'
나는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잠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지향하는 삶은 이렇게 거물과 만나는 삶이 아닌데.'
나는 그냥 소소하게 연희동 건물주 하면서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려고 했는데.
그냥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거물 아닌가.
물론 그냥 이성적으로 생각만 한번 해봤다.
이 정도 생각도 안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이다.
어차피 나는 스트리머로서, 최갑수 영감님을 만나보려고 했다.
[나를 만나러 와준다면 즉시 1억 다이아를 지급하겠네.]
만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 * *
나는 약간 황당해졌다.
'아, 여기가 원래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였구나.'
간판을 보니 알겠다.
여긴 하이엔드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였다.
내가 활동할 시절에는 연금술사 공방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건물을 구매해서 자기 공방으로 바꾼 걸 보면 진짜 돈이 썩어나나 보다.
입구에는 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연배는 아버지 정도 되어 보였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의 옷 같은 걸 입고 있었다.
'관리자?'
내가 모르는 관리자인 걸 보면 지구서버의 초창기 관리자인 것 같다.
[?/?/?/?]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살펴볼 수 없는 관리자.
아마 경력이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당신이 스트리머, 김철수입니까?"
"예, 그런데요."
"연금술사께서 기다리십니다."
"근데 누구신지?"
"제 이름은 오무르. 강남구 1번 관리자입니다."
"아……!"
강남구 1번 관리자 오무르.
얼굴은 몰랐지만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돈벼락을 맞고 싱글벙글 웃으며 은퇴했다나 뭐라나.
"최갑수 님께서는 2층에 계십니다."
세상에, 살다 살다 관리자가 직접 나와서 이렇게 응대해 주는 경우는 처음 봤다.
"왔는가?"
척 봐도 으리으리해 보이는 소파에 최갑수 영감님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았다.
아마 나이도 안 먹는 설정인 것 같았다.
이야. 얼굴 보니까 괜히 반갑네.
"연금술사 최갑수 님입니까?"
"그래. 내가 최갑수일세."
"사람이세요?"
"사람이기는 하지?"
"SVIP라던데, 그게 뭔가요?"
그런데 내 옆에서 관리자 오무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마어마하게 부담스러운 자리인가 보다.
"그냥 돈 많이 쓰면 되는 거네. 자, 자리에 앉지. 마실 것 좀 들겠나?"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겠습니다."
아주 훤칠하고 단정한 남자 직원 한 명과 여자 직원 한 명이 각각 커피와 차를 내왔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 없고 꾀죄죄한 연금술사 지망생들만 있었는데.
이 시기의 최갑수 영감님은 꽤 부르주아 컨셉인 것 같다.
"절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자네처럼 기이한 방송쟁이는 처음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가 호기심이 일어서 말일세."
얘기를 들어보니 SVIP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단다.
트리니티인가 뭔가가 되어야 한다나 뭐라나.
거기에 더해 강제 메시지 전송권을 사는데 30억 다이아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중 3억 다이아가 후원금으로 지급됐고 말이다.
"……그러니까 메시지 한 번 보내려고 30억을 넘게 태웠다고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
최갑수 영감님.
예전부터 통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과거 내가 알던 최갑수 영감님보다 훨씬 더 배포가 컸다.
'그때는 지구 패치가 완료된 상태였나 보다.'
지금의 최갑수 영감님은 아직 지구 적응이 덜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구인들의 스케일을 약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자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재화를 아끼지 않아."
"제가 영감님한테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영감님이라 불렀다.
그러자 오무르 관리자가 펄쩍 뛰었다.
"이봐, 누가 호칭을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나!"
"괜찮네. 영감님이라. 마음에 드는 호칭이야. 앞으로 늘 그렇게 불러주게."
나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던 오무르는 순식간에 깨갱해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섰다.
나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약간 안쓰러웠다.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움찔하는 것을 보아하니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말년인가 보다.
"제 방송의 어떤 면이 영감님의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았죠?"
최갑수 영감님은 원래부터 호구로 유명했다.
이 영감님만 잘 구슬려도 내 목표는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영감님이 좋아하는 포인트만 잘 잡아서, 영감님에게 충분히 가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면 금방 연희동 건물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진짜 은퇴해야지.
"한 가지를 먼저 묻지. 어떻게 그 모든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렇게 담담하고 침착할 수 있나?"
"네?"
"어떻게 그리 당황도 하지 않고 상황들을 해설할 수 있느냐 이 말이야."
"당황할 일이 별로 없었어서요?"
괜히 당황한 척, 놀라는 척 해봐야 작위적인 게 티 날 게 뻔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
"마치 회귀자 같더군."
"회귀 아니라고 공증받았습니다."
"벌써 거기까지 했다고? 그걸 못 봤네."
"뭐,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어, 강심장이로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다들 이러고 산다.
참고로 내 동료들 중 그나마 내가 감성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럼 해설법은 누구에게 사사받았지?"
"해설법이요?"
딱히 그런 걸 배운 적은 없는데.
"현 상황과 연계된 각 플레이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요점만 정확히 짚어서 간결하게 설명하더군. 어린애들이 들어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마치 베테랑 같았네."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시청자계의 고인물다운 통찰력이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무덤덤한 해설과 아주 잘 어우러지는 진행방식이었어. 지속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본신의 무력까지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네. 정말 스승이 없었나?"
"예,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재능과 통찰력의 영역이라는 뜻이겠군. 으하하핫!"
"딱히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통찰왕이면 내 동료였던 내 동료였던 스트리머 강미나는 초슈퍼통찰왕쯤 되겠지.
스트리밍의 영역에서, 나는 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어, 겸손한지고."
겸손한 게 아니라 진짜 사실을 말한 건데 영감님은 크게 감동받았다.
영감님은 내 방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했는데 종합하자면 내 방송이 영감님의 취향이라는 뜻이었다.
내게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겨우 베타 서비스에서 이렇게까지 내게 큰 영감을 준 스트리머는 없었네. 아주 훌륭해. 이렇게 기대감이 충만한 방송은 처음이야. 거기에 겸손하기까지 하니 아주 마음에 쏙 드는군."
저 정도 아닌데 좀 부담스럽네.
칼질을 잘한다는 칭찬은 기쁜데, 스트리밍을 잘한다는 칭찬은 민망했다.
강미나가 들으면 얼마나 비웃겠어.
"앞으로도 지켜보도록 하지.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있죠."
지금 보아하니 영감님의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영감님의 취향을 아주 정확하게 저격한 모양이었다.
이때가 기회였다.
"연금술사라고 하셨죠?"
"그렇지. 지구에서는 연금술을 연마해 볼 생각이야."
"혹시 상급 청동마석 안 필요하세요?"
"흐음."
어쩐지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사실 이해가 안 되는 반응은 아니었다.
아직 초보 구간인 지구 서버에서나 구하기 힘든 것이지, 다른 서버에서는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최갑수 영감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인 것이다.
"이거 첫 업적 판정 받았습니다. 방송으로 보셨죠?"
"……."
"첫 업적 판정, 오픈베타 서비스 상태의 지구 서버에서 처, 음, 으로 획득한 상급 청동마석. 꽤 가치 있지 않습니까?"
'처음'이라는 희귀성에 최갑수 영감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희귀함에 목숨 거는 영감님이다.
"이건 지구에서 오직 하나뿐입니다."
"얼마에 팔 건가?"
"저보다 가치를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최갑수 영감님은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2억 다이아."
"없던 걸로 할게요."
솔직히 나도 쫄렸다.
그렇지만 예전에 최갑수 영감님은 이걸 7억 다이아에 구매했었다.
영감님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희소함의 가치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인정할 수 있는 젊은 친구로구만. 마음에 들어."
이번에도 영감님의 취향을 잘 저격한 것 같았다.
"자, 이거면 되겠나?"
영감님이 종이에 숫자를 써서 내게 건네주었다.
어디보자.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5억?'
나는 단숨에 5억 다이아를 벌었다.
내가 기억하는 7억보다는 적은 금액이지만 더 이상 욕심내지는 않기로 했다.
뭐든지 첫 거래에서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내 보편적이고 행복한 삶.
그리고 찬란한 은퇴를 위해서 말이다.
거기에 방문하면 준다던 1억 다이아도 실제로 건네줬다.
어제 SVIP 메시지를 보내면서 3억 다이아도 후원되었으니 나는 어제 오늘 합쳐서 9억 다이아를 벌었다.
'와 내 예상보다 너무 빠른데?'
아무래도 곧 연희동 건물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양질의 콘텐츠로 보답할게요, 영감님."
"그래야지, 허허허!"
오래 지나지 않아 은퇴하겠지만요.
나는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연희동에 건물 사면 은퇴할 줄 알았다.
"다음 콘텐츠가 무엇인지 내게만 가볍게 귀띔해 줄 수 있나?"
"예, 근데 한 번만입니다."
"앞으로는 알려주지 않겠다?"
당연하다.
내 방송은 머지않아 없어질 거다.
그렇지만 나는 자본주의 미소를 짓고서 고객님을 납득 시켰다.
"계속 스포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다행히 고객님은 납득해 주셨다.
"좋아. 그럼 이다음은 무슨 콘텐츠지?"
"일상 에피 하나에 메인 에피 하나인데, 어떤 것부터 들으실래요?"